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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un 17. 2019

게이.꼰대.인식의 차이.대화.존중받아야 할 모두.

사회에 대한 잡설

지금 뉴욕은 각종 상점마다 무지개를 깃발로 걸어놓거나 스티커를 쇼윈도에 붙여 놓는 등 LGBTQ 커뮤니티를 지지하는 상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6월은 LGBTQ의 달이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것이지만 어떠한 특정 관념의 변화가 눈에 띄게 빠르게 변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치적 올바름(영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용어인데, 이 말을 쓸 때마다 참 입에서 겉도는 것이 용어가 낯설고 참 한국어스럽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P.C. 중 C에 해당하는 Correctness는 기존의 것을 고친다는 의미이죠) 그중에서도 여성 인권과 게이에 관해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게이라는 주제를 통해 다양성, 이해, 인권, 존중, 세대 갈등, 사회, 한국이라는 나라까지 일관성 결핍에 시달리는 잡설을 한번 풀어볼까 합니다.


저는 당연히 게이의 인권은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어떠한 차별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게이'가 어디에서 더 특별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이를 말할 때 흔히 보는 슬로건 중 하나인 '게이임이 자랑스럽다 Gay Proud'라는 레토릭은 지금까지 숨겨야만 했던 나의 특별한 정체성을 이제는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내놓겠다는 일종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헷갈려선 안 되는 것은 그 '자랑스러움'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제가 한 인간이자 한 남자로서 갖는 자랑스러움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이로서의 자랑스러움이 특별함이나 유별남을 의미하거나 사회가 그것을 포용한다고 해서 어느 특정 그룹이 더 자랑스러워할 무언가는 아니라는 것이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게이는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성 정체성이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것이 모든 사회, 모든 세대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어른 세대는 여전히 게이의 문화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그런 어른 세대를 혐오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이 태어나고, 기존의 개념은 기존과는 다른 개념으로 서서히 혹은 급격히 변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특히 소프트웨어는 새로운 패치를 통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합니다. 업데이트를 통해 기존의 오류를 수정하고 변해가는 주변 환경에 대응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기존의 기능을 변경시키죠.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지닌 관념, 사고체계를 업데이트시킵니다. 컴퓨터는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하는 방식으로 업데이트가 이뤄지는 반면, 우리 인간의 업데이트 창구는 다양합니다. 주변인이 될 수도 있고,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책이 될 수도 있고, 혼자만의 경험이 될 수도 있고, 유튜브, TV, 라디오, 신문 등 미디어를 통할 수도 있고, 그것이 복잡하게 혼합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기계적이고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소프트웨어와 달리 인간의 관념 업데이트는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기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느려지거나 일정 부분만을 강화시키거나 아예 멈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기와 청소년 시기에는 스펀지처럼 주변 정보를 빨아들입니다. 왕성한 업데이트가 이뤄지지만 특정 사고체계로 완전히 굳어지지는 않습니다. 청년기에 이르러 사고체계가 어느 정도 완성되고 그것이 굳어집니다. 장년기를 거치며 그 사고의 틀은 완전히 굳어지고 '인생의 거대한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 틀은 거의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습니다. 그 틀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사회 현상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자 판단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양태를 결정합니다. 


