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일기장
초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와 함께 갔던 목욕탕에서, 친구는 늘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때밀이'의 서비스를 받더군요. '부자구나' 싶었고, '어떻게 내 벌거벗은 몸을 남에게 맡기지?' 의아했습니다. 그렇게 익숙해진 일은 아니었는지 친구는 간지럼을 타며 연신 몸을 배배 꼬았고, 조그만 초등학생의 생식기는 슬쩍 발기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장면은, 평생 결코 나의 일이 될 수 없는 듯한 이미지였습니다. 나는 결코 벌거벗은 내 몸을 남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고, 돈을 주고 때미는 일을 외주화하지도 않을 것이며, 절대 남들 앞에서 성난 고추를 보이지 않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 짜리의 생각이었고, 여탕은 분명코 아니었습니다.
"등 밀어 드릴까요?"
라고 말했던 것은, 다짜고짜 "등 좀 밀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것을 좀 무례하고 직설적인 부탁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망설임 끝에, 매우 어렵고 부끄러워하며 꺼낸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때를 밀고 있던 낯선 그 어른은 '때밀이가 이제는 방문영업이나 부분판매에 나선 건가?' 하는 뜨악한 표정이었습니다. 거절하시더군요. 주고받는 것이 꼭 말 그대로의 순서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 즉 받고주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무례하게, "등 좀 밀어 주실래요?"라고 말할 걸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나는 등짝 하나를 미개척지로 남겨 두고 왠지 쓸쓸한 인생을 느끼며 목욕탕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낯선 사람들끼리 서로 등을 밀어주는 우리나라의 미풍양속 속에서 매번 개운한 마음과 동료애의 따뜻함, (등을 포함해) 깨끗한 몸으로 목욕탕을 나설 수 있었을 텐데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단 한 차례의 경험을 창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쉬운 길을 택하면서, 아마도 내 마음 속에는 이런 목소리가 있었겠죠.
이제 세상 누구도 나의 등을 밀어주지 않아!
트라우마가 생긴 저는 그 후로 목욕탕을 멀리 했습니다. 우리집의 좁은 화장실에서 때를 불리고, 엄마의 손을 빌리거나, 별 희한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발명가들이 창조한 기다란 이태리타월로 어설프게 셀프 등때밀이를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거나, 관계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동시에 노모에게 등을 맡기기에는 너무 나이들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사우나를 다시 가게 됐습니다. 그 사이, 더 이상 서로의 등을 밀어주지 않는 세상이 되었죠. 초등학교 때의 다짐을 철회하고, 시대에 밀려 세신사의 서비스를 받게 되었는데… 신세계였습니다. 그리 세게 미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 몸의 가장 바깥쪽 한 꺼풀을 벗겨내 국수처럼 떨구어 내는 세신사의 손 아래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시원함과 쾌적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나도 세신비용 정도는 쓰면서 살아도 돼! 하는 여유로운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라고, 이제는 클리셰가 된 표현을 빌자면 ‘세신을 받아보지 않은 놈은 있어도, 한 번만 받아 본 놈은 없다’ 상태가 됐습니다. 차라리 웨스턴 스타일로 샤워만 하고 살았으면 살았지, 오랜만이라도 목욕탕에 가면 꼭 세신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나의 때는 나의 것이 아니었던 거죠. 아무튼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초기 얼마간은 베드 위에서의 시간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세신사가 어떻게 자세를 잡으라고 지시하는지, 다음의 지시가 무엇일지 신경을 썼고, 때가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대로 지불한 것보다 더 큰 몫을 받는 것처럼 미안하고,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오는대로 노동을 시켰으나 노동의 즐거움은 못 주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황송 유니버스의 느낌들’만 있었던 시기가 지나자, 10분 남짓의 세신사 베드 위에서의 생각들은 다양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세신의 전 과정을 통해서 내가 느끼는 것들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매번 개운한 마음으로 목욕탕을 나설 때가 되면, 그 상쾌함에 그 느낌들을 다 잊고, 특히나 ‘적어 보자’는 다짐을 까맣게 잊고 말았지만요.
(문장 몇 개만 써 놓고 벌써 열흘은 지났네요. 다시, 지금 나는 세신사의 물기 가득한 베드 위에 누워있다,고 상상하며 세신의 느낌들에 대해서 써보고자 합니다.)
다섯 개쯤 있습니다. 세신의 차례는 세신구역의 벽에 걸려 있는 다섯 개쯤의 고리에 누가 먼저 락카키를 거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앞사람의 세신이 끝나면 세신사는 목욕탕 전용 물그릇으로 물을 한두 바가지를 베드에 붓고 닦아내서 다음 손님을 맞을 채비를 합니다. 대기자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세신사가 번호를 부르면 가서 누우면 됩니다. 소리가 왕왕 울리는 목욕탕의 사운드필드를 고려하면, 번호를 잘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근처에 있다가 알아서 쭈뼛거리는 편이 낫습니다. ‘번호를 불렀다’는 행위에는 추측이 반쯤 섞입니다. 세신사가 ‘친구를 불렀’을 수도 있고, 고승들처럼 ‘할’ 했을 수도 있는데, 목욕탕 안 모든 나신들의 유일한 인식표이자 결제수단인 ‘락카키의 번호’를 불렀을 확율이 높을 뿐이지요. 암튼 무엇을 부르건 순서가 뒤바뀔 우려는 거의 없고, 때를 불린 나체의 사람들은 새치기를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 순서를 찾게 됩니다.
처음의 자세는 눕는 것입니다. 뜨듯한 물이 고여 있는 비닐재질의 베드 위에 눕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이 들게 합니다. 말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왠지 훌러덩 미끄러버릴 것 같은 스릴이 있기도 하고, 뜨듯한 물이 주는 안온함도 동시에 느껴지며, 나체일 때 가장 피하는 자세인 ‘하늘 보고 눕기’ 자세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느낌이기도, 완전한 보호와 배려가 필요한 유아 같이 열세에 놓인, 혹은 부끄러운 느낌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신체 부위에서 어느 부위의 때를 먼저 벗기는 것이 경제적인지, 이를테면 노화되고 오염된 피부를 벗길 때, 마치 어떤 결이나 급소가 있어서 ‘그 곳‘부터 벗겨내기 시작하면 수월한지 뭐 그런 통찰이 숨어 있는 건인지, 아니면 일종의 기선제압처럼 이 자세부터 시작하면 고객은 훨씬 고분고분하고 다루기 쉽다,는 소비자행동론적인 노하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특정 사우나의 발랄한 세신사 하나가,
“나는 옆구리부터 때를 벗기겠어! 그게 나라는 세신사의 스타일이야!!”
라며 신세계를 열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