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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코 Jul 23. 2021

삶의 기본값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건 나쁜 것이 아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려면, 불행이나 고통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의 반대 개념이 불행이나 고통이므로,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행복에 대해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개개인의 개성의 영역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보편적인 행복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고통과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시사점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고통은 필요악이다


현상은 복잡하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드러난 요소들이 극히 복잡한 어떤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볼때는, 단순화시켜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경제학에서 모형을 통해 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도로 발전하고 또 각 구성원과 사회의 각종 요소들이 지극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의 고통과 불행의 원천은 너무나 다양하고, 또 개개인별로 다르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에 인간의 본성과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원시 사회로 돌아가보자. 원시 사회는 현대 사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했던 반면, 원시인들은 우리의 선조이기에 우리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기질 및 기제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가정하고 생각해보는 것은 고통의 본질과 인간 본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타당하고 수월한 방법일 것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고통의 형태인 통각에 대해 생각해보자. 상처가 나면 아프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통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원시인이 곰에게 공격을 당해 복부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해보자. 적시에 부족원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의 단계를 거칠 필요도 없다. 원시인은 즉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부족원들이 다가와서 도와주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만약 통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 거의 확실하게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또 만약 몸에 이상이 있다면? 몸은 통각으로 이상이 있음을 알려준다. 갑자기 배가 아파온다면, 먹은 것이 잘못되었거나 어딘가 이상이 있다는 징후이다. 원시인은 이것을 인지하고 조치를 취하거나 최소한 부족원들의 간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상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해 죽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원시인에게 통각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생각을 해보면 원시인에게 있어 원초적인 고통이나 부정적 감정들의 거의 대부분이 생존 또는 번식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원초적 욕구인 식욕과 성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식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 성욕이 채워지지 않으면 외롭다. 원초적 욕구에서 파생되는 배고픔과 외로움은 원초적인 고통의 형태이다. 그런데 만약 배가 고프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맛있는 밥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시대이지만, 원시 사회에서의 영양 섭취는 상당히 번거롭고 심지어 위험한 과정을 수반했다. 배고프지 않으면 굳이 위험과 고단함을 무릅쓰고 멧돼지 사냥에 나설 일이 있겠는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영양 섭취를 위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죽게 될 것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떨까? 짝을 찾는 것은 그때도 상당히 번거로운 과정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굳이 그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 또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고 그저 혼자 헬렐레하고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죽을 것이고, 후손을 남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외로움을 느껴야지 짝을 찾고 또 아이도 낳으면서 후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원초적인 고통/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이다.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자.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원시인은 호랑이 앞을 지나다니다가 호랑이의 한 끼 식사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걱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풀, 아무 과일이나 보이는 대로 뜯어먹다가 독초를 먹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피로감은 또 어떤가? 피로하지 않다면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게 되었을 것이고 안 그래도 영양이 부족한 원시 사회에서 탈진 또는 과로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원시인에게 고통은 그야말로 필요악이다. 고통을 좋아할 사람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고통은 원시인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삶의 기본값은 고통이다


고통으로 인해 원시인은 생존 또는 번식을 위한 행동을 취하게 되고, 이 행동을 취하게 되면 고통의 경감과 함께 만족감이라는 큰 보상이 따라온다. 그런데 이 만족감은 금새 사라지게 된다. 맛있는 멧돼지를 먹더라도 그 포만감이 지속되지 않고 다시 배고파지고, 짝짓기를 하더라도 만족감이 금새 사라진다. 만약 만족감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된다면 어떻게 될까? 멧돼지 한 마리 잡아먹고 더 이상 사냥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굶어죽거나 영양 부족으로 인해 도태될 것이다. 짝짓기 한번 하고 더 이상 짝짓기를 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번식 확률이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만족감이 사라지고 다시 고통이 찾아옴에 따라 원시인은 다시금 생존과 번식을 위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원시인의 입장에서 고통과 부정적 감정들은 기본값이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일이다. 그 덕분에 원시인이 살아남고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고통이 기본값이 아니고 행복이 기본값이라면, 행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원시인은 가혹한 원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도, 후손을 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기본값도 고통과 부정적 감정이다


그런데 원시인은 원시인이고 현생인류는 현생인류 아닌가? 원시인이 그랬을 지 몰라도, 기술과 진보의 시대에 살고있는 현대인은 다르지 않을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생 인류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본능이 인류 역사상 가장 뿌리깊게 박혀있는 세대일 수 있다.


우리가 태어나서 이 세상에 존재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원시 사회까지 갈 것도 없다. 문명 사회에 들어서도 기대수명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열악한 위생, 부족한 영양 섭취, 의학과 병리학의 미발달 등등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기대수명은 30-40세 정도에 머물렀다. 영아사망률은 어떤가? 지금이야 아이들이 태어나서 잘 자라지만,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이전까지 20% 이상의 아이들은 1년 안에 죽었고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죽는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전쟁이나 역병으로 인해 국가 인구의 상당수가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우리에게까지 그 유전자를 넘기는데 성공했다. 아버지쪽에서, 또 어머니쪽에서, 그것도 아주 대대손손으로 말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후대에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넘기는 확률이 80%였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도 매우 너그러운 가정이다.) 이것을 예를 들어 100대에 걸쳐 단 한번의 끊김도 없이 연속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얼마일까? 대략 0.00000002%이다. 물론 예시적으로 매우 단순화시켜 생각하고 계산해본 것이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 이런 엄청난 확률을 뚫고 생존과 번식을 한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이다. 


