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선물을 안 해보고 드라마를 찍는구나!
[조선빈티지]는 조용한 공방이지만 만나는 사람 스펙트럼은 꽤나 넓은 편이다.
전통자수작품, 맞춤형 선물은 매우 다양한 곳에서 필요로 한다. 정성을 보여야 하는 어둠의 세계에 계신 분부터(!) 고급스러운 한국 전통 이미지가 필요한 외국계 회사 CEO들까지 궁중자수 선물을 바라는 곳들이 많았다.
'근데...... 작은 공방까지 어떻게 알고 오셨을까?'
간혹 궁금해진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포털사이트를 열면 가장 먼저 광고 및 뉴스가 배치되기 때문에 일부러 홍보용 뉴스기사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신문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가급적이면 받지 않는다.
[젊은 장인] 또는 [대중적인 전통공예]
이런 콘셉트로 기사를 쓰고 싶다고 감사한 연락을 주시지만 일단 나는 '젊지도 않고 장인도 아니라서' 그런 기사를 쓸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하는 자수가 대중적인 전통공예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이 있다. '취미를 위한 공예'와 '업을 위한 공예'는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고 조선빈티지는 그의 여집합에 있다고 여겼는데, 대중적인 전통공예품으로'만' 분류되는 게 마뜩잖다. 무엇보다 갈 길이 구만리인 전통공예 동네에서 너무 일찍 사람들 눈에 띄는 일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정은 매우 개인적인 일이고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대부분 공방들은 홍보를 열심히 해야 한다. 매우 작은 시장이라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 동네 분식집보다도 쉽게 망할 수 있는 취약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한 곳에서 의뢰를 받으면 홍보기사는 필수이고, 전시회라도 하게 되면 최선을 다해서 바이럴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에 반해서 우리 조선빈티지는 기본적인 홍보조차도 하지 않아서 더 눈에 띄나 싶기도 하다. 공방SNS가 전부이고(그마저 별로 뭘 하지 않는다) 특별한 의뢰가 오든, 전시회를 하든 조용한 편이다. 어쩌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선물하시는 분들이 마음 편하게 주문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항상 감사한 일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아주 부자부자부자분들의 선물도 제작한다. 일반적인 선물로 제작되는 전통자수에도 정성을 다하지만 특별한 의뢰가 있을 경우에 적지 않게 긴장한다. 일반적인 선물과 매우 다른 '완벽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선물 자체에 의의를 두거나 아름다운 자수에 감동하는 정도지만, 매우 부자부자부자분들 또는 매우 높은높은높은분에게 선물하는 일은 선물 그 자체의 콘텐츠 이상으로 [관련 형식]이 매우 중요하다. 여러 번 경험한다고 하는데도, 나는 부자의 삶이 아니어서 또는 높은 사람의 일상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까지 완벽해야 하는지 기준이 서툴다. 간혹 경험과 생각이 부족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실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마흔 줄에 이 정도 생각이 없었나 싶기도 하고 부족한 안목으로 무슨 고급문화를 다룬다는 건가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바느질 작업실에서 수틀이나 붙들고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적 배워야 할 것들과 경험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으니 나의 리즈시절은 환갑 때나 오나 보다. 다음에는 절대로 같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 입술 꽉 깨물고 다시 작업을 한다.
이런 까닭에 간혹 방송에서 재벌 선물 장면이 나오면 나도 조금 웃는다. 천 원짜리 카드 한 장에 휘리릭 써서 보내는 비서라니...... 좀 있으면 잘릴 것 같다. 작은 공방인 조선빈티지에서 준비할 때도 저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런 식으로 일하면 정말 큰일 나는 거다.
일단, 카드는 종이 종류부터 예민하게 정한다. 낯선 수입지류부터 꽃잎이 섞여 있는 한지까지 선물의 분위기에 맞춰서 준비한다. 카드에 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첫 감촉인 종이질이 먼저다. 카드에 쓰이는 로고 하나에도 우리 공방 로고의 위치, 상대 회사 로고의 위치, 선물을 의뢰한 회사 로고의 위치 및 각각의 크기를 면밀하게 신경 쓴다. 카드내용은 여러 사람이 크로스체크를 한다. 외국계 회사들도 있어서 문화에 따라서 서로 의미가 다르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미리 점검한다. 전통자수를 수놓기 전부터 문양의 의미나 소재의 가치에 대해서 먼저 보고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자수작업이 시작되면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에 시작 전에 조율을 끝낸다.
