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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pr 28. 2019

어벤저스-엔드게임(2019)

성긴 이야기와 설정, 하지만 역사적인 마무리



<어벤저스- 엔드게임>은 서사적으로, 연출적으로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감독인 루소 형제가 어떻게 편집을 해도 3시간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어 내심 밀도 높은 서사를 기대지만 그 말은 허풍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영화의 서사는 2시간, 아무리 양보해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합니다. 2시간 러닝타임이었다면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매우 밀도 높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인피니티 사가의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만큼 마블과 감독의 과욕이 서사를 조금 너저분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화의 내적 완성도만으로 평가하기에 <엔드게임>은 영화의 역사와 산업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거대한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WARNING! MAJOR SPOILER ALERT!





헐거운 서사

영화를 보는 도중 두 구간에서 시간을 확인했습니다(제가 그만큼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겠죠). 첫째, 시간 여행을 통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앤트맨의 주장이 제기되고 고민 끝에 토니 스타크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점. 느슨하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급물살을 타는 시점이죠. 둘째, 두 세력이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어는 시점, 영화에서 거의 전무하던 액션신이 대폭발 하는 시점입니다. 첫째 시점은 영화 시작 후 1시간 남짓 정도가 흐른 후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엔드게임>은 영화 시작 후 약 한 시간 동안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과 패배감을 그리는 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려져야 할 플롯이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긴 묘사는 분명 루소 형제의 과한 욕심이었습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 본격적으로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는 과정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그들 인생의 중요한 인물과 조우하는 플롯은 굳이 들어갔어야 했을까 싶습니다. 인피니티 사가의 마지막인 만큼 주요 캐릭터들이 그들에게 의미 있는 과거의 인물과 만나게하는 감독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만남이 이 영화의 극적 효과를 높여주었을까 질문하면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만남들이 명확하고 강력하게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inevitable' 플롯이 아니라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인물들을 <엔드게임>에서 다시 보여주기 위한 장치 혹은 지나온 시간을 한번 정리하는 장치 혹은 주요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소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캐릭터들이 흩어져 인피니티 스톤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만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눠져 플롯이 타이트하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십여 년에 걸친 인피니티 사가에서 귀하고 보기 힘든 스톤들이었는데 뚝딱뚝딱 중간 과정이 생략되며 너무 쉽게 확보되는 탓에 스톤들의 가치가 급락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아쉬운 건 헐크가 에인션트 원으로부터 타임 스톤을 받는 플롯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지난 <인피니티 워>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서 실낱같은 희망을 보고 타임 스톤을 순순히 타노스에게 넘김으로써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으로 넘어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는 '천사백만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복선을 깔고 사라집니다. 그 복선은 두 영화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죠. 하지만 헐크가 닥터 스트레인지를 언급하자 에인션트 원이 3초 생각하다 헐크에게 타임 스톤을 건네주는 순간, <인피니티 워>의 가장 중요한 복선은 의미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던진 복선이 본격적으로 메인 플롯의 수면으로 올라올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였던 만큼 더 극적인 이야기 진행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호크 아이와 블랙 위도우를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 전개가 모두 이런 식으로 쉽게 진행되어 버린 것이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음에도 긴장감이 떨어진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유머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몇몇 조크는 효과적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너무 가볍고 자주 등장하는 조크들이 톤과 긴장감을 해쳤다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는 지난 <인피니티 워>에 비하면 조크의 양이 상당히 많아지면서 톤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엔드게임>의 초반 분위기가 꽤 무거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유머 톤이 영화 전반에서 이어져온 분위기를 해치고 이야기 진행과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느슨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는 과거의 타노스가 네뷸라를 통해 우연히 어벤저스의 계획을 알아채는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밀도와 긴장이 배가됩니다. 그 플롯은 단순히 이야기 줄기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을 넘어 느슨해져 있던 극 전체에 서스펜스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기타

