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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pr 13. 2019

어스(Us, 2019)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 절반의 성공



겟 아웃

<어스>를 말하기 앞서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을 잠깐 말해보고 싶습니다. <겟 아웃>은 영화 내내 제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런 공포 스릴러는 처음이었거든요. 이전까지 접했던 공포물과 전혀 다른 새로움과 묘한 정서. 영화가 끝난 후 눈 앞을 스쳐간 그 이미지들, 내가 경험한 새로움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되새김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겟 아웃>은 공포 스릴러와 코미디의 완벽한 화학결합물이었습니다. 결합하는 물질들 본성을 그대로 유지되면서 단순히 한 덩어리를 이루는 물리적 결합과 달리 화학적 결합은 물질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잃고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물질로 재탄생된다는 것입니다. <겟 아웃> 이전 공포 스릴러와 코미디의 결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합은 분명 물리적이었습니다. '자 여기부턴 코미디', '자 이제 스릴러 간다' 이렇게 두 상반된 장르적 요소 간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했었. 어쩌면 작가와 감독들에게 '장르에 충실해야 한다'는 심리적 경계 혹은 강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외줄 타며 저글링 했던 조던 필

그런데 조던 필 감독은 <겟 아웃>에서 공포 스릴러와 코미디, 이질적인 두 장르를 원자 단위로 해체한 뒤 다시 하나의 분자로 결합하며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물과 불처럼 웃음과 긴장은 서로를 중화시키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녔습니다. 웃음이 너무 강하거나 가벼운 연기가 조금만 어지면 기껏 공들여 당긴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영화의 톤 앤 매너가 무너지죠. 그래서 영화의 팽팽한 긴장이 풀어져버리지 않는 선에서 유머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상반된 장르 사이 어딘가 미묘한 지점에 존재하는 균형점을 찾아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영화 내내 이어가기 위해서는 높시나리오 연출 능력은 물론 코미디에 대한 깊은 이해 역시 요구됩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그 작업을 필 감독은 데뷔작에서 해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공포 스릴러와 코미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그는 사회비판이란 저글링을 했습니다. 완벽히.





Show! Don't Tell.

<겟 아웃>에서는 '백인이 우월하다', '백인이 비판받아야 된다', '사회가 잘못됐다', '바뀌어야 한다'는 직접적인 대사가 없습니다. <겟 아웃>이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은 난해한 텍스트나 이론을 통한 해석도 필요 없습니다. 사고 현장을 처리하는 백인 경찰, 흑인의 몸을 낙찰받으려는 백인(+황인)들의 모습, 흑인 집사의 기괴한 태도를 통해 감독의 칼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관객은 직관적으로 알게 됩니다. 필 감독은 영화의 제1원칙 'Show Don't Tell'이 무엇인지 정답을 보여줬습니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이런 알레고리가 세상에 있었나요? 직설화법만이 전부였던 세상에 필 감독이 내놓은 공포와 유머의 마법 같은 우화 <겟 아웃>은 말초적 쾌락에만 머물러있던 공포스릴러의 지평이 넓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코미디와 공포 스릴러, 사회비판의 완벽한 화학 결합. 번뜩이는 재치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 의식, 단단하고 밀도 높은 이야기, 영화의 마지막까지 높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완벽한 연출력. 천재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차기작 <어스> 소식을 들었을 때 저의 기대감이 어떨지는 아마 충분히 예상이 되실 것입니다.



서론이 참 길어졌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어스> 이야기를 해봅시다.





절반의 성공

<어스>에 대한 저의 한 마디 평입니다. 영화 내내 저의 혼을 빼놨던 <겟 아웃>과 달리 <어스>는 영화가 꽤 늘어지고 이야기가 성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몰입감은 가족 앞에 도플갱어들이 처음 등장하는 씬에서 절정을 맞이하고는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립니다. 물론 간헐적으로 조금 상향 곡선을 그리는 순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몰입과 긴장 우하향 곡선을 그립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결정적 패인은 "We are American"에서 시작합니다. 감독은 영화 전반에 걸쳐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상징을 배치시키고 어느 하나 명확히 설명하지 않습니다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그 많은 상징들은 사실 이야기 줄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트리비아나 이스터 에그에 불과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 상징은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사람들을 죽인 신비한 존재 '도플갱어'의 정체입니다.