자수작업이 모두 완료되면, 회사 대표들 간에 스몰토크(small talk)가 될 수 있도록 문서를 만든다. 선물에 관련한 스토리텔링을 한글버전 및 영어버전으로 나눠서 준비한다. 선물시기에 맞는 세시풍속 이야기, 자수 문양에 대한 이야기, 상대방 회사를 위해서 자수에 어떤 표현을 했는지 별도문서로 남긴다. 회사 내부회의에서 추가할 내용이나 수정할 내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을 파일링한다.
한글로만 문서를 작성하면 직원들이 또다시 번역작업을 해야 한다. 부하직원들로서는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공방에는 다음 의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번역본까지 준비를 해야 한다. 간혹 우리가 준비한 내용을 마치 담당자 자신이 조사한 것처럼 상부에 보고하는 경우도 본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 있는 일인데, 다음 의뢰가 오면 가격을 굉장히 높게 부른다……나는 너그럽지가 않다.
자수를 담는 상자는 보통 '의뢰한 회사 로고가 인쇄된 선물상자'를 요청한다. 조선빈티지 브랜드가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회사가 아니라서 선물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의뢰한 회사 브랜드로 표현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싶었다. 그런데 꽤나 규모 있는 회사에서도 회사의 로고가 인쇄된 여러 크기의 상자들을 갖고 있지 않아서 놀랄 때가 많다. 작은 공방인 우리도 로고가 인쇄된 패키지들을 갖고 있는데 우리 공방보다 훨씬 큰 회사에서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내게 되물을 때는 무척 당황스럽다.
내부포장재에도 신경을 쓰는데 자수가 액자로 제작되는 경우, 주머니 형태로 제작되는 경우, 비정형 모양에 따라서 포장재를 다르게 사용한다. 최근 우리나라 회사들도 그렇지만, 특별히 외국계 회사에서는 [친환경]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포장재가 과하거나 플라스틱 재질이 포함되지 않도록 유의한다. 반투명 종이를 사용해서 고급스러움을 높이고 오랜 비행에도 선물이 덜그럭거리지 않도록 포장상자를 여러 번 흔들어 보면서 시뮬레이션을 한다.
그 밖에 최근 '보자기 포장'이라는 외부포장재가 유행을 하는데 우리나라 전통보자기 포장방법은 아니어서 굉장히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작업실에서는 선물 받는 상대방이 '일본 사람'이라면 외부 보자기 포장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보자기 포장방법이 '후로시키'(ふろしき: 風呂敷)라는 일본 보자기 포장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공예품을 선물하면 바깥 포장은 보자기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 공방에 의뢰하는 회사 실무자들은 보자기 포장을 별도로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보자기를 수놓고 바느질하는 공방에서 일본보자기 포장법이라니...근데, 의뢰인이 원하면 또 해줘야 하는 작은 공방의 슬픔이란......]
나는 보자기 포장 요청을 매번 거절하기가 어렵다. 전통보자기의 원칙을 설명해 주기에는 대기업 회사 실무자는 너무 바쁘고 나는 조심스럽다. 그나마 가장 전통보자기 포장에 가깝게 마무리하며 불편한 마음을 덜어 본다.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선물과 그 포장에 관해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로 매번 경험하면서도 또 놓치는 부분이 있다. 최선을 다해서 제작했어도 마지막 한 끝, 그 형식이 부족하다면 나의 소중한 자수작품마저도 폄훼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마음에 남아있다. 그래서 매우 부자부자부자분들의 선물장면이 드라마에 나왔을 때 나는 PTSD환자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장면을 확인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조사마저 하지 않은 성의 없는 연출에 크게 비웃는다. 나지막한 육두문자가 특히나 찰지다. 이전에 내가 저지른 실수, 그리고 부끄러움을 애먼 드라마 한 장면에 섞어서 불편한 과거 기억을 떨치려고 한다. 아마 제작진도, 작가도 재벌 선물을 한 번도 안 해보고 드라마를 찍는 게 분명하다. 잘 모르고 드라마를 찍는 일이 죄가 아니니 탓하면 안 되는 줄 아는데...... 내 기억 저 너머로 어느 눈빛 하나가 불현듯 떠오른다. 어느 촬영장에서 내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과 덜 친절한 말투로 대했던 제작진들이 이 시점에 기억이 나네.