천사백만 가지 경우의 수 중 유일한 한 수 : 지나가던 쥐

저는 창고의 쥐에서 시작되는 설정이 잘못 꿰어진 첫 단추라고 생각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본 게 이거였던가? <엔드게임>에서는 수많은 플롯 구멍과 개연성 부족이 있지만 루소 감독의 가장 큰 잘못은 그 누구도 <인피니티 워>에서 던져진 가장 중요한 복선 '천사백만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언반구 없다는 것입니다. 왜 아무도 그 의미를 궁금해하지 않았을까요? <엔드게임>의 메인 플롯은 추억여행 대신 닥터 스트레인지가 던진 복선의 의미를 찾아가는 서사가 더 설득력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추억 여행을 선택하는 순간 마블은 영화의 내적 완성도보다는 '정서'와 '팬 서비스'를 선택한 것이겠죠. 그것이 아주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전편에서 던져진 복선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직도 의문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엔드게임>의 시작은 구석진 창고에서 지나가던 쥐. 닥터 스트레인지가 본 그 경우의 수는 '쥐'였던 걸까요.


얘들을 어찌하면 좋을꼬 : 헐크와 토르

헐크와 토르 두 캐릭터의 변화가 과연 정말 필요했을까 합니다. 헐크의 외모는 그래픽 티가 너무 나서 그가 등장할 때마다 이질성이 몰입을 계속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비만이 된 토르는 하... 모르겠습니다. 조크를 주로 담당하던 그 비만인 몸이 마지막 전투에서는 진지하게 변하는데, 영화 내내 가벼움을 유지해온 만큼 차라리 그 웃긴 캐릭터 성격이 끝까지 유지됐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둔해서 여러 공격이나 방어에 실패/실수하지만 막상 파워는 더 강해졌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예전처럼 날렵하고 멋있게 싸우는 모습이 캐릭터를 희석시켜 버린 것 같거든요. 아니면 차라리 마지막 전투 전에는 어떤 요술을 부려서라도 예전의 멋진 몸으로 등장했다면? 캡틴 아메리카가 묠니르를 휘두르는 것만큼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았을까요?


한국 직장인보다 바쁜 : 캡틴 마블

캡틴 마블은 등장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최강 파워의 히어로입니다. 타노스와 1대 1 싸움은 물론 타노스 군대 전체도 혼자 없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너무 바빠요... 한국 직장인처럼 바쁩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타노스 때문에 우주 전체 생명체의 절반이 사라지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주 반대편 어디선가에 타노스보다 더한 악당이 있었던 걸까요? 캡틴 마블은 '강함' 외에 다른 캐릭터가 없습니다. 캡틴 마블의 빈약한 캐릭터 구축은 페미니즘의 덫에 빠진 마블의 자책골입니다. '여자도 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캡틴 마블은 딱이지만 대신 캐릭터를 잃어버렸어요. 그녀는 '슈퍼맨'같은 존재입니다. 너무 강력해서 다른 히어로와의 파워 밸런스가 붕괴되는 거죠. 다른 어벤저스 히어로의 능력을 너무 뛰어넘는 나머지 그녀가 등장이 극 속 진지전능한 신과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기 때문에 마블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설정은 '바쁘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납득할 관객은 없습니다. 하나하나 생각을 하나보면 설정과 개연성의 구멍이 너무 많거든요. 그것이 캡틴 마블이 안고 있는 캐릭터의 한계입니다. 앞으로의 사가를 이끌어갈 중심 캐릭터 중 하나인 만큼 캡틴 마블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마블에겐 큰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대부분 정상적인(!) 팬이 캡틴 마블을 마뜩치않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즘을 상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된 캐릭터의 구축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존재감 제로 : 호크 아이

도쿄 시퀀스는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합시다.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로 치면 아픈 손가락인 '칸토 바이트' 시퀀스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인피니티 워>에 없었던 호크 아이를 <엔드게임>에서 단순히 얼굴만 비추는 정도가 아닌 이 정도 큰 비중으로 쓸 계획이었다면, <인피니티 워> 기간 동안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닥터 스트레인지가 말한 천사백만 가지 수 중 하나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와 어떻게 관련있는지 보여주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인피니티 워>에서 호크 아이의 부재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던진 복선도 모두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엔드게임>에서 호크 아이 비중이 너무 커져버리죠. 그건 분명 마블이 원한 그림이 아닐 것입니다. <엔드게임>에서 호크 아이는 중심인물 중 한 명이고, 블랙 위도우 대신 살아나기도 하는데 서사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무의미한 캐릭터로 전락합니다. 마블이 <엔드게임>에서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에 너무 치중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운의 캐릭터라고 생각하네요.