<어스>는 Show Don't Tell에 실패했습니다. <겟 아웃>이 어떻게 '말'하는 대신 '보여'줬는지 봅시다. 백인 여자 친구가 흑인 남자 친구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을 하다가 도로에서 야생동물을 쳤습니다. 현장을 정리하러 온 백인 경찰은 운전자가 아닌 동승자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합니다. 왜? 셋 중 누구도 인종차별을 하지 않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어스>에서도 도플갱어의 정체와 행동, 목적이 무엇인지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 갈등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레드'가 가족을 앉혀 놓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말이죠.  


전작과 달리 스릴러와 코미디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것도 한몫합니다. <어스>에서는 코미디의 가벼움이 좀 지나치다는 느낌입니다. 긴장이 이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실없는 유머가 자주 나와 흐름을 흩트렸고, 그러한 유머에 반응하는 딸의 가벼운 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정체불명존재들이 괴이한 표정과 행동으로 나와 우리 가족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극의 긴장과 핍진성을 떨어뜨리는 이 연기의 책임은 배우보다는 감독의 연기 디렉션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일부러 그런 연기를 주문한 것 같거든요.





슬래셔가 주는 아찔한 긴장도, 폭력의 쾌감도, 드라마의 정서도 없이 사라진 시간들

등장인물들을 막무가내로 죽이는 슬래셔 무비는 악당의 무차별 살육, 그리고 영화 마지막 아슬아슬하게 악당을 무찌르는 과정에서 터지는 카타르시스의 쾌을 즐기는 장르입니다. 이 장르의 미덕은 말초적 죽임과 죽음에 있지 의미나 목적에 있지 않습니다. 감독 관객 누구도 의미를 따지지 않습니다.


영화의 상당 부분에서 <어스>가 보여준 추격과 살인, 복수는 슬래셔 장르를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슬래셔가 주는 무차별한 살육이 주는 짜릿한 쾌감(!)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희생자인 백인 친구 가족의 죽음이 어떤 정서적 울림을 주지도 않습니다. 슬래셔 무비에서 나오는 여느 첫 희생자들처럼 그들은 영화의 소품처럼 가볍게 존재하다가 가볍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관객은 그들의 죽음에서 어떤 정서나 감정이입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퀀스가 이야기를 앞으로 추동시키거나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통째로 드러내도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백인 가족 별장 시퀀스는 무의미하게 러닝타임만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시간은 도플갱어 내러티브에 쓰였어야 합니다.



높은 밀도

관객을 스크린에 빨아들이는 영화,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에는 무의미한 대사가 없습니다. 소모적인 캐릭터도 없습니다. 감독이나 촬영감독의 에고 때문에 무의미하게 전시되는 시퀀스도, 씬도, 쇼트도 없습니다.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가 '밀도 높다'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대사 한 줄, 캐릭터의 손짓과 눈 빛, 들 숨과 날 숨 1초까지 모두 존재 의미가 분명하기에 관객은 영화에서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고,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스>가 그런 높은 밀도의 영화였나요?


<어스>는 러닝타임을 버거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1시간 30분 정도의 러닝타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정도 러닝타임이면 밀도 높고 알이 꽉 찬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쇼트나 신을 독립적으로 잘라내서 보면 대부분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뛰어난 미장센도 결국은 서사 진행을 위한 내러티브의 도구입니다. 서사의 빈약함을 미장센이 채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정도가 제가 생각하는 <어스>가 늘어졌던 이유, 몰입감이 떨어졌던 이유, 더 나아가 재미가 덜 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서사라는 하나의 렌즈 만으로 <어스>를 논하기에 이 영화가 가진 상징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기에 상징에 관해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상징

