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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코 Feb 26. 2022

질투라는 감정을 시급히 버려야 하는 이유

쓰레기는 시급히 버려야 하기 마련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질투는 매우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군가의 성공--승승장구하는 커리어, 사업이나 투자의 성공으로 인한 부의 축적, 성공적인 연애와 결혼 등등--을 접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이로 인해 자괴감과 불행감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은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도덕적이거나 도의적인 측면은 제쳐두고, 철저하게 실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질투라는 감정은 현대 사회에서 인생에 효용이 정말이지 눈꼽만큼도 없고 정당화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인생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기만 하는 감정이므로, 인생에서 시급히 지워 버려야 한다.  


1. 질투라는 감정의 본질: 제한된 자원과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한 기제


이전 글에서 생각해 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시 사회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현대 사회는 지극히 복잡하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원시 사회는 지극히 단순한 사회였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며, 현대 인류는 원시인들의 후손이므로 원시인들의 기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도 이와 같이 원시 사회에 대입해서 질투라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 사회로 돌아가 보자.


원시인들은 기본적으로 수렵과 채집 기반으로 살아갔고, 무리를 이루어서 생활했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두 가지 특성이 있는데, 하나는 원시인에게 있어서 자원이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해당 무리의 생활 반경에 있는 식량 자원과 기타 가용 자원. 이게 다였다. 자원이 부족해지거나 고갈되면 해당 무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시도하겠지만, 새로운 곳에서도 물리적인 제약은 여전히 작용했다. 또 하나는, 원시인의 사회란 해당 원시인이 속한 무리의 인원 만큼으로 한정되고 또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선택권이 아니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이기에 야생에서 혼자 생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며, 기존에 속한 무리를 버리고 새로운 무리로 이주하는 것은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새로운 무리와 접선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고, 기본적으로 각 무리는 배타적이었기에 생판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줄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시인의 자원과 사회라는 것은 한정되어 있고 또 고정되어 있었다.


이에 더해 원시 사회에서의 성공의 기준은 매우 단순했다. 바로 생존과 번식이다. 오랫동안 생존하여, 건강한 후손을 많이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이었다. 그런데 위에서 생각해본 자원과 사회의 유한함과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원시 사회에서의 성공은 배타적이었다. 즉 원시 사회는 타인의 성공이 나의 실패로 직결되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특정 시점에 해당 무리의 생활 반경 내에 있는 사냥감의 숫자라고 해봤자 제한적이다. 다른 사람이 사냥에 성공하여 사냥감을 먹고 이로 인해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면, 그만큼 나의 생존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맛있는 과일이 많은 골짜기를 발견하여 그곳에 있는 과일들을 채집해 먹었다면, 또 그만큼 나의 생존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짝짓기는 또 어떠한가? 해당 무리에서 짝짓기가 가능한 이성의 숫자라고 해봤자 당연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매력적인 이성을 차지하고 짝짓기를 하여 번식에 성공한다면, 내가 해당 이성과 짝짓기를 하여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지거나 최소한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짝짓기 경쟁에서 밀린다면, 원시인은 번식에 실패한 채로 삶을 마감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루아침에 죽을 수 있는 것이 원시인의 삶이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찌저찌 번식에 성공하더라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과 부모 역할을 공유하는 상대가 다른 이성에게 빠지게 된다면? 자신과 자식들을 등한시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본인의 자식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애정을 뺏어가는데 성공한 다른 이성의 경우는 정확히 그 반대가 될 것이고 말이다. 


