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시골 살이, 92세 치매 장모님과 함께

망각 속에 마지막 추석이 될지 모르는 그분을 위해


아내와 92세 치매 초기의 장모님을 모시고 추석 연휴 이틀을 나의 우거 양평의 농가에서 보냈다. 그분은 구순을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한가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셨다. 이제 누구의 도움없이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라 그분의 소망은 그저 꿈에 불과하다.

70년전 스무살 이전 한적한 시골이었던 경기도 안성의 친정 부농으로 살았던 추억에 머물러 계신 다. 치매 초기 증상으로 가끔 큰 딸조차 못알아 보시고, '키 큰 여자', '밥해 주는 사람'으로 혼란스러워하시지만, 종종 맑은 정신으로 돌아옴면 종종 "(남의 도움 안받고) 시골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를 '체험 삶의 현장'으로 모셨다.

아내와 나는 얼마전 양평에 있는 조그만 농가 주택을 마련했다. 그 전까지 아내 이름으로 구입한 530평 밭에 10평 농막을 짓고 12년 정도 농촌 생활을 즐겼다. 이제 낡고 불편해 이번 기회에 철거를 했다. 그리고 1천만원 보증금에 월세 45만원에 농가의 별채를 얻었다.

​이곳에서 밭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나는 현역 은퇴 전인 20년 전 아내 이름으로 530평의 전(田)을 구입했다. 이곳 밭과 농가 은신처는 내가 바쁜 서울의 삶을 잠시 떠나 쉴 수 있는 도피처다. 초등학교 교장 은퇴 후 단조로운 도시 아파트 생활에 우울증까지 왔던 바로 손위 누님이 5도 2촌의 주말 농사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그분은 억순이로 시골 전문 농사꾼보다 훨씬 농사를 잘 짓는다. 혼자 500여평의 농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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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널리스트 현직 시절 7-8년간 농사를 지었지만, 언론계 은퇴후 교육 비즈니스를 새롭게 시작 하면서 이제 주말 농사는 포기하고 가끔 내려와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산책을 하며 사색을 한다. 나를 따라 열심히 농사를 짓던 아내는 토양에서 살고 있는 비결핵성 항산균에 폐가 감염된 이후 서울의 화실에서 화가로 그림 그리기 작업에 몰두한다. 나는 아내를 위해 이곳에 화실을 하나 얻을까 했는데 마땅한 공간이 없어 작업실 공간을 서울 아파트 근처에 마련했다. 평소의 소원대로 45평 건물 한층 넓은 공간을 얻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다.

5일간의 추석 연휴를 맞아 나와 아내는 둘째 날에 장모님을 이곳 농가로 모셨다. 10여 년 전 장인께서 돌아가신 후, 서울의 갑갑한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시던 장모님께 잠시나마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첫날부터 장모님은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다. "화장실이 불편해.", "벌레가 너무 많아." 도시의 아파트 생활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그분께 시골 생활은 생각보다 큰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었다. 이틀 간이지만 저녁, 노을이 지는 강가를 휠체어로 산책할 때면 장모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참 좋다", "참 예쁘다" "어쩌면 나무들이 이렇게 예쁘니!"를 연발하시며,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 짧은 시골 체험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변화는 쉽지 않지만,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비록 장모님의 로망이었던 시골 살이는 예상과 달랐지만, 이 경험은 우리 가족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분에게 마지막 추석이 될지 모르는 시간들, 비록 작은 순간일지라도, 그 눈빛에서 반짝이는 기쁨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그런 작은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노을 지는 강가에서 휠체어를 밀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삶도 이 강물처럼 흘러가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2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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