사고체계, 즉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그 인식된 정보를 재구성해 나의 것으로 만드는 생각의 틀인 사고체계가 굳어진다는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강화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데 반해 뇌과학에서는 이것을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질량으로 따지면 우리 몸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 뇌는 우리 몸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40%를 소비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래서 뇌는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가급적 적게 소비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에너지 소비 1등급 냉장고, 자동차 같은 개념이죠. 고정관념과 관념은 그 '에너지 효율'의 산물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의 긍정/부정 유무를 판단하고 인식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한번 익숙해진 정보/관련 정보/정보 다발에 대해서는 특정 경로, 일종의 사고 고속도로? 하이패스?를 열어둬 이것저것 뜯어보는 비판적 사고나 판단 없이 그 경로를 통해 기존에 만들어진 인식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특히 인간은 나이를 먹으며 나름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거칩니다.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의 경험,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줬을 그 경험을 피하기 위해/반복하기 위해 행동하려는 방향성은 의식적이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생깁니다. 그 과정의 반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형성하고 강화시키고 굳혀갑니다. 청년기를 넘기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사고체계의 유연성이 장년기를 넘기며 급격히 떨어지는 이유, 특히 성공과 실패 경험의 강도가 클수록/많을수록 강화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이루어진 이러한 두뇌의 진화가 현시대에서는 오히려 생존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너무' 많은 정보와 개념이 '너무' 빠르게 쏟아져 나오고 기존의 것들이 '너무'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지니고 있던 성공과 직업, 돈, 관계, 인간, 삶의 관념들은 지금 젊은 세대가 지니고 있는 것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곤란을 겪거나/포기했거나/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청년기를 거치면서 사고체계가 굳어집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 변화의 민감성이 떨어집니다. 인간이라면 나이를 떠나 누구나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변화가 나에게 좋던 안 좋던(물론 안 좋으면 더 하지만) 일단 내게 온 변화 앞에서 인간은 회의적이고 수동적이고 방어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진화해 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변화를 수용하고 적응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믿던 성공 방식을 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뉴턴의 물리법칙처럼 우리의 사고체계와 행동 또한 관성을 지닙니다. 외부의 강한 충격이 있지 않는 한 그 관성은 계속 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강화됩니다. 마찰이 없는 우주에서 속도가 점점 빨라지듯 말이죠.




틀딱, 태극기 부대, 꼰대라 불리는 우리 아버지 세대가 그렇기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변화에 둔감하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쏟아지는 정보에 둔감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거친 배움/성공/실패의 경험이 그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곤란해하고/거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합니다. 자신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변화의 강도가 큰 만큼, 그들이 보이는 거부의 강도도 큽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와 충돌하며 '틀딱', '태극기 부대', '꼰대'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서서히 사회로부터 외롭게 고립되어 갑니다(그들은 적어도 젊은 세대에게 저질스러운 언어를 씌우며 혐오하진 않습니다).


저는 틀딱, 태극기 부대, 꼰대라는 특정 계층, 그룹을 혐오스러운 언어로 낙인찍는 지금 세대의 문화를 혐오하며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고 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는 존재입니다. 틀딱 같은 언어를 만들어 그들을 부르는 순간, 기존에 흐릿하게 존재하는지 아닌 지 알 수 없던 존재는 명확한 눈, 코, 입, 팔, 다리를 갖춘 명백한 존재로 탄생해버립니다. 그리고 확실한 구분선이 그어져 버리는 개념의 탄생은 너와 나 둘 사이에 존재하는 스펙트럼을 소거시켜 완벽한 흑과 백, 너와 나의 구분을 만들어냅니다.


하나의 혐오스러운 이름이 붙여진 덩어리로 보이지만 그 딱지를 떼어내고 한 명 한 명을 보면 그들은 결국 우리를 낳아준 고마운 존재이자 그런 존재의 사촌, 친구입니다. 기존에는 볼 수 없던 너무나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곤란을 겪거나 그저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편으로 집회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 자리가 마뜩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외롭지 않으려고 동질감과 소속감을 얻고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언어는 인간이 지닌 수 많은 모호함의 회색지대와 스펙트럼을 소거시켜버립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존재, 고귀한 존재,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들 또한 여러분과 똑같은 자랑스럽고, 귀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정치적 성향이 다르고 나와 다른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이 귀하고 특별하지 않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어르신, 성적 아이덴티티가 우리와 다른 게이, 심지어 법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 조차 법의 절차에 따라 조사를 받고,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되고,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를 받는 이유는 비록 우리와 다른 정치 성향을 갖거나, 우리와 다른 성정체성을 지녔거나, 심지어 범죄를 저질렀어도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개별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 인권을 지닙니다. 그 천부적 인권은 성별과 인종, 나이, 출생지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나에게 소중한 이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친척. 우리가 혐오스러운 언어를 뒤집어 씌어 아무 생각 없이 욕하는 그 존재 하나하나는 누군가에게 아버지, 어머니, 오빠, 누나, 동생, 친구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나와 단순히 정치적 성향이 다르고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혐오한다면, 나 역시 같은 이유로 타인에게 혐오받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근본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 우리 그룹의 이해가 소중한 만큼 타 그룹의 이해도 소중하다. 그 각각이 지닌 다름, 즉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한 정치 체계가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여러 생각을 가진 정당과 이해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며 격투장이 아닌 의회라는 '대화'의 장소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양한 정당을 갖고 선거를 하는 민주주의를 갖는 이유입니다.