하지만 여전히 좋았던 건 1) 대대적인 캐릭터와 군대의 등장이 주는 카타르시스

이 영화가 선사하는 가장 짜릿한 카타르시스는 누가 뭐래도 되살아난 모든 히어로들이 전장에 등장하는 일련의 쇼트입니다. 막상 대규모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면 액션 쾌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블랙 팬서>와 <인피니티 워> 속 대규모 전투씬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규모와 각종 캐릭터의 등장이 주는 짜릿함은 <반지의 제왕 3>이 준 카타르시스 이후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 아메리카 엉덩이가 묠니르를 휘두르는 씬도 짜릿한 쾌감을 줬죠.



여전히 좋았던 건 2) 많은 캐릭터를 엮어내는 능력

캐릭터가 많아지면 영화는 산만해지기 마련입니다. 배우 출연 비중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는데, 특히 그들이 일류 배우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1분 1초라도 출연 비중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자존심 싸움은 상상을 초월하거든요. 그런 여러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출연 비중을 맞추다 보면 수정된 시나리오는 결국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전에 계약을 치밀하게 해서(마블이 그랬겠죠) 배우들 간 경쟁이 없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 캐릭터가 많아질수록 집중력이 분산되지 않을 수 없거든요. 결국 이것저것 뭐를 많이 하기는 했는데 산만하고 난잡하게 끝나버릴 확률이 높습니다. 많은 캐릭터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엮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저는 마블 최고의 능력이 바로 많은 캐릭터들을 엮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어벤저스 1>은 제게 두 가지 놀라움을 줬는데, 첫째, 너무 재미있어서, 둘째, 그렇게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산만함없이 이야기 집중도가 높아서 였습니다. 마블의 능력을 다시 보게 된 계기였습니다. 영화의 서사적 완성도는 <어벤저스 1>이 <엔드게임>보다 훨씬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엔드게임>은 역시 다수의 캐릭터를 엮어내는 마블의 능력이 돋보인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좋았던 건 3) 독립된 신을 만들어내는 데는 천부적인 능력

한 조각조각의 쇼트와 신을 재미있고 멋지게 만들어내는 마블의 능력은 정말 인정해줄 만합니다. <엔드게임>에는 재치있고 멋진 씬이 정말 많습니다, 비록 전체 서사는 놓쳤지만요. 시간여행을 하면서 여러 익숙한 장면, 어벤저스가 뉴욕에서 싸우는 모습, 퀼이 혼자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장면 등을 미래에서 온 캐릭터들이 BTS(Behind The Scene)로 뒤에서 엿보는 일련의 씬들은 정말 참신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가 엘리베이터에서 히드라 요원인 척하는 장면도 신선했고, 과거의 자신과 싸우며 "I can do this all day"하는 그에게 나도 안다고 하는 대사도 재밌었죠. 대규모 전투에서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씬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 캐릭터들이 뭉쳐서 싸우는 씬도 좋았죠.






역사적인 영화 프로젝트

만약 <엔드게임>이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저의 감상은 여기에서 멈췄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적 완성도만 이야기하기에 이 영화는 너무 큰 영화입니다. 영화 역사에서 하나의 매력적인 캐릭터 혹은 주제가 오랜 기간 동안 사랑받은 프랜차이즈는 여럿 있습니다. <007>, <미션 임파서블>, <스타 트랙>, <스타 워즈>, <쥐라기 공원>, <배트맨>, <슈퍼맨> 등이 대표적이죠. 모두 한 인물 혹은 주제를 시간 순서대로(시퀄) 혹은 지나온 시간 이전(프리퀄)을 뛰어넘으며 다룹니다. 시간이 앞으로 가든 뒤로 뛰어넘어가든 공통점은 시간의 흐름이 선형적인 1차원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영화 역사를 통틀어 1차원으로만 이어지던 전통적인 영화 프랜차이즈의 차원을 세계관이라는 면의 개념을 통해 2차원으로 확장시킨 주인공이 마블 스튜디오입니다.



