평소 대기업 이름을 잘 보고 다니자
몇 년 전 나는 어떤 주문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대기업 가오]가 물씬 풍기는 전화에 매우 빈정상한 영세업자 예술가의 파토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사업자등록증을 장신구처럼 들고 있는 영세업자라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포트폴리오 전체를 넘겨 달라는 얘기는 매우 무례했다.
포트폴리오 일부도 아니고, 전체를 넘겨주면 자신들이 필요한 자료들을 뽑아서 사용하겠다는 당당한 대기업 직원의 목소리에 열받은 영세업자 예술가는 대기업과의 계약을 들어 엎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는겨!!”
본토박이 충청도 내륙 여자의 뒤끝은 대기업의 가오보다 무서운 것이다. 5년이 지났어도 나는 그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전통자수가 이번 한 번만 필요하겠는가!'
전통자수가 필요한 순간이 다시 오면 그들은 반드시 우리 회사로 연락할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전통자수 공방에서는 맡아 줄 곳이 없을 거라는 매우 강한 자신감도 한 스푼 더해졌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대부분과 함께 일한 경험력과 국가에서 작품 매입해주는 예술가의 가오가 합쳐지면 눈에 봬는게 없는 기세가 된다. 또 그런 기세가 있어야 무서운 장인 선생님들이 빼곡한 전통공예 동네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기세없는 예술가는 김빠진 사이다보다 보잘 것이 없다.
어느 날.
저장해둔 대기업 직원의 전화번호 존재조차 희미해졌을 즈음.
매우 인상적인 전화가 왔다. 5년 전, 그 싹수없던 대기업과 똑같은 주문을 해왔다. 주문내용이 너무 똑같아서 대기업 담당자가 바뀐 채 다시 연락이 온 것인가 싶었다. 순간, 흥미가 싹 댕긴다.
‘이번에도 조선빈티지 포트폴리오 전체를 요구할 것인가!
같은 얘기 나오면 나는 뭐라고 혼꾸녕을 내줄 것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통화를 하는데 분위기가 좀 묘하다. 샘플을 받는 주소가 회사가 아닌 일반 아파트다. 심지어 내가 아는 익숙한 아파트다.
‘아, 뭐지. 이거이거, 대기업이 중소기업한테 하청을 준 모양이구나! 자기 아파트로 받는걸 보니, 1인 기업인가? 아니, 기술도 없는 1인 기업이 뭘 어쩌자고 이걸 받아오지?’
흥미는 계속 싹 댕긴다.
영세한 예술가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지만, 개인 아파트 주소로 샘플을 받는 그 대표에게 얄포롬한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래도 나는 대기업 오더를 거절했는데, 저 대표님은 거절할 수가 없었나부다. 아니, 근데 기술도 없이 덜컥 받아오면 어쩐대? 같은 영세업자 대표로서 잘 해드려야지,(아휴~ 그래도 나는 사무실은 있는데…) 그 대기업 계약은 우리에겐 반드시 필요한 스펙은 아니었지만, 그 사장님은 꼭 계약 따와서 앞으로 영업할 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여러 번 샘플이 오가고 주문 규모가 커지면서 1인 기업인 줄 알았던 그 회사에는 여러 구성원들이 존재함을 알게 됐다. 공유메일에 다른 구성원들 이메일이 자꾸 첨부되었다.
'1인 기업은 아니구나, 우리보다는 조직이 훨씬 큰 회사구나!'
괜히 걱정했다. 오지랖 넘치는 감정은 이제 넣어두고, 우리는 그저 주문 내용에 맞춰서 순조롭게 바느질이나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만만한 얼굴로 오지 않는다. 작업과정에서 오해가 생겨서 납품일자가 매우 촉박해졌다. 상대회사도, 우리도, 대기업도 모두 처음 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였다.
그리고 시행착오는 생각보다 존재감이 컸다. 가로*세로 순서를 바꿔서 주문한 사태로, 샘플은 계속 바뀌고 혼란은 커졌다. 깔끔한 직선으로 마무리 되지 않고 비정형 곡선으로 테두리로 결정되자 전통자수 기법도 그에 맞춰서 수정해야 하는 낯선 작업이 매일 반복됐다.