......
......
...... 욕을 좀 더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지금 남 욕할 때가 아니다.
조선빈티지가 참여한 어느 드라마에서 성에 차지 않는 자수와 바느질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느질씬이 계속 나오는 드라마라서 바느질 관련 소품들이 많았는데 시간과 비용을 이유로 제작진들이 보내온 기계자수들이 대거 작업실에 들어왔다. 기계자수 모두 나쁜 것은 아니어서 잘 확인하고 진행해도 될 일이었는데 이 케이스는 자수도안부터 실수가 시작되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아차 싶었는데 전통회화 선생님께 크로스체크를 해보니 걱정이 많으시다. 전통회화에는 십장생을 저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고, 혹시 전통자수에서는 저런 도안작업을 하느냐고 되묻는다. 나는 할 말이 없다. 회화선생님은 저런 이미지가 한국 전통자수로 방송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냐고 조용히 말씀하시는데, 차분한 한 마디가 더욱 시리게 느껴졌다.
원치 않은 사건은 벌어졌고 이제라도 수습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봐야 했다.
얼른 촬영장에 가서 소품 PD한테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다시 수를 놓을 테니, 그 기계자수 장면은 나중에 촬영하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스케줄대로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한다. 답이 안 보인다.
일단, 내가 걱정하던 기계자수를 어느 장면에서 쓸 건지 물어봤다.
[아놔, 진짜! 재벌집 선물장면이라는데! 이런 젠장!]
그리고 또 다른 기계자수는 재벌 3세가 입고 다닌단다. 미칠 노릇이다. 재벌들 웃기려고 찍는 드라마는 아닐 텐데 많이 웃게 생겼다.
'설마 저렇게 입고 다닌다고? 배역을 맡은 연예인 생각 안 하나?!'
여러 커뮤니티 반응도 미래기억처럼 벌써 본 것 같고 주변 전통자수 선생님들이나 침선선생님들의 이야기도 이미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기력했다. 화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짧은 한 장면이라도 바느질에 관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나의 원칙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아서 여러 날 골치 아팠다. 그저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여지도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것 이외에 생산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동안은 그저 겪어내야 할 일이다.
조선빈티지, 이 작은 공방에서는 바느질만큼은 100%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맞춤형 선물 의뢰가 올 때도 또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방송 소품을 만들 때도 완벽에 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바느질에 관해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내고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고민한다. 열심히 찾고 노력하는데도 내 기준이 아직은 헐거워서 잘못하는 일이 생긴다. 애써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번 잘못은 글로 남겨놓는다. 내성적인 내게 무척 쑥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을 하는 다른 바느질 공방에서 비슷한 실수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부끄럽지만 쓴다. 창피한 일은 둘째치고 다른 곳에서 같은 잘못이 반복되는 것처럼 최악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일은 제대로 돌아가야 한다.
정성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선물을 준비한다고 해서 안될 계약이 성사되지는 않겠지만, 또는 자수선물에 감화를 받아서 상대 파트너가 눈물겨운 배려를 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하는 태도는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선물에도 소홀함이 없으니 그 회사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이나 서비스도 결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고 싶었다. 당장 의식화는 못할지언정 상대편 회사 관계자의 저 너머 멀리 있는 무의식에라도 한 땀 한 땀 새겨주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었다.
방송소품 역시 같은 이유였다. 전통문화에서 점점 멀어지는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고급스럽고 정확한 전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수틀 하나에도, 바늘 하나에도, 배우의 한복에도, 예쁜 노리개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생각 깊은 이야기와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정확하게 사람들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다. 너무 싸구려 티 나는 수입자수로 만들어진 민속품들이 영상으로 남겨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하고 있다. 나의 욕심서린 바람 때문에 만나는 소품 PD마다 고생이 많다. 이번 드라마 재벌선물 장면은 기도에 맡겨본다. 저 드라마가 그저 국내용으로 끝나길, 제발 넷플릭스에 올라타지 않길 열심히 기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