즉, 현생 인류에는 생존과 번식의 DNA가 아주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원시인과 동일한 생존과 번식의 기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러므로 고통과 행복의 작용 기제도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기본값은 고통과 부정적 감정이다. 행복은 금새 사라지고, 고통으로 회귀한다.



현대사회에서의 고통의 특징: 고통의 증폭


원시인과 현대인, 최소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비교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당연히 현대인의 삶이 더 풍족하고 안전하며 원시인이 느끼는 원초적 고통들은 우리의 삶에서 상당수가 사라졌다. 원시인과는 다르게 굶어죽을 걱정을 하거나, 호랑이한테 잡아먹히거나 하는 걱정을 우리는 더 이상 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는 원시인들은 상상조차 못할 고통과 부정적 감정의 원인들이 존재하며 (원시인이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 구인구직, 결혼 등등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현생 인류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고통을 느끼는 성향이라는 것이 현생 인류의 DNA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양한 고통의 원인들은 차치하고, 현대 사회에서의 고통의 중요한 특성이 하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통의 주체가 스스로의 고통을 증폭시킨다. 이는 어떤 고통을 느끼게 되면, 이것이 단순히 그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느끼는 주체가 스스로 그 고통감을 크게 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외로움은 당연히 고통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의 우리는 종종 외롭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지고는 한다. 내가 얼마나 못났기에 나는 짝을 못 찾는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친구들은 다 결혼을 하는데 나는 연애도 못하고 있나...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다들 알 것이다. 이것이 고통의 증폭이다. 

고통을 증폭시키는 데에는 여러가지 기제가 있는데,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아래 세 가지 요인들은 드물지 않게 상호작용하며,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는 주체를 더더욱 고통에 빠지게 한다.


1.타인과의 비교:

타인과의 비교는 불행으로 가는 급행열차 티켓이다. 타인과의 건강한 비교는 개인의 발전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되지만, 건강하지 못한 비교는 행복할 때 행복감을 깎아먹을 뿐 아니라, 불행할 때 불행감을 크게 늘린다. 내가 불행하고 고통스러울때, 행복해보이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이다. 

또한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고통을 느끼는 나 자신이 나약하고 못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답시고 '이정도를 가지고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냐', 'xx는 이것보다 더 한 상황에서도 버티는데 너는 왜 그러냐' 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고통이 증폭되는 방식이다.


2. 자기연민:

고통으로 인해 자기연민에 빠지기 일쑤다. 고통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불행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 같은데, 날씨가 너무 좋은데 약속 없이 혼자 집에 있는 날이나 몸이 아픈 날에 '아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나는 이렇게 불행하구나. 슬프다' 와 같이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연민이다. 날씨가 좋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자기연민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는 그러나 차라리 가벼운 형태의 자기 연민이고, 불행이나 고통의 크기가 클 때, 혹은 인생의 시련이 닥쳐올 때 자기연민이라는 감정은 그 주체를 송두리채 무너뜨려 버릴 수도 있다. 


3. 자존감 저하:
기본적으로 고통이나 불행은 자존감을 깎아먹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1, 2, 혹은 다른 요인들로 인해 자존감이 크게 깎일 수 있다. 자존감이 깎이면 기본적으로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기에 행복감이 크게 떨어지며,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행복의 빈도가 자존감이 높을 때보다 줄어든다. 


이처럼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드물지 않게 우리의 생각들로 인해 더 불행해지고는 한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고통이 삶의 기본값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통을 피할 수 있는가? 고통을 부정할 수 있는가? 삶의 기본값이 고통이라면 안타깝게도 죽을때까지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를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물론 우리가 마조히스트, 가학적 변태가 아닌 이상 고통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통이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라면, 우리는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고통은 피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과 맞서 싸우기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으나, 0.00000002%의 확률을 뚫고 우리에게 전해진, 우리의 본질과 때놓을 수 없는 고통의 기질과 맞서 싸우기에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단순하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내가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뺨을 맞았다고 해보자. 예수님께서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쪽 뺨을 내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고, 우리는 성자가 되거나 해탈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우리가 화나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러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감정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화나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지 않다면? 그건 이상한 것이다.

나는 왜 힘들까? 인간이기 때문에 힘들다.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스럽기에 인간이다. 고통스럽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고 한심할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부족하고 한심한 것이 당연하다.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나약한 것이며, 나약하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숨 쉬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인 이상 숨 쉬는 것은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잠 자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인간인 이상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인 이상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고, 고통은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더 이상 고통이 증폭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고통을 늘리는 행위를 멈출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충분히 가능하다. 

정녕 인정하기 힘들다면, 이 세상의 모두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또 훨씬 편해진다. 저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사람도 다 힘들다. 전혀 힘들어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힘들다. 어떻게 아냐고?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힘든 것이 당연하고, 힘들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당신과 같이 힘들어하는, 각자의 고통과 불행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십억의 영혼들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양한 고통과 불행들을 겪게 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삶이 그렇고,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고통을 삶의 일부분으로, 인간 본성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훨씬 편해진다. 남들과의 비교로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고,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도 없고, 자존감에 스크래치가 날 필요도 없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고통이 기본값이라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이면 전반적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기에,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인생의 기본값이 고통이고, 행복은 일시적일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게 아래와 같은 3가지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 고통을 스스로 증폭시키지 않기

2. 행복감을 느끼는 빈도를 늘리기

3. 느껴지는 행복감을 높이기

 

고통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고통의 증폭은 많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행복감을 느끼는 빈도를 늘리고, 느껴지는 행복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속 글들에서 더 자세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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