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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조선빈티지입니다

드라마와 영화, CF에 나오는 전통 바느질을 합니다

조선빈티지에서 수놓은 <영친왕비진주두루주머니> 금사자수


[조선빈티지]

 김태자 궁중자수 선생님(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전수교육조교)의 제자로 만난 다섯 사람의 친분으로 시작되었다. 십수 년 동안 큰 사단 없이 조용조용 같이 바느질하고, 서로 작품에 대한 조언을 하고, 새로 익힌 기술을 나누고, 혹시나 불편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너무 많이 걱정하지 않는 편안한 관계로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돈이 섞인 일에도 큰 문제없이 잘 유지하고 있다. 말 많고 예민한 동네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전통문화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주변에는 바느질 경력 30년, 40년이 넘은 선생님들이 흔하다. 겨우 십여 년 바느질하고 세상에 우리 이야기를 건네는 일이 스스럽다. 바느질과 관련한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다가도, 아직은 바느질만 계속! 열심히! 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의 턱에 걸려 자꾸 글 쓰는 손이 주저할 때가 많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조선빈티지는 전통자수, 한복, 전통매듭, 관모류까지 규방공예 전반에 대해 다룬다. 규방공예는 옛 사대부가 여인들의 생활공예 전반을 일컫는데, 바느질 자체가 부덕(婦德)의 상징이었고 그네들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라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담고 있다. 생각보다 꽤 넓은 영역이고, 각각의 영역들을 손에 익히는데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 이후에야 규방공예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온다면 이 좁은 동네에서도 "아, 누구?", 드디어 이름을 갖게 된다. 물론, 조선빈티지의 규방공예는 일반 사가(私家)의 바느질만은 아니다, '궁중자수'가 기본이다 보니 다른 공방에 비해서 금실 사용이 압도적으로 많고, 고급스러운 샘플들로 공방이 채워진다. 

일반 사가(私家)의 바느질은 한국 전통의 "소박한 맛, 시골 처녀 같은 정스러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엄격한 궁중 바느질은 너그러운 형용사와 어울리지 않는다. 규칙과 격식에 눈이 익어간다. 정감 있는 초충도 자수보다는, 금사로 둘러진 용과 봉황을 볼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담박하고 소담스러운 자수를 꿈꾸지만 언제나 화려한 금사에 먼저 손이 가는 시간을 보냈다. 


 아름답고 화려한 자수 사진이 쌓여가자 바느질 관련된 일감들이 자꾸 찾아왔다. 방송, CF, 영화 등 자수가 필요한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카메라가 좋아질수록, 근접촬영이 많을수록 손으로 직접 수놓은 전통자수 수요는 높아졌다. 일반 사람들 눈에도 차마 기계자수로 영상을 찍기는 어려웠나 보다. 취미로 즐기는 바느질이 아니라 업으로 하는 바느질이다 보니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삼켜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세상 사람들도 알았으면 하는 일들은 위험했다. 여러 선생님들 계신 곳에서 우리가 이런 일을 했다고 매번 홍보하고, 나대는(!) 경솔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지내던 공방이었는데, 이번에 드라마 촬영장에 다녀오고 마음이 바뀌었다. 이건 용기를 내서 이야기해야 할 일이구나, 그저 우리 일을 열심히 한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하는, 내향형 인간의 자각을 불러일으킨 한 마디였다.


"그래서, 선생님, 그 자수가 방송에 나오면 세상이 바뀔만한 일이 생기나요?"


어린 PD의 한 마디가 영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듣는 순간, 

“그 드라마가 세상에 나오면 뭐가 바뀌어서 찍나요?”

