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는 무릎이 8할이라

산티아고 순례길 D-42

by DK

젊고 튼튼한 다리로 출발해도 무릎이 나갈테지.

800킬로미터를 내리 걸으면 너덜너덜해질 거야.

그걸 감수하고 가는 게 산티아고…

라 생각하긴 했지만 두려워져서, 젊지 않아서,

'멀쩡했던 사람이 산티아고에 다녀와서 다리가 고장났대'라는 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명을 씌우고 싶지 않아서...

양쪽 무릎에 연골주사를 맞고 왔다. 아내와 함께.


그렇더라도

"그 길을 걷기 위해 연골주사를 맞고 왔어요"

라는 사례는, 사지 멀쩡한 젊은이는 물론이고, 중년과 노년의 산티아고 경험담 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좀 변명을 늘어 놓아야겠다. 이런 무릎보호대가 좋아요, 스틱은 꼭 두 개 다 쓰세요, 신발은 꼭 가벼운 트레킹 전문화로 신으세요.. 라는 조언, 준비사항들과는 다르게 유난스러워 보이긴 하니까.


난 연골주사를 맞을 권리가 있다

나는 무릎이 꽤 안 좋다. 조문을 하며 고인에게 절할 때 제일 곤란했던 건 셔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뱃살이나 낡아서 스타킹 흉내를 내게 된 양말 바닥이 아니라, 무릎을 굽혔다 펼 때 나는 '우드득' 소리였다. 대중교통을 탈 때도 일어설 때 어지간히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소리가 나는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소위 '불편감'은 상당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무릎이 젊었던 때 얘기. 무릎 앞쪽이 계속 아파져서 계단을 두려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이미 사십대 초반에 ‘이젠 평생 뛸 수 없게 된 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다. ‘뛰는 경우’는 횡단보도 보행신호가 깜빡거릴 때 뿐이었는데, 그 몇 미터도 뛰는 게 힘에 부쳐서 언제부턴가는 녹색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괜히 핸드폰으로 쓸 데 없는 걸 검색하거나 주변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다음 신호를 기다리곤 했다. 하루 만큼의 일상을 버티기에도 버거웠던, 변기에 앉아 있던 내 몸의 무게를 들어 올리기에도 힘들어했던 무릎의 소유자. 게다가 나이도 오십 중반. 그러니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 종주란, 무릎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감행하려는 자, 감당할 준비를 해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래서 연골주사를 맞았다.


1년 6개월 전의 경험도 한 몫했다

고지혈증과 초기 고혈압 때문에 시작한 만보걷기. 걷다보니 익숙해졌고, 하루 평균 걸음이 만 오천 보쯤이 되었을 때, 주변의 '러너'들이 보였다. 부러웠다. 나도 50미터만 뛰어볼까? 그렇게 시작한 러닝. 처음엔 진짜 절뚝거리면서 고통을 참으면서, 재활훈련하듯이 힘들게 뛰었다. 하지만 체중이 준 덕인지 근육이 붙은 덕인지 점차 뛰는 거리가 늘었고, 무릎의 통증도 참을 만했다. 하루 3킬로미터 정도까지 거리도 늘었다. 가끔씩 주말 산행을 하기도 했다. 교만해지기 딱 좋을 분위기. 교만해졌고, 재작년 늦가을에 인왕산과 북악산을 연결해서 힘들게 등산을 해 놓고도 저녁엔 평소 뛰던 거리를 또 뛰는 만용을 부렸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그 후 한 달 이상 운동은 커녕 절뚝거리면서 천천히 걷는 처지가 되었다. 다리가 덜렁거렸고, 잠을 자다가도 무릎이 아파 소리를 지르며 깼다. 그 때, 정말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맞아 본 것이 연골주사. 근육 스스로 회복하려고 시간을 들여 노력한 공로가 없었으랴만, 연골주사에 대한 호감이 생긴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주사를 맞은 지 석달인가 지나서는 '무릎이 안 아픈 것이란 이런 느낌이로구나!' 싶을 만큼 배경처럼 깔려 있던 관절의 '불편감'까지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연골주사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정적 핑계

연골에 물약 좀 채우고 가기로 계획은 진작 세워 두었지만, 다른 모든 산티아고 준비사항들처럼, 정형외과에 들르는 계획은 좀체 잡지 않고 있었다. 출발일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산티아고를 가야 하니 연골주사를 좀 놔주세요' 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는 게 여전히 남우세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연골주사는 운명이었는지, 갑자기 아내의 무릎에 문제가 생겼다. 평생 무릎 아파본 적이 없다던 아내가 통증 때문에 아파했다. 가볍게 넘길 수 없을 만큼, 아침에 일어날 때 오래 주물러야 겨우 설 수 있을 만큼.

일주일 전에 예행연습겸 서울 시내를 20킬로미터 넘게 걸었던 날이 있다. 산티아고에서는 하루 평균 25킬로미터 내외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비슷한 부하를 몸에 줘보고 싶었던 것이다. 겨우내 운동량이 줄어 있었는데 갑자기 움직여서 그랬는지, 20킬로 트레킹이라는 게 실은 5~6킬로미터를 뛴다든지, 하루 만 보 이상을 걷는다든지 하는 것들과는 다른 가중치의 부담을 주는 것이서 그랬는지, 탈이 난 것이다. 아무튼 비상사태. 같이 병원을 향했다.


정형외과 진료라기보다는 산티아고 의료팀

음... 나이 들어 정형외과 의사를 만날 때 우리가 하는 것들을 했다.

-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을 먹을 나이는 이미 아니니, 방사선을 거부감 없이 쐬며 여기저기 엑스레이를 찍는다.

- 내 나이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한 뼈사진을 얻는다.

- 고통에 딱히 원인이 없거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다.

- 하지만 나이가 나이이신 만큼 아프고 고장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얘기도 듣는다.

- 먼저 약을 먹어 보시고, 호전되는지 보시고, 호전이 안 되면 MRI를 찍어 보자고 한다.

- 무릎 MRI 비용이 40만원 정도 한다는 것을 들으며 '늙으면 죽어야지'를 예습해 본다.

- 대부분의 치료란 게,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염증과 통증치료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목적은 하나였고,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물으나마나 한 것들을 묻고 연골주사를 맞는 것으로 결론을 몰아 갔다. 예를 들어,

= 저런 모양의 관절상태에서, 800킬로미터쯤 걸어도 안 죽는가?

= MRI를 찍어서 문제가 있더라도, 산티아고는 다녀와도 괜찮지 않겠는가?

= 연골주사를 맞고 산티아고를 다녀와서 MRI를 찍어도 되겠는가?

= 연골주사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움이 되어 주겠는가?


약속된 플레이를 한 후,

뭐, 아무래도, 관절에 쿠션 하나 대는 게 낫긴 하죠.

라는 의사의 말을 기특해 하며,

쿠션을 사듯,

산티아고 준비 물품에 액체쿠션이라도 있는 듯,

연골주사를 맞고 왔다.

그렇게 D-42일의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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