필 감독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늘어놓은 상징과 비유들이 너무 낮은 차원의 직접적인 것들이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것들이 영화 내내 반복되는 모습에 마음이 심란해졌습니다. 그가 관객을 믿지 못한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겟 아웃>에서 그렇게 간결하고 힘 있게 치고 나간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 의심의 절정은 역시나 "We are American"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자 가장 중요한 상징을 이렇게 느닷없이 대놓고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스>는 그런 식으로 가장 중요한 주제적 상징의 외피를 벗겨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짜 의미를 끝까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상징들! 지치지도 않는 그 상징들!

<어스>의 리뷰를 검색하면 포스팅의 대부분이 상징 해석에 치우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글들은 이렇게나 많은 상징들이 숨어있는 이 영화란 얼마나 훌륭한지 찬탄하며 결말을 맺습니다. 그런데 상징이 많이 들어가면 훌륭한 영화인 것일까요?


생각해봅시다. '예레미야 11장 11절'이 적힌 카드 보드를 직접 관객의 눈에 들이미는 연출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영화를 다 본 관객이 자연스럽게 예레미야 11장 11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연출이 어려울까요? 필 감독은 영화 내내 지치지도 않고 열정적으로 11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11'은 도플갱어, 복제인간, 엮인 인간, 하나의 쌍을 의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더 깊이 있는 의미나 다층적 함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얕은 직유가 다른 외피를 걸치며 반복되는 것일 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11을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게 나은 연출일까요 아니면 단 한 번, 더 양보해서 서너 번만 보여주는 게 더 나은 연출일까요? 어느 쪽이 관객에게 주는 임팩트가 더 클까요?


선반에 <구니스> VHS 테이프가 꽂혀있고, 아이가 <죠스>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 '트리비아'나 '이스트 에그'로서 잠깐의 관심이나 흥미로운 화제의 소재가 될 순 있어도 이 영화에 깊은 의미를 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얕은 트리비아와 이스터 에그가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는 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이스터 에그를 여기저기 집어넣는 게 더 어려울까요, 좋은 이야기를 밀도 있게 연출하는 게 더 어려울까요.





도플갱어의 탄생

제가 이 영화에서 유의미하다 생각하는 상징은 하나. '도플갱어'의 존재입니다. 많은 리뷰에서 '노동자', '저소득층', '흑인', '인디언', '멕시코인', '백인 하층민', '자본주의'에 '트럼프(!!!)'까지 실로 다양한 해석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본 <어스> 리뷰에서는 도플갱어의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감독의 인터뷰와 기사를 참고해봤습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영화감독의 인터뷰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감독 본인의 의도와 관객의 반응 간 낙차에 따라 감독이 말을 바꾸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블레이드 러너>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대표적인 예이죠. 그리고 감독이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의견이 달라지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참 흥미롭죠. 그래서 영화는 그 내적 완결성 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 감독의 변은 차치하거나 참고만 하고 말이죠. 감독과 스태프가 참 여러 말을 했던 <인랑>이 생각나네요... 어쨌든,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가급적 많은 감독 인터뷰를 읽어봤습니다. 그래야 감독의 진짜 의도가 스펙트럼처럼 보이거든요. 그리고 제 주관적 해석을 반영해봤습니다.


1. 영화 세계관과 캐릭터, 거울 모티프

필 감독은 도플갱어가 주는 두려움은 이 세계에 또 다른 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공포, 나의 도플갱어와 조우했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는 공포에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나와 다르게 움직이는 상상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항상 있었다고 합니다. 거울 속 자신에 대한 그 공포는 도플갱어에 대한 두려움과 결합합니다. 필 감독은 이러한 '한 쌍'이 주는 공포의 정체가 무엇인지, 만약 나의 도플갱어가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 공포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일지 생각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는 미국 전역에 버려진 터널과 지하 시설이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언제나 감독이 공포를 느꼈던 거울이라는 존재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티프로서 여주인공과 함께 영화의 시작과 끝에 나타나죠.

