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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pr 17. 2019

우상(2019)

천편일률적인 한국 영화를 생각해보다



<우상>을 보다가 플레이를 멈췄습니다. 계속 보기가 거북하고 불쾌하고 불편했습니다.



조폭, 조선족, 정치인, 살인이 나오는 한국 영화는 그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미련 없이 플레이를 멈춘 진짜 이유는 <우상>에서 견지하는 한국을 향한 이수진 감독의 시선,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세계 속 인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 도저히 동의할 수도, 동참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 속 이수진 감독의 시선은 지독히 건조하고 차갑습니다. 인간을 향한 온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런 시선을 가진 감독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 그의 영화 속 세계는 황폐합니다. 하지만 <우상> 속 이수진 감독만큼 이렇게 철저하고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는 우리 삼촌, 아버지, 동생, 딸이라 느껴질 만한 '인간', 감정을 이입할 수 있고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인물이 소수라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수진 감독은 <우상>에서 아무리 짧게 지나가는 인물, 사소한 사건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극단적이고 철저하고 적극적으로 감정과 온기를 소거시키고 있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지는 순간, 저는 몸서리가 처졌습니다. 



이렇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인간성을 제거한 형식을 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이런 형식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매 년 100편 남짓,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영화를 보는 저이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우상>처럼 객체화된 냉동고로 세계를 묘사한 영화가 있었는지, 이렇게 모든 인물을 욕망과 목적 만을 가진 기계처럼 그린 영화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영화에 관한 졸필을 쓰지만 나름 원칙이 있습니다. 신랄하게 비판을 하되 그 비판의 대상은 작품으로 한정합니다. 비판이 비난이 되지 않도록 단속합니다. 아무리 작품이 형편없어도 절대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습니다. 영화나 감독 그 자체를 비난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이유는 영화 한 편이 제작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과 고생이 들어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소재와 주제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상>에 대해서는 그 원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수진 감독에게 묻고 싶습니다. 감독님이 <우상>으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국이라는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싶은 것인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쓰리 빌보드>,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 등은 모두 절망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들이 취하는 비판은 때론 통렬하고 때론 서늘하지만 그 대상이 세계이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아니기에 인간에 대한 작은 온기, 한 줄기 희망은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상>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도 지독한 냉소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매번 똑같은 소재와 주제, 과잉 혹은 결피의 극단적 정서,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전시되는 잔인한 폭력. 어쩌면 한국 영화에 대한 저의 불만, 오랫동안 곯아오던 고름이 이 영화가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한 순간 터져버린 것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차가운 정서와 폭력에 점점 예민해지는 저의 성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상>이 지닌 건조함과 차가움을 진정한 리얼리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네요.



<나쁜 페미니즘>의 작가 록산 게이는 그 저서에서 (거의)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의 원인을 매체에서 찾습니다. 아무리 그녀의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였어도 그녀의 분석이 모두 맞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겠지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매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정부와 여권을 중심으로 '경제는 아무 문제없다. 매체가 문제를 만드니 문제가 되는 거다'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죠. 정도의 차이일 뿐 매체가 우리의 생각과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봅시다. '희망', '따뜻함'을 다루는 한국 영화가 지난 수년간 과연 몇 편이나 있었는지. 이렇게 지독히도 정치적이고, 부정적인 영화만 제작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얼마나 될지. 이렇게 극단적으로 제한적인 소재(폭력, 살인, 조폭, 정치인, 조선족, 눈물)만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나라가 전 세계에서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만약 매체가 우리의 생각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영화들이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에 과연 영향을 미칠까요.



할리우드의 대책 없는 긍정과 낙관주의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유지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 그 태도만큼은 우리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사회, 사건, 현상은 가감 없이 신랄하게 비판하되 인간에 대한 애정만큼은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이 점점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 수많은 사건과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가끔 소름이 끼칩니다. 지금의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을까요.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거칠고 과감한 폭력이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조명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물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 복제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복제 과정에 있는 유일한 변화는 더 말초적이고 더 자극적인 폭력 묘사 밖에 없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조선족을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로만 그릴 겁니까. 우리 사회에 훌륭한 정치인은 없는 것입니까. 경찰과 검찰, 법원은 무능하고 타락하기만 한 집단입니까. 한국인은 오직 부패하고 타락한 강한 자와 비겁하고 힘없는 약한 자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정글인 것입니까. 부패한 정치인을 비판하고, 욕망에 들끓는 사회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 방식과 형식에 대해 한번즘 모든 한국 영화인이 생각해봐야 할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잔인한 조선족과 부패한 정치인 말고도 지금 우리 사회는 더 깊이 들여다보고 공론화되어야 할 이슈들이 많지 않습니까. 각 집단을 천편일률적인 시선으로 대상화하고 소비하는데에서 탈피해 조금 더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다양성을 상실하고 균형감을 상실한 영화만 끊임없이 복제된다면 그 편향된 집단으로서의 영화 매체가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한국 영화가 전형적인 소재 사용과 주제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회를 그렸으면 합니다. 과거처럼 재미있는 한국 영화, 좋은 한국 영화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단순히 슬픔과 감동이란 정서를 전시하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객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소중함과 그들이 맺는 관계의 온기를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PS.

<우상>의 사운드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큽니다. 몇몇 쇼트에서는 전 쇼트와 비교해서 볼륨 레벨이나 사운드 자체가 확 튑니다. 대사보다 폴리 사운드가 더 큰 쇼트도 종종 발견됩니다. 분명 배우 간 거리가 꽤 존재하는데 대사의 볼륨도 공간감도 차이 없는 쇼트도 여럿 있습니다. 이렇게 조악한 환경에서 몇몇 연기자는 먹어들어가는 대사 연기를 하는 바람에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눈에 보이는 촬영만 신경 쓰고 사운드는 경시하는 풍조는 한국 영화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산 규모를 막론하고 말입니다. 얼마 전 <사바하>에서 공간은 바뀌었는데 대사와 사운드의 공간감이 이전 씬과 똑같은 씬들이 많아서 꽤 놀라기도 했습니다. 폴리 사운드와 대사의 분리, 공간에 따른 소리의 차이, ADR과 현장 녹음 간 차이 등 기본이 이뤄지지 않는 한국 영화가 참 많습니다. 영화에서 정서를 움직이는 장치는 정작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인데, 조악한 사운드를 그대로 내보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생긴 '생활 연기'라는 국적불명 & 정체불명의 연기 개념. 메소드 연기의 연장선,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생활 연기'라는 개념은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대사에 정당성을 부여한 모양새가 됐습니다. 그런데 '생활 연기'라는 이름으로 날아다니는 대사를 듣는 관객은 참 고역입니다. 무성영화가 아닌 이상 어떤 형태의 연기를 해도 대사 전달은 잘 이뤄져야 합니다. 이건 정말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불분명한 대사를 하는 연기가 정말, 정말 꼭 필요하다면 현장 녹음에 더 각별한 신경을 쓰거나, 따로 ADR 작업을 하거나, 사운드 믹싱에 더 공을 많이 들이거나 어떤 방법이든 동원해서 관객이 의식적인 노력없이 배우의 대사를 듣도록 해야합니다. 대사 전달을 위한 노력은 배우와 감독, 제작사의 몫입니다. 왜 그 노력을 자꾸 관객이 하도록 만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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