마블 스튜디오는 사건을 시간의 전후로만 진행시키던 전통적 프랜차이즈에서 탈피해 동시대에 존재하는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그 존재의 동시성을 '세계관'이라는 개념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프랜차이즈에 좌우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앞뒤만 존재하던 선형적 세계에서 좌우도 존재하는 평면적 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의 개념은 기존 영화 프랜차이즈에 없던 새로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런 프랜차이즈의 차원 확장(!)이 하나의 커다란 도전인 이유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을 성공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업계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도박과 같은 세계입니다. 어떤 영화도 성공과 실패를 장담할 수 없죠. 여러 캐릭터의 영화들을 연달아 성공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입니다.



히어로들이 떼로 나오는 <어벤저스>는 여러 캐릭터 영화의 성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관객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시도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수는 있어도 실천하기는 너무도 힘든 과업이죠. <저스티스 리그>의 흥행 참패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직 관객은 '원더 우먼', '아쿠아 맨'을 보지도 못했는데 누가 그들의 모임에 흥미를 갖겠습니까. 미이라, 늑대인간, 프랑켄슈타인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합시켜 '다크 유니버스'를 만들려 했던 유니버셜 배급사의 실패도 또 다른 예입니다(아직 그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더 나아가 캐릭터를 선보이고 그 캐릭터를 성공시키고,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고 성공시키고, 또 다른 캐릭터를 선보여 성공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떼로 등장하는 <어벤저스>같은 영화를 성공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등장하는 캐릭터 수가 많아질수록 플롯이 조잡해지고 서사의 집중력이 산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2차원적 세계관으로 프랜차이즈를 짜는 일은 보통의 기획력과 연출력, 실행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그것이 제가 <엔드게임>을 역사적 프로젝트라 부른 이유입니다. 영화 역사에서 누구도 생각한 적 없고 성공시키지 못했던 프랜차이즈 확장을 십여 년간 성공적으로 이어 온 마블이 그 여정의 첫 번째 마침표(우선 현재는)를 찍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엔드게임>은 마블 팬 개개인뿐 아니라 영화 역사에도 큰 획을 그은 일대 사건입니다. 리뷰 초반 이 영화의 이야기가 너무 늘어지고 성기다고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늘어진 이유에 대해 저는 루소 형제와 마블 스튜디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엔드게임>은 마블에게 정말 애착이 가는 큰 의미를 지닌 영화이기 때문이죠. 애착이 가니 욕심은 늘어 가고 러닝타임은 길어져만 갑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마블 팬

여러 리뷰들을 읽어 봤습니다. 많은 리뷰어들이 이 영화에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아이언 맨 1>을 처음 본 후 마블 영화와 함께 청소년기를 거쳐 이제는 청년이 되어 <엔드게임>을 보게 됐다는 그들에게 <엔드게임>은 한 편의 히어로 영화 그 이상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토니 스타크의 죽음은 단순히 한 캐릭터의 죽음의 문제가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인이 된 캡틴 아메리카의 은퇴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죠. 토니 스타크의 죽음, 캡틴 아메리카의 은퇴와 함께 많은 젊은 관객은 소중했던 시절의 어느 한 부분과 조우하고 그것과 작별하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요?