돌이켜보니, 처음 주문내용부터 전통자수 스타일로 접근하면 안되는 일이었다. 전통자수는, 특히 궁중자수가 익숙한 우리들은 정형화된 전통자수가 몸에 배어 있는 상황이었다. 예를 들면, 먼 산을 표현할 때는 관수, 가까운 산을 표현할 때는 자련수, 오색구름은 관수와 자릿수, 평수를 섞는다 등 도식화된 전통자수 기법에 따른 표현방법이 정해져 있었다. 그런 공식이 없이 수를 놓으면 궁중자수의 정형성이 유지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눈으로, 손으로 체득된 우리의 실력이자 조선빈티지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이번 주문에서는 우리의 배경지식이 고정관념이 되어 방해모드로 작동했다. 온전한 전통도안도 아니었고, 어떤 유물에서도 해본 적 없는 기법이라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그 자체를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저 수를 놓는다는 행위만 같을 뿐, [궁중자수 로직]에서 벗어난 일은 내 손도, 조선빈티지 선생님들의 안목도 재조정 시간을 가져야 했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손으로 수놓는 순간마다 아름답고 예쁘다고 느껴야 작업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데, 이게 맞나? 하는 의문점과 함께 수를 놓게 되면 속도감도 없고 바늘땀마다 감정이 실린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작품에서 스며든 불편감을 알아챈다. 선수끼리 파악당하는 일만큼 치욕스러운 일도 없다. 의심스러운 감정을 떨치고 확신의 바늘땀으로 작업하려 애썼다. 문제는 납품시간은 우리의 적응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조선빈티지 전 작업실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선생님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전통자수를 계속해야 했고, 나는 16시간 이상 작업을 해서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포카리스웨트를 생존수 삼아서 3주 가까이 수틀 밖을 못 나왔다. 전통자수 이외에 아무것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제때 납품되지 않으면 우리의 평판과 저 회사의 평판은 거지꼴이 날 것이라는 공포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봬는게 없었다.
급하게 바느질 하느라 퀄리티가 떨어질까봐 더 염려한 시간이었다. 손이 빠른 내가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게 낫겠다 싶어서 무리했다. 조선빈티지 선생님들도 수값 받아서 약값 쓰겠다고 야단이다. 야단날 겨를도 없었던 나는 병원에 실려가는줄 알았다.
[주문 순간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하나씩 다 확인했어야 했는데!
가로 세로 방향부터 착오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사이즈랑 주문량도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불평할 겨를도 없이 숨쉬는 모든 순간마다 바느질했다. 작업과정 중에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피하지 못했다. 기여이 미리 경고했던 일들이 발생했다. 어쩔 수 없다. 결과물이 제때 나오는 일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바느질 이외의 일들은 다른 연구원들한테 맡겼다. 100% 내 손으로 마치는게 상도덕인 이 동네에서, 이번에는 헬프미를 외쳤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전통자수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쉽다.
그리고 기일에 맞춰서 기여이 끝을 냈다. 마지막 등기우편물까지 보내고 정신줄 되찾고 보니 벌써 4월 말이다. 전통자수를 납품한 줄 알았더니, 내 인생 한 달을 통째로 어느 회사한테 갈아 넣은 느낌이다. 안도의 한숨도 여유있을 때 표현이지, 너무 바쁘니까 한숨은 커녕 숨줄 붙어 있는게 다행이었다.
햐......진짜, 진짜, 끝났다.
정말 끝났다.
일주일, 열흘쯤 지나자, 피곤한 몸도 조금씩 회복하고, 작업실마다 한 달을 미뤄둔 스케쥴들이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늦어지기 전에, 작업기억과 노하우들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을 때 의뢰받았던 내용들은 조선빈티지 자료로 정리해둔다.
전통자수는 시간을 많이 쓰는 공예이기 때문에 비슷한 유형의 일들이 왔을 때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복기용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형화된 도안이 아닐 때는 다른 선생님들의 의견도 첨부하여 마무리 짓는다.
보통은 조선빈티지에서만 보고서를 갖고 있지만, 이번 작업내용은 의뢰한 회사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책임연구원께 한 부 더 첨부해서 보냈다. 리포트만 갖고 있다면, 이번 작업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이었다. 대기업에서 이 프로젝트를 계속 발전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실행된다면 우리 공방이 아닌, 규모있는 회사에서 맡는 것이 더 효과적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일이다.
[혹시, 공예가로서 자존심 상하거나 서운할 일인가.
전혀.
전통자수가 더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누가 하든 뭐에 문제겠는가]
의뢰한 회사도 대기업 프리젠테이션을 잘 끝냈다는 연락을 해왔다. 일이 잘 끝났으니, 한 땀 한 땀 손으로 궁중 자수하는 공방에 컴퓨터 자수의 낮은 단가에 대해 물어본 무례는 잊어볼까 한다. (어금니 꽉. 아니, 고급제품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리고 그 낯선 회사 이름.
그렇지만 또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던 그 회사 이름.
나는 조선빈티지 춘계 워크숍으로 간 제주도 시내에서 커다란 간판으로 그 회사 이름을 발견했다.
"어! 저거 우리 갑님인데? 제주도에도 회사가 있네!"
(저기요, 공방주인장님,
제주도에도 회사가 있었던게 아니라 온 세상에 그 회사가 다 있답니다.
해외 어디를 가도 그 회사를 만날 수 있단 말이지요.
대기업 중의 대기업이라고요!)
1인 기업인 줄 알았던 나의 착각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단 말인가.
아니, 왜, 아파트로 샘플을 받으셔서 이런 에피소드를 만들었단 말인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금 더 꼼꼼한 공방주인장이 되어 봅시다.
회사 이름 확인!
명함 확인!
정신줄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