원시인들은 무리를 지어 협동하면서 생존 확률을 높였고, 이로 인해 인류는 만물의 영장으로 성장하였으며 또 문명을 이룰 수 있게 되었지만 원시 사회 내에서 개개인들의 역학 관계에는 이와 같은 살벌한 특성이 있었으며, 경쟁은 현대 사회보다 더더욱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었음에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질투라는 감정은 이와 같은 원시적 경쟁에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기제로 작용하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이로 인해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아니, 그렇게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원시인의 생존과 번식에 있어서 타인의 성공은 나의 실패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럼 질투로 인해 원시인들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남을 밀어내고 내가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한 행동들을 했을 것이다. 원시 사회의 개개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당연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야생동물들의 행태를 통해 유추해볼 수는 있다. 수컷 곰은 야생에서 자신의 새끼가 아닌 새끼 곰들을 만나면 죽인다고 한다. 수컷 사자는 새로운 프라이드를 차지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해당 프라이드의 새끼 사자들을 다 쫓아내거나 죽인다고 한다. 이처럼 질투로 인해 촉발된 행동들은 아름다운 행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식의 확률을 높였고, 그렇게 살아남은 원시인들의 후손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도 질투의 유전자가 강하게 남아있을 확률이 높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2. 현대 사회에서 질투가 당위성을 잃어버리는 이유


원시 사회에서는 질투라는 감정이 아름답지는 않을 지언정 효용성을 지닌 감정이었음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다시 시계를 돌려 현대 사회로 돌아와 보자. 현대 사회에서도 질투라는 감정은 만연하며,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의 후손이기에 질투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조금 더 근본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현대 사회에서 질투라는 감정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현대 사회에서의 질투는 당위성과 효용 측면에서 그야말로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사회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의 성공이 나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는다.


원시인에게 있어서 성공은 생존과 번식으로 지극히 명백했다. 내가 번식을 하지 못하고,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면? 내가 무엇을 하던 간에 나는 실패자다. 내가 죽는다면? 뭐 그건 끝 아니겠는가. 그리고 위에서 생각해 보았듯이 타인의 생존과 번식에서의 성공은 나의 실패와 직결되었기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원시 사회와 비교도 안되게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타인의 특정 시점에서의 특정 분야에서의 성공이 나의 인생의 절대적이고 전체적인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공의 정의와 분야가 그만큼 다양하고,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을 성공으로 정의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글감이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쉬운 이해를 위해 경제적이고 조건적인 측면들에서의 성공에 한정지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 한정지어 생각해 보더라도, 현대 사회의 성공은 배타적이지 않다. 


원시 사회와 비교해서 개개인이 속하는 사회의 범위는 비교도 안되게 넓고, 개개인에게 가용한 자원의 종류는 훨씬 다양할 뿐더러 풍부하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집이 5채밖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아무개가 집을 산다면, 내가 살 수 있는 집의 수는 4채로 줄어든다. 아무개가 집을 사는 것은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는 행위며, 이 경우 아무개의 성공(집을 사는 것)은 꽤나 배타적이다. 그런데 실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집값때문에 난리인 세상이지만, 아무개라는 특정인이 집을 산다고 그 이유로 인해 내가 집을 못 사는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아무개가 산 그 집은 살 수 없겠지만, 그 특정한 집을 못 산다고 그것을 실패로 규정하지는 않으며, 내가 살 수 있는 집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다. 또한 아무개라는 특정인이 집을 사면 해당 아파트의 시세는 조금 변동될 수 있어도, 아무개라는 특정인의 구매 행위로 인해 전국적인 집값의 변동이 발생하는 일도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아무개의 거래 행위로 인해 나의 구매 기회가 닫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성공은 배타적이지 않다.


비슷한 예시는 즐비하다. 누군가가 주식이나 코인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것으로 인해 질투를 느끼는가? 그 사람이 주식이나 코인으로 큰 돈을 벌었다고 당신이 주식이나 코인으로 돈을 벌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주식과 코인이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고급 외제차나 비싼 명품을 장만했고, 그것으로 인해 질투를 느끼는가? 그 사람의 구매로 인해 당신이 그것들을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른 고급 외제차나 명품은 수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멋진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거나 결혼에 성공했는가? 그것으로 인해 당신이 멋진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멋진 사람들은 즐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무엇인가를 못하고, 어느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남들보다 부족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이며, 내가 처한 상황의 문제인 것이지,  타인의 성공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타인의 성공이 내 인생에 끼치는 피해는 대부분의 경우 전무하거나, 설령 있더라도 극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질투는 당위성을 잃는다. 그냥 아니꼬운 감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뿐이다. 