오래된 노래가 특별한 이유

오래된 노래가 특별한 이유는 그 노래에 시간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은 곧 추억, 기억, 정서의 축적입니다. 어릴 적 많이 들었던 노래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들으면 처음 그 노래를 즐겨 듣던 그 시간, 그 장소이 내면에 소환되고 기억의 정서에 젖어들게 됩니다. 이별의 아픔을 겪을 때 내 얘기 같다고 듣고 또 듣고 또 듣던 그 노래들.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들으면 가슴 한편에 찡한 무언가 지나가는 것처럼, 영화에도 똑같이 시간과 함께 정서가 녹아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영화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많은 이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엔드게임>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팝콘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엔드게임>을 이야기하면서 지나온 시간과 기억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스타워즈>에 갖는 특별한 애착을 지금의 어린/젊은 관객이 마블 영화에서 느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마블 영화를 한 편도 안 본 관객이 처음으로 <엔드게임>을 보면 너무 지루하다, 뭐 이렇게 캐릭터는 무더기로 나오는데 몇몇 캐릭터만 비중 있고 나머진 적냐, 뭐 이리 진지하냐, 저 너구리 같은 건 뜬금없이 뭐냐, 아이언 맨이 죽는 걸 왜 저렇게 오래 보여주냐 등등 재미없다 허술하다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하겠죠 마블 영화와 함께 켜켜이 쌓인 정서의 축적이 없는 관객에게 <엔드 게임>은 3시간 동안 말만 많고 액션 씬은 마지막 30분에나 나오는 지루한 영화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타워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타워즈>의 정서가 축적되지 않은 지금의 어린/젊은 관객은 1983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이후 32년 만에 재회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에서 레이아와 한 솔로의 재회가 주는 감동의 쓰나미를 느낄 수 없습니다. 앳되던 그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 한 스크린에 서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스타워즈 팬들에게는 1초 1초가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거대한 별을 부수러 가는데 고작 전투기 몇 대만 가는 것부터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원래 스타워즈는 그런 것이다"라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엔드게임>처럼 <스타워즈>도 머리의 영역이 아닌 정서의 영역이 크니까요. <스타워즈>는 마블 영화보다 약 30년이나 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부침 끝에 올해 <에피소드 9>을 앞두고 있죠. 팬의 입장을 떠나 한 걸음 물러서 스타워즈를 보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스타워즈의 시작이자 세계관입니다. <엔드게임>이 작정하고 개연성과 설정의 구멍을 파보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것처럼 말이죠. 정서가 축적되지 않은 이에게 두 프랜차이즈는 팬들이 과도하게 반응하는 허접한 SF영화일 뿐입니다.





"You can rest now"

<엔드게임>은 출연 시간으로 따지면 캡틴 아메리카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영화의 무게 중심은 아이언 맨에게 실려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다양한 신을 통해 지금껏 마블 영화를 스쳐 지나간 대부분의 캐릭터들을 최대한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마블이 지나온 역사와 시간을 되돌아보고 함께 해준 캐릭터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아이언 맨에게 보내는 마블의 애정과 존경의 크기는 특별합니다. 마블의 여정과 모험의 시작은 <아이언 맨 1>이었고 십여 년에 걸친 긴 여정의 중요한 곳에는 언제나 아이언 맨이 있었습니다. 아이언 맨, 토니 스타크,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마블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블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숨을 거두는 토니 스타크에게 페퍼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어 You can rest now"는 성공한 프랜차이즈가 캐릭터를 떠나보내면서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애정의 헌사입니다. 앞으로 마블 세계관이 어떻게 펼쳐지고 어떤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할지 모르겠지만 토니 스타크를 뛰어넘는 매력 있는 캐릭터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은 한국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룹입니다. '대통령'이라 불린 그들이 한국 사회와 문화 전체에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긍정적인 영향 뿐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도 함께 안겨줬습니다. 이전까지 다양한 장르와 팬층을 갖고 있던 한국 가요계가 점점 십대와 아이돌에 쏠리게 된 신호탄이었기 때문이죠. 마블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불가능해 보이는 업적을 달성했지만 동시에 영화 시장을 교란시킨 장본인입니다. <아이언 맨 1> 이후 영화 시장이 히어로물에 급격히 쏠리게 되면서 소재의 다양성이 파괴됐습니다. 디즈니는 어느 배급사보다 적은 편수의 영화를 개봉하면서 훨씬 더 높은 이익을 챙기는 배급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제작사와 배급사를 인수 합병하며 승승장구한 디즈니는 이제 누구도 견제하지 못하는 초거대 기업이 되었습니다. 디즈니의 성공 이후 한 영화에 쏟아붓는 자본의 양이 증가했고 그만큼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상업화와 자본의 논리가 심화됐습니다. 이전에도 거대한 블럭버스터는 미디어의 많은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히어로물은 그야말로 거대한 블랙홀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목과 관심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앞에서 좋은 영화, 작은 영화는 소리소문없이 소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대한 축제를 망치고 싶진 않지만 <엔드게임>, 더 나아가 마블 프랜차이즈의 성공 이면에 큰 문제가 있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악영향을 차치하고 하나의 작품으로서 <어벤저스 - 엔드게임>은 마블의 오랜 팬들의 마음과 영화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거대한 영화란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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