순간 내뱉을 뻔한 한 마디였지만 입 끝에 정신줄을 물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내 나이 반토막일 것 같은 어린 피디가 무슨 악의를 갖고 얘기했겠는가. 그저 바느질은 사극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2초짜리 장면인데, 바느질 선생이 와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일이 어린 PD의 피곤함만 더하는 일이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수작품이 드라마에 쓰인다고 했을 때, (비록 우리 손으로 하지 않았고 방송국 소품실에서 가져온 물건이었지만) 단호히 안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서 벌어진 내 책임도 있었고, 뒤늦게라도 바로잡고 싶어서 먼 동네 촬영장까지 쫓아갔지만 잡상인 취급은 몹시도 언짢은 일이었다. 

 나도 '선생님' 소리를 오래 들어서 그랬나, “손대역님”이라는 낯선 단어가 귀에 걸린다. 하루하루 내 삶을 채워가는 소중한 바느질이, 이곳 촬영장에서는 그저 1초를 채우는 별 것 아닌 장면이 된다는 것도 심난하고, 방송을 타게 될 바느질 장면에서 작은 잘못이라도 있을까 염려한 나의 걱정이 오지랖처럼 보이는 것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남쪽 끝에서 작업실로 돌아오는 긴 여정에서도 드라마 촬영장의 말들과 상황들은 소화되지 않았다. 피곤에 기대어 잠들고 새로 맞는 아침에도 씁쓸한 입맛은 그대로였다. 언젠가 바느질 실력을 더 쌓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해줘야지 했던 내 다짐들도, 가슴에 가득 찼던 이야기들도 인내심을 잃었다. 사람들에게 전통자수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방송에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도 커졌다. 그저 작업실 구석에서 수틀이나 붙들고 내 일만 잘하면 되었지 하는 소극적인 대응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전통자수나 전통공예품에 대한 안목이 높아져야 방송으로 남겨지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바꿔낼 수 있지 않을까. 


 K- culture라면서......


 우리나라 전통문화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치면서 정작 이 땅에서 그 전통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대단한 장면들은 소리만 요란한 이미지가 될 것이다. 깊이가 없는 눈요기가 무슨 생명력을 갖겠는가. 깊이는 그 장르에서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의 절실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자수가 방송에 나온다 해도 세상이 당장 바뀔만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 전에 그 장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전통소품을 만드는 우리도, 그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 관계자들도 함께 책임의 무게를 져야 한다. 한 세대만 TV를 보는 게 아니다, 다음 세대 어린이들도 저 말도 안 되는 전통소품의 이미지를 "한국의 전통"이라고 학습하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밖의 사람들도 전통과 상관없는 이미지를 "한국 문화"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더 아름답고 더 격조 있는 작품들이 이 땅에 있다. 제작비에 몰려서 말도 안 되는 전통공예 소품들이 방송에 등장하는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전통 이미지가 필요한 '사극'이나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국가행사'가 존재하는 한 전통을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린 PD의 한 마디에 발끈하듯 글을 시작한 것 같아서 쑥스럽다. 오랫동안 쌓였던 전통소품에 대한 대우, 방송가 사람들의 인식, 비주류 직업의 소외감이 켜켜이 쌓였다가 불꽃같은 한 마디에 화르르 마른 장작에 불 닿은 것 마냥 잘도 탄다. 잘못된 불장난인 듯 나의 글은 허겁지겁이다. 문장력이 좋아지고 더 세련된 글솜씨로 침착하게 적고 싶다는 바람은 금방 불꽃에 타버린다. 

 너무 대단한 무형문화재가 아닌. 

 이제는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전통바느질을.

 도대체 바느질로 어떻게 먹고 사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고 싶다.

 척박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전통공예 동네에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조선빈티지>의 이야기를 스스러워하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담는다. 바느질 동네가 아니라 글동네에 와서 손이 눈치를 본다. 

 ‘바느질하는 사람이 손재주 있으면 족하지, 글재주까지 바라면 욕심이지.’

 스스로 되뇌지만 그래도 너무 못난 글은 아니었으면 하는 최소한의 체면치레 욕망은 여전히 남아있다. 글 읽는 분들의 너그러움에 기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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