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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11. 2019

암수살인(2018)

<우상>의 대척점에 선 용감하고 따뜻한 시선


뒤늦게 <암수살인>을 봤습니다. 저의 예전 리뷰들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한국의 범죄수사&폭력물은 가급적 멀리하는 저입니다. 과거 2000년대 초~중반, 한국 영화는 전 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한국의 영화감독하면 떠오르는 네 이름. 김기덕,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를 앞세우고 말이죠. 그 중 김기덕 감독은 오롯이 독립예술영화에 기울어져 다른 세 명 감독과 궤가 살짝 다르니 제쳐두고 세 명의 감독(박찬욱, 봉준호, 김지운)은 당시 삼대장이라 불리며(주로 국내에서)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자랑스런 대표 감독입니다. 이 대목에서 최근 아카데미시상식을 파괴(!)해버린 멕시코의 '세 명의 친구들(The Three Amigos. 알폰소 쿠아론, 기에르모 델 토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 명의 멕시코 감독들이 지난 5~6년간 연속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쓸어가며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거든요. 반면 한국 영화 삼대장은 흐읍 ㅠㅠ. 여하튼 아이러니한 점은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세 감독의 작품이 모두 폭력을 다뤘다는 점입니다. 한국영화가 전 세계에 보인 그 독특한 시선과 과감한 폭력 묘사는 독창적인 '미학'으로 받아들여지며 전 세계 영화 관계자들과 마니아들 사이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





끝없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폭력의 소용돌이

그것은 전 세계에 존재감을 알리며 한국 영화 부흥의 신호탄이 된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 한국영화가 '살인과 폭력'이라는 소재에 천착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세계가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준 찬사는 현재 한국 영화계가 집착하고 있는 소재인 '살인과 폭력'에 면죄부로 작용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면죄부를 손에 쥔 한국 영화계는 폭력, 살인, 조폭, 경찰에 집착했고 판에 박힌 캐릭터와 소재, 구성의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로 한국 영화가 선택한 방법은 폭력. 손에 쥔 면죄부를 더 힘껏 움켜쥐고 더 과감하게, 더 잔인하게, 더 새로운 방식으로 폭력의 잔인함을 전시해왔습니다.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단단한 연출력은 결핍된 채 냉소와 폭력만 껍데기처럼 남겨진 한국 영화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더 감정과 폭력에 천착하는 한국 영화에 저는 진절머리가 났고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물론 그 와중에 좋은 한국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요). 한국 영화에 느낀 환멸의 정점에 최근작 <우상>이 있었고, 그 영화와 한국 영화계를 바라보는 저의 착잡한 소회는 <우상> 리뷰(https://brunch.co.kr/@josetmojito/98)에서 이미 충분히 밝힌 바 있습니다.





옛다, 희망.

 <암수살인>은 지금까지 숱하게 이어져온 한국의 범죄물 형식은 유지하지만 감정과 폭력 전시에만 천착하는 근본적 문제점을 극복한 영화로서 상찬 받아 마땅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좌절과 환멸에 너덜너덜해진 저에게 '옛다'하고 희망을 던진 잔인한(!) 영화입니다. <암수살인>의 어떤 점이 그렇게 칭찬받을 만할까요.



절제된 감정과 폭력 묘사

한국 영화의 근본적인 문제점 중 하나. 한국 영화라는 자동차는 '감정의 아우토반' 위를 폭주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동차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절제라는 브레이크. 울부짖고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졸도 직전에 이르는(심지어 자주 졸도함) 날 것의 감정은 관객을 고문합니다. '신파'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의 과도한 감정도 이런 '감정 포르노'에 기인합니다. 폭력도 마찬가지. 웬만한 할리우드 고어물 저리 가는 잔인한 묘사가 막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영화 관계자들은 이런 한국 영화의 감정 포르노에 대해 "절제하면 관객이 모른다"고 항변합니다. 백프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과잉 감정에 이미 너무나 익숙해진 한국 관객에게 '자극의 역치'는 상당히 올라 있음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절제보다는 분출하는 감정 연기를 좋은 연기라고 보는 경향도 어느 정도는 있는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한국 국민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사람, 감정 자극의 역치가 높기는 하지만 영화 보는 눈 꽤 높습니다. 영화 관계자들의 항변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핑계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연출력을 과잉 감정의 전시로 감추려 쓰는 비겁한 핑계.


그런 면에서 <암수살인>이 선택한 '절제의 미덕'은 참 용감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 이렇게 약하게 가서 관객한테 먹히겠어?" 소리 꽤나 듣지 않았을까 합니다.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의 특성상 기존 한국 영화의 문법을 따랐다면 얼마든지 잔인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지만 이 영화는 과감히 그 문법을 거부하고 직접적 폭력 묘사를 피합니다. 또한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대신 사건을 둘러싼 주변인물을 담담하게 그립니다. 하지만 이 절제와 담담함은 건조함이나 냉소와는 결이 다릅니다. 절제된 감정 속에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절제된 시선으로 그린 한국 영화가 있었나 싶습니다. 혹시 기억나시는 분은 알려주세요.