질투라는 감정에서 촉발되는 행동들이 나의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실패를 촉발한다.


'성공'에 대한 정의를 좁게 생각해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배타적인 역학관계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의 입학 정원은 한정적이다. 누군가가 내가 목표로 하는 명문대에 입학하게 된다면, 나의 입학 성공률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특정 기업의 채용 인원도 당연히 한정적이다. 누군가가 취업에 성공하게 된다면, 나의 취업 성공률은 그만큼 떨어진다. 누군가가 기업에서 승승장구 한다면, 나의 연봉 인상 확률과 승진 확률이 떨어지게 된다. 특정 시점의 특정 집단에서의 특정한 성공에 한정한다면, 개개인의 성공은 여전히 배타적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환경에서는 개개인이 질투를 느끼기 쉽다. 


그런데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고 또 이를 지니면서 살아가며 취할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상대방의 안위와 재산에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성공 확률을 떨어뜨리는 것이 가능한가? 당연히 불가능하다. 원시 사회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간 꼬리가 잡힐 것이고 법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질투가 촉발하는 행위라고 해봤자 뻔하다. 상대방에 대한 권모술수와 음해, 조직 내에서의 미묘한 괴롭함과 따돌림. 뭐 이런 류의 행위들이다. 이런 행위들에 성공하게 된다면 상대방에게 유의미한 위해를 끼치고 그로 인해 상대방의 성공 확률을 떨어뜨릴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특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와 같은 행위는 장기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본인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현대 사회는 초연결 사회이고, 정보의 전파는 점점 쉬워지고 빨라진다. 미래는 더 연결되고 더 빨리 정보들이 투명하고 빠르게 전파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상대방에게 간접적으로 위해를 끼친다면, 그만큼 자신의 평판과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명 스포츠 선수들과 연예인들이 학폭 이슈로 한방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자. 상대방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위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게 된다면, 인생 어떤 단계에서 어떻게든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그 시점이 언제일지, 그 방식이 어떻게 될지 모를 뿐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미래는 점점 더 초연결 사회로 갈 것이고, 이 흐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행위들과 특정인의 당신에 대한 판단, 특정 조직 내에서의 평판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제되어 언젠가는 회자된다. 질투로 인해 타인에게 간접으로라도 위해를 끼치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만족감을 느끼고 자신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을 지언정, 중장기적으로 오히려 본인의 인생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배타적인 성공의 환경에서도 질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질투를 느끼고 이것에 지배되어 살아가기 일쑤다. 성공의 종류와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서 질투의 당위성과 효용성이 떨어졌지만, 우리는 미개한 원시인처럼 질투를 느낀다.



3. 질투라는 감정을 시급히 지워 버려야 하는 이유


당위성과 효용은 없는 반면 비용은 매우 큰 감정이다


우선 질투는 매우 강렬한 감정이다. 질투에 빠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강한 질투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힘들게 만든다. 또한 질투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삶을 밝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감정이 아니다. 강렬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함으로써 직접적인 감정 비용을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이에 더해 질투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부산물로 자괴감과 자존감의 저하, 자격지심을 불러온다. 이 부산물들은 그야말로 독과 같은 감정들로써, 인생의 행복감을 송두리채 앗아갈 뿐 아니라 삶의 활력을 저하시키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어렵게 만들며, 잡을 수 있는 기회들도 놓치게 만든다.