 


2. 도플갱어 - 인간의 양면성과 모순성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도플갱어 미신이 존재해왔던 이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죄의식, 트라우마, 증오 등)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면의 즐거움과 밝음으로 덮고 감추기 때문이라고 감독은 말합니다. 만약 그 어두운 이면이 구체적 실체로 외부에 형상화된다면 어떤 괴기스러운 형태가 될지 모른다고 덧붙입니다.


영화 속 도플갱어들의 괴이한 행동은 감독의 이런 공포와 궁금증의 산물입니다. 특히 감독은 루피타 뇽에게 도플갱어 연기 디렉션을 할 때 여왕 바퀴벌레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빠르지만 정적이고 엘레강스(!)한 여왕 바퀴벌레...



3. 도플갱어 - 개인에서 사회로

'우리 Us'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너와 나를 가르는 이분법적 본질을 갖습니다. '우리'가 있으면 우리의 범주 밖에 타자로서 '너희', '그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모두가 우리라면 '우리'라는 관념이 무의미하겠죠. 필 감독은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지만 '그들' 역시 '우리' 안에 존재하기에 결국 우리에게 최악의 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강조하며 악마는 어쩌면 우리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괴물은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뜻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되는 이 말은 필 감독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미국인이라는 점을 알면 이해가 됩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이민자를 타자로 배척하고, '우리'와 다른 정치 세력을 타자로 배척하죠. 서로 배척하는 갈등하는 그 괴물 같은 모습이 모두 미국인인 '우리' 입니다.





4. 도플갱어 - 결국은 미국에 관한 이야기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미국의 좋은 면과 긍정적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 특히 미국인의 특성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동등하게 태어난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미국은 대량 학살이 있었던 핏빛 토양 위에 건설됐습니다. 이 나라의 DNA 깊숙한 곳에는, 위대한 정신과 함께 대량 학살, 강간, 노예제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미국인으로서 제가 특권을 받아들인다면 이 나라의 바탕에 깔린 많은 죄들에 대한 죄의식도 함께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결국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나라, 자부심과 죄의식을 동시에 느끼는 복잡한 정서를 주는 나라, 본인의 조국 미국입니다. 가장 무서운 괴물은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속한 집단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우리 자신, 미국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5.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모티프 - 모순: 행복과 순수 그리고 깊은 어둠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 운동은 미국식 낙관주의와 희망, 우리가 합심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레이건 식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정신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자선 운동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더 깊은 어둠과 조우하게 된 때이며 공포 영화를 무서워하게 된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에는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첼린저 호 사건이 있기도 했습니다. 여러 80년대 이미지들은 미국의 낙관주의와 행복, 순수와 함께 더 깊은 어둠을 상기시킵니다."


영화 속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는 도플갱어와 함께 양면성과 모순성을 상징합니다. 도플갱어가 인간 개인적 차원의 양면성을 상징한다면,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는 80년대의 미국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국가적 차원, 정확히는 미국의 모순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도플갱어는 누구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이들이 도플갱어를 멕시코인, 저소득층, 노동자, 흑인, 백인 소외계층, 트럼프(!) 등 수많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해석은 파편적인 색, 이미지, 외형, 몇몇 사실에만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전반의 컨텍스트에 대입시키면 연관성이 떨어지는 단편적 해석입니다.


'어스'가 누구냐, '도플갱어'가 누구냐는 수많은 미디어의 질문에 감독은 항상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 자신'이라고 강조하죠. 구체적 질문에 추상적이고 간접적 대답을 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지만(영리한 행동입니다), 도플갱어는 우리 자신(특히 미국인)이라는 점 하나만은 분명히 합니다. 지나친 확대 해석을 막고자 함이 느껴집니다.



우리, Us, 미국인, U.S.