탄탄한 연출과 편집, 촬영

많은 리뷰와 언론이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을 '실화의 힘'이라고 하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평입니다. <자전거 왕 엄복동>은 실화의 힘이 약해서 그렇게 망했던가요? 영화가 제대로된 연출과 이야기를 갖췄을 때 실화는 관객이 이야기에 더 공명할 수 매개체로서 충분조건의 역할을 할 뿐 영화의 성공과 실패 유무를 결정짓는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암수살인>의 성공은 백프로 연출의 힘입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도 살짝 늘어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적인 사건 없이 흘러가는 영화임에도 <암수살인>이 높은 긴장과 몰입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감독의 대단한 연출력 때문입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바로 편집인데 어디 하나 튀는 쇼트 연결이 없고 배우의 연기와 행동이 물 흐르듯 이어집니다. 느리고 빠른 쇼트가 적절히 배치된 것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심심찮게 점프 컷이나 연기 흐름이 끊기는 등 컨티뉴이티가 틀어지는 편집이 종종 보이는데 <암수살인>은 영화 내내 어색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또 하나 장점은 촬영입니다. 요즘 촬영에서 욕심을 과하게 부리는 한국 영화들이 부쩍 자주 보입니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무의미한 이미지나 몽타주가 자주 혹은 길게 등장하면서 (감독 혹은 촬영감독의)예술적 자아를 한껏 뽐내곤 하는데 의미없는 아름다움은 긴장을 늦추고 몰입을 방해하기만 할 뿐입니다. <암수살인>도 컬러나 앵글 등을 보면 여느 한국 영화처럼 촬영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렇다고 과한 자아 때문에 극을 망치지 않습니다. 촬영에서도 절제를 아는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

생각해봅시다. 한국 영화에서 경찰, 피해자, 주변인은 비난 혹은 동정, 두 극단 중 하나에 치우쳐 거칠고 과도한 시선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특히 국가 권력을 향한 한국 영화계의 시선은 과도하게 차갑고 비판적입니다. <암수살인>도 얼마든지 그런 클리셰를 반복할 수 있었지만 김태균 감독은 끝까지 그 유혹을 뿌리칩니다. 썩어빠진 경찰의 모습 대신 사비를 털고 파출소로 좌천되면서도 집요하게 범죄자를 물고 늘어져 결국 연쇄살인범의 무기 징역을 받아내는 경찰, 바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국가 권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많은 한국 사람이 부러워하는 미국 문화 중 하나는 영웅을 만드는 문화입니다. 경찰, 소방관,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일에도 미국의 미디어와 사회는 영웅을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사회도 미국만큼 크고 작은 영웅이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부패한 권력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사회가 잘 돌아가는 것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들, 묵묵히 맡은 일에 열심인 많은 이들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우리도 할리우드처럼 얼마든지 놀랄 만한 사건, 멋진 인물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의인들이 있고, 선함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는 작업은 부정적인 면을 들추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세계, 주관적인 너무도 주관적인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세계는 어떠한 객관적이고 통일된 외형도 지니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계의 외형이란 다름아닌 각자가 가진 주관적 인식의 표상인 것이죠. 같은 대통령의 발언에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기뻐합니다. 같은 실패를 누구는 경험으로 누구는 좌절로 받아들입니다. 네, 객관적 세계는 없습니다. 개인의 인식과 표상이 존재할 뿐이죠. 


언젠가부터 우리는 사회의 좋지 않은 면만 부각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좋지 않은 면들이 물론 산적하지만 저는 한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의 총합보다 긍정의 총합이 훨씬 더 큰 국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입니다. 부정은 전염성을 지닙니다. '그건 네가 할 수 없어', '그건 어차피 안 될거야'. 언제나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가능성까지 갉아먹는 그런 사람과는 한 공간에서 함께 숨 쉬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부정의 전염성.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그동안 지겹게 부정적인 면만 들춰왔으니 이제는 한국의 긍정적인 면도 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사회를 부정적으로만 그려왔던 정형화된 범죄 수사물에서 벗어나 긍정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암수살인>은 '순수한 부정의 결정체'인 영화 <우상>과 대척을 이루는 존재로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저의 감상입니다. <암수살인>은 그간 연쇄살인을 다룬 한국 영화의 틀에 박히고 부정적인 정형에서 벗어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절제된 폭력과 감정을 통해 잘 그려냈습니다. 용감한 기획과 시나리오를 탁월한 연출력으로 빚어내며 한국 영화의 한계를 극복한 김태균 감독은 박수받아 마땅하며 앞으로 많은 감독과 제작자가 이런 영화를 내놓는다면 다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찾아올 수도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런 기대감을 저에게 안겨줬기에 <암수살인>은 또한 잔인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도 단점이 없진 않습니다. 보슬보슬 잘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제가 느낀 부족한 점을 간단하게만 짚고 넘어가 봅시다.