현실적인 비용도 존재한다. 위에서 질투로 인해 타인에게 간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행태에 대해 적었는데, 타인을 이처럼 공격하는 데에는 사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계략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또 은밀하게 행동하고...질투로 인해 실제 행동에 나서게 된다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바쁜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과 에너지라는 자원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이 비용을 발생시키더라도 그 당위성과 효용성이 있다면 여전히 유효할지 모른다. 원시사회에서는 분명히 유효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사회에서 질투의 당위성과 효용성은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서의 질투는 막대한 비용만 발생시키는 유해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질투가 원동력이 되어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실이다. 질투는 인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질투로 인해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하고, 그로 인해 성공을 거머쥘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비싼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면, 설령 질투를 원동력 삼아 성공하게 되더라도 내가 얻게되는 전체적인 효익은 그 비용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더 건강한 원동력을 찾는 것이 타당하며, 질투가 아닌 더 우월하고 효율적인 원동력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 크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버려야 할 부정적인 감정들이 두 가지 더 있다. 원망과 집착이 그것이다. 그러나 원망과 집착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 섣불리 버리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로 인해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보자. (슬프게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 사람에게 원망을 버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성적으로는 그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원망의 크기는 내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계기로 인해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거나, 어떤 선택으로 인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떠나보냈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지나간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역시 이성적으로는 그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공허함과 상실감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며, 역시 내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질투는 어떠한가? 다른 사람이 눈부시게 성공한다고 내 질투의 크기가 그에 비례해서 커져야 하고, 내가 불행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많이 잘나간다고 내 질투의 크기가 그만큼 커져야 하는가? 완전한 넌센스다. 질투라는 감정 자체도 문제이지만, 질투의 상대적인 크기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질투라는 감정은 그 트리거가 무엇이고 크기가 어떠하던 간에 버리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버렸을 때 얻는 것이 크다


질투를 버리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비용들을 없애는 것 말고도, 질투를 없애는 행위 자체에 큰 효용이 있다. 어떤 것들을 얻을 수 있는가? 타인의 성공을 축하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배포를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의 여유와 배포는 분명한 매력이며, 매력적인 사람이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고 인생에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또한, 질투를 버린다면 타인의 성공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타인의 성공에서 교훈을 얻고 자신의 부족한 면을 채울 수 있다. 이로 인해 질투에 휩싸였을 때에는 불가능했던 타인과 본인에 대한 이성적인 관찰과 여기에서 기인하는 효과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도움이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당신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질투와 자격지심에 휩싸여 있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한 마디의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겠는가? 성공한 사람의 도움과 조언을 받는 것은 본인의 성공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질투라는 감정은 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


질투라는 감정을 버리게 된다면 이처럼 많은 가능성이 펼쳐지게 된다. 질투에서 자유로운 삶과 질투를 느끼며 살아가는 삶을 비교해 본다면, 전자가 더 나은 삶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4. 그렇다면, 질투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그럼 현대 사회에서의 질투라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질투라는 감정은 쓰레기다. 당위성도 효용성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본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유치하고 원시적인 감정일 뿐이다. 쓰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버려야 한다. 그것도 시급히 버려야 한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방치하고 있으면 점점 쌓여서 더 큰 공간을 차지하고, 악취를 풍기고, 해충과 세균을 번식시켜 생활의 터전을 나락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서 질투라는 감정이 딱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질투라는 감정을 버릴 수 있는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남일에 신경을 끄거나, 의식적으로 버리거나. 전자는 사실상 불가능한데,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현대 사회는 초연결사회이고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SNS에는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지인들의 잘 먹고 잘 나가는 소식들이 올라오기 마련이고, 사람들과 만남에서 타인의 성공은 주된 화제가 되기 마련이다. 내가 산 속에 암자를 짓고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남일에 신경을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의식적으로 연습하는 수 밖에 없다. 타인의 성공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끓어오르는 질투라는 감정을 죽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타인의 성공을 축하해주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이에 더해 타인의 성공에서 교훈을 얻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고, 당연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에 의식적인 연습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다.


결론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보건대 개인적으로 최근 질투심을 느낄만한 상황들이 여러 번 있었다. 올해 내 목표 중 하나는 질투라는 감정을 뿌리 뽑는 것이다. 뿌리를 뽑기 위해 질투란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며, 이와 같은 생각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될까 하여 이와 같이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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