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사람들과 함께 맞이한 새해, 총통부 국기 게양식

2026년 대만 총통부 국기 게양식(總統府升旗典禮) 참관기

by 김요셉

2025년의 끝자락은 내게 조금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대만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연말이자, 1년 전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이곳에 머물던 내가 어느덧 대학원생이 되어 새로운 한 해를 마주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마냥 설레기만 했던 작년에 비해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작년 타이베이 101에서 인파에 휩쓸려 본 폭죽은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연말은 집에서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 대신,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새해 아침을 맞이해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총통부에서 열리는 신년 국기 게양식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새해, 그리고 중화민국 건국일


1월 1일은 전 세계가 맞이하는 새해 첫날이지만, 이곳 대만에서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12년 1월 1일, 대륙에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날이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수많은 현대사의 풍파 속에서도 타이완 섬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 정체성은 '민국기년'이라는 독특한 연도 표기법에서도 드러난다. 중화민국 건국 연도를 원년을 삼는 이 계산법에 따르면, 서기 2026년인 올해는 대만에서 '민국 115년'이 된다. (* 대만의 정식국호는 '중화민국'이다. )


매년 1월 1일 아침, 총통부 앞에서는 국기 게양식이 열린다. 행사의 기원은 1979년 12월, 미국과의 단교 1주기를 맞이하여 불안감이 감돌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총통부 앞에 모여 국기 게양식에 참여했고, 이를 계기로 1980년 새해부터 정식 행사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건강대만 단결수호 (健康台灣 團結守護)

출처: 중화민국 총통부 홈페이지, https://www.president.gov.tw/NEWS/39735

작년 초, 어학당에서 만난 언어교환 친구에게 새해 이런 행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12월 초중순부터, 대만 총통부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국기 게양식 소식을 올라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해당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총통부 국기 게양식은 매년 주제가 달라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 2026년(민국 115년) 새해의 주제는 '건강대만 단결수호(健康台灣 團結守護)'였다. 보건 의료를 강화하고 내부적인 단결을 통해 대만을 굳건히 지켜내겠다는 현 라이칭더 정부의 국정 의지가 선명하게 담긴 문구라고 생각된다.


출처: 중화민국 총통부 홈페이지, https://www.president.gov.tw/News/39746

행사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시작된다. 본 행사인 국기 게양식은 아침 6시 30분이었지만, 새벽 4시 30분부터 입장이 가능했고 5시부터는 이미 주요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지만, 먼저 다녀온 현지인들의 후기를 찾아보니 예상보다 인파가 엄청나다는 글이 많았다. 결국 나는 새벽 4시에 총통부 도착을 목표로 잡고, 자정 무렵 해가 바뀌는 것만 확인한 채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짧은 단잠을 마치고 새벽 3시 30분쯤 기상했던 것 같다. 내가 사는 기숙사에서 총통부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유바이크로 대략 20~30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였다. 간단하게 세면을 한 후, 한국에 비하면 아직 매섭지 않은 대만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총통부로 향했다.


대만의 새벽은 고요했다. 가끔씩 연말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손님들이 가득한 바를 지나갈 때면, 지금이 자정인지 새벽 4시 즈음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런 거리들을 두세 군데 지나갈 때쯤, 총통부 근처 중정기념당에 도착했다.

4시 30분,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 입장할 수 있다.


중정기념당역 근처에 유바이크를 반납한 후, 총통부까지 슬슬 걸어갔다. 이때부터 주변을 경계하는 경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행인들을 한두 명씩 따라가니 어느덧 총통부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 4시 20분쯤 도착했는데도 이미 제법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족 단위, 친구, 여행객 등 다양한 무리가 있었는데 나 외에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외국인도 입장해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찰나, 4시 30분이 되었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중화민국(대만)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니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마치 대만 사람인 양 주변의 대만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국기를 흔들며 메인 공연장으로 향했다. 국기 게양식 본 행사가 시작되기 전 네다섯 가지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그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대만 원주민의 공연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대만에는 ‘원주민’이 있다. 대만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본성인(本省人), 외성인(外省人)이라는 단어를 들어봤을 텐데, 보통 본성인은 명·청 시기에 이주한 한족을, 외성인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함께 건너온 한족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인=원주민’이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원주민은 한족이 아니다. 원주민은 한족 이주 전부터 타이완섬에 살고 있던 민족을 뜻하며, 현재 대만 정부는 이들을 16개 민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원주민 고유의 언어도 따로 있다고 들었다.


원주민 역사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타이완섬을 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쪽으로 진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공연을 보는 내내 호주나 뉴질랜드 원주민 느낌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필자는 실제로 이전에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음)


대만에 온 지 어느덧 1년 반이 넘었지만, 아직 원주민 친구는 없다. 박물관이나 친구들을 통해 건너 건너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며, 직접 공연을 볼 기회 역시 없었기에 이번 경험이 더욱 인상 깊었다.


사실 타이베이에 살면서 중화권 문화에 비해 원주민 문화를 접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는데, 실제로 공연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두 파트로 나뉜 공연 중 여성분의 독창 무대에서는 왠지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가 떠오르기도 했다.



눈으로는 잘 보이는데, 카메라에는 잘 안 담김..

대만 원주민의 공연이 끝난 후, 곧바로 육·해·공 3군 퍼레이드와 의장대 공연이 이어졌다. 총통부 메인 건물 앞에서 군인들의 사열이 끝나자 정계 인사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TV에서나 보던 대만 주요 인사들을 이렇게 바로 앞에서 직접 보니 무척 신기 했다.


기다리던 대만 총통과 부총통이 등장했다. 내가 거의 맨 앞자리에 있었던 덕분에 육안으로는 잘 보였지만, 정작 카메라에는 그 생생함이 잘 담기지 않은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마침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국기 게양식 차례가 왔다.

영상에는 소리가 잘 담기지 않은 것 같지만, 현장에서는 주변에 있던 대만 분들이 국기가(中華民國國旗歌)를 함께 불렀다. 나도 가사를 조금 아는지라 부를 수 있는 대목은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대만 사람은 아니지만, 나 또한 자연스럽게 대만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국기를 흔들며 밝게 웃는 주변 사람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新年快樂"라고 새해 인사를 건넸다.



국기 게양식이 끝나니 어느새 해가 밝아 있었다.


민국 115년, 그리고 2026년 1월 1일에도 나는 여전히 대만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만 사람들과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 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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