결국, 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간에 내재한 양면성과 모순성을 크게 세 가지 개념으로 구분합니다. 첫째,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어두운 이면을 밝은 면으로 가리면서 외면하는 개인, 사회, 세계. 둘째,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 적과 친구를 구분 짓고 타인을 적으로 돌리는 인간의 본성. 셋째, 피로 얼룩진 옳지 못한 역사를 이민과 개척의 승리로 미화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특권을 누리는 미국인. 영화 속 우리(Us)는 이 세 가지 개념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고, 도플갱어는 우리(Us/미국인/U.S.)를 형상화한 상징적인 실체입니다.


필 감독이 전작 <겟 아웃>을 통해 인종차별을 이야기했다면, <어스>에서는 미국이라는 국가와 미국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트럼프 집권을 비판하는 얕은 차원이 아닙니다. 이해관계, 인종, 이민, 종교, 정치 등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너희를 구분 짓고 갈등하는 현대 미국의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희망', '긍정', '개척'이라는 미국의 정신과 역사를 회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정체성까지 부정하기보다는 미국의 역사와 사회에 내재된 이면에 눈을 감으면 안 되며 나와 너로 구분 지으며 갈등해서는 안 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론

영화 끝까지 여전히 모호함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Us)라는 메타포가 하나의 뚜렷한 구체적 개념이 아닌 여러 하위 개념들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도플갱어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Us) 개념을 풀어감에 있어 여러 개념들을 분명히 표현하기보다는 거칠게 퉁쳐서(!) 표현했기 때문에 영화 끝까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이곳저곳에 배치된 여러 상징들이 그 모호성을 더 강화시키죠.


저는 이 모호함이 서사의 취약성과 결합해 <어스>를 끌어내렸다고 생각합니다. 필 감독은 무의미하게 낭비된 시간에 도플갱어에 대해서, 더 나아가 우리(Us)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보여줬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서사와 내러티브가 탄탄했다면 개념의 모호함이 예술적으로 승화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서사의 취약성과 지나친 상징의 나열은 분명 이 영화의 부정적 요소이지만, 인간과 미국의 양면성과 모순성을 도플갱어와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개념을 끌어들여 이야기하고 시각화한 점은 필 감독의 뛰어난 감각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리뷰 시작에서 재미가 떨어지고 <겟 아웃> 보다 못한 영화라고 이야기했지만, <어스>는 못 만들어진 영화는 아닙니다. 감독의 전작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넷플릭스에 넘쳐나는 인스턴트 영화들과 비교하면 <어스>는 '참 잘했어요'입니다. 심혈을 기울여 찍었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오히려 <겟 아웃>의 성공이 필 감독의 어깨에 너무 힘들어가게 만들어서 <어스>에 지나치게 너무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이 화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천재? 거장?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두 번째 작품 <어스>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떠나 감독 본인이 완성된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만족? 부족? 위의 이미지가 웅변하듯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그에게 '거장 master' 칭호를 붙이며 스탠리 큐브릭, 알프레드 히치콕와 함께 거론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가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천재와 거장 사이에는 아득하게 큰 거리가 존재합니다. 영화 역사에는 한두 편의 영화로 엄청난 찬사를 받고는 이내 추락해버린 수많은 천재 감독이 있지만, 커리어 전체에 걸쳐 작품성을 인정받아 거장에 등극한 감독은 극히 드뭅니다. 제작, 각본, 연출까지 해내며 뛰어난 감각을 뽐내는 조던 필 감독이지만 그를 '거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이릅니다. 그래서 그의 세 번째 작품이 기다려집니다. 힘을 넣어 본 자만이 힘을 빼는 법을 알 수 있죠. 필 감독이 <어스>를 통해 힘을 빼는 법을 배웠을지, 그렇지 않은지, 거장의 반열에 조금 더 다가갈지,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천재가 될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의 발칙함과 새로움을 응원합니다. 재능을 가진 감독이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객에게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어스> 리뷰는 제가 조금 오바한 감이 있습니다. 너무 길어졌습니다. 혹시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대단하시다' 감사드립니다.

 



#어스 #조던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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