 




캐릭터 부재

그야말로 'first and foremost' 가장 큰 단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캐릭터가 살아있는 인물은 주지훈(강태오 역) 뿐입니다. 김윤석(김형민 역)은 이 영화의 주연으로서 주지훈과 극을 추동시키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행동을 추동시키는 동기는 결핍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영화 중간 그의 아내가 뺑소니로 죽은 점이 그의 집착에 가까운 수사 활동의 원천이라는 식으로 주지훈 변호사의 입을 통해 살짝 드러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타인의 대사를 통한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김윤석 캐릭터 본인의 행동을 통해 동기가 보여야 하는데(show don't tell), 김윤석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범행 만을 쫓는 단편적 인물로 그려집니다. 영화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가만있어봐,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쟤를 잡고 싶어 하는 거지?"라고 묻게 되는데 그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내릴 수 없죠. "큰 힘에는 그에 어울리는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처럼 영화 속 인물의 강한 행동에는 강한 동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된 캐릭터 구축이라고 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그 인물이 하는 내리는 모든 선택과 행동은 설득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영화 초중반부터 김윤석을 돕는 후배 형사 진선규(조형사)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 또한 밋밋하고 평면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는 조연인데 그의 행동에도 동기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쟤는 왜 갑자기 돕는 거지?" 갑자기 김윤석을 돕는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게다가 다른 특별한 캐릭터성이 부여되지도 않습니다. 영화 속 진선규 캐릭터는 뜬금없이 중간에 나타나 아무 이유없이 나타나 착하게 김윤석을 돕는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행동의 동기도 캐릭터도 없으니 자연히 평면적이고 밋밋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김윤석의 주변에서 겉돌며 소비될 뿐이죠. 검사로 나온 문정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정희야 워낙 비중이 적은 단역에 가깝기 때문에 좀 더 이해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캐릭터를 살릴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소극적으로만 그려졌어요. 전반적으로 캐릭터 구축이 아쉬운 점이 이 영화의 뼈아픈 점입니다. 영화 중반에 김윤석과 진선규의 사적인 이야기가 조금만 있었다면 둘의 관계와 행동의 동기가 좀 더 뚜렷해질 수 있었을텐데, 전반적인 플롯 구성과 내러티브가 탄탄한 와중에 캐릭터가 허술하게 다뤄지니 참 아쉽습니다.





의미 없이 희화화되는 경찰

위에서는 경찰을 선한 존재로서 그린다고 칭찬했지만 그런 영화의 전반적인 시선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경찰이 증거를 조작하다 들통나고 말단 경찰을 희화화하는 부분인데요, 플롯 전개 상 증거 조작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선 경찰들을 그렇게 희화화하는 연출은 왜 넣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미결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사건 해결을 온전히 김윤석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고 경찰 시스템은 신뢰할 수 없다는 감독의 냉소를 나타내는 장치였던 걸까요? 김윤석의 상사가 수사를 그만 둘 것을 종용하고, 다른 관할 형사가 자기 엿먹이는 거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플롯이지만 말단 경찰을 희화화하는 것은 극의 분위기와 전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음향, 한국 영화의 '미결과제'

<암수살인>은 인물들이 부산 사투리를 쓰지만 대사 전달에 큰 무리가 없습니다. 다행히 관객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대부분 대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안 그래도 한국 영화들 대사 전달 안 좋은데, 사투리까지 쓰면 거의 뭐 혼자 설거지하면서 독백하는 수준으로 대사 전달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립니다. 웬만하면 사투리 사용은 좀 피했으면 좋겠어요한국영화.. 어쩌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지경까지 왔는지). 하지만 세부적인 대사와 폴리, 이펙트 등 전반적인 음향이 주는 공간감, 깊이감 등은 다른 한국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 정도면 사운드 믹싱 부분은 한국 영화 전반에 걸친 고질적인 병폐로 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조금만 더 예산 쓰면 충분히 더 나은 사운드를 뽑아낼 수 있을텐데, 엉성한 사운드 문제는 제작사나 배급사가 영화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그 얄팍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라 참 씁쓰름합니다.




최종 관객 집계를 보니 3,789,222명. 이런 좋은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한 점은 참 많이 아쉽네요. 부디 손익분기만이라도 넘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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