만약 내가 옳고 남은 틀리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면, 나의 믿음만이 완벽한 정의라면 자연적으로 나와 다르거나 정반대의 믿음은 위험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나와 생각이 다른 정당이 존재하는 것도 위험하거나 적어도 불필요합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나와 다른 생각과 이익을 지닌 이들도 위험하거나 불필요하게 됩니다. 왜 굳이 그들을 존재하게 내버려두나요? 그들의 믿음은 정의가 아니니 해체시켜 버리거나, 유배를 보내거나, 믿음을 '교정'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교정을 거부하면서 나와 다른 믿음을 계속 전파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회 정의를 해치는 일이니 위험한 것 아닌가요? 그들을 교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믿는 절대 정의, 오직 그 정의 하나만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닌가요? 


그 생각이 바로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시작입니다. 파시즘, 나치즘이 모두 그 믿음, 하나의 깔끔하게 통일된 믿음과 정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도 모두 그 통일된 하나의 가치/정의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국민 모두가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은 이는 교정되거나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믿음 말입니다. 전체주의란 어느 한 사악한 악마가 온 국민의 영혼을 조종해서 생긴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2차 대전을 벌이고 나치를 학살한 독일인들은 그들이 '정의'를 실현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믿음과 정의가 절대적 정의라고 믿듯, 나치나 일본인들은 그들의 믿음이 절대적 정의라 믿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혐오하고 존중하지 않는 이유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에서 기인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관념과 믿음, 사고체계가 정의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내가 갖는 믿음이 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취합해 아무 편견이나 편향 없이 객관적으로 완벽히 분석한 끝에 도달한 기계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무결점의 궁극적인 결론인가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나요? 인공지능 조차 불가능합니다. 머신러닝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의 소스가 편향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텍스트를 머신러닝 한 인공지능은 문예체의 언어를 출력으로 내놓고, 채팅의 텍스트를 머신러닝 한 인공지능은 채팅체의 언어를 출력해냅니다. 세상에 완벽한 정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다수를 대표하는 정의에 가까운 의견이 있을 순 있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에 가까운 의견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갑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박근혜 정권은 '통일 대박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전문가, 지식인들은 통일이 얼마나 남한에 큰 불편과 부담을 가중시킬 것인지 떠들었습니다. 그들은 절대 통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은 한반도에 통일이 얼마나 큰 효익을 가져다줄지를 떠들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준비하는 평창 올림픽은 '적자 올림픽' '지방 파탄시키는 올림픽'이었지만 문재인 정권이 실행한 평창 올림픽은 '한국의 자랑'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누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요? 혹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정의라고 생각하는 대로 정의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게이를 혐오합니다. 그리고 또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어른들을 혐오합니다. 우리의 어른 세대는 게이를 받아들이지 않던 시대를 평생 살았던 세대입니다. 아니 게이를 떠나 전쟁을 직접 경험했거나,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세대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피폐한 환경,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배우고 자라고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 환경적 다름이 게이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그들을 혐오하기보다 그들이 게이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더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옷깃이라도 스치면 안 되는 똥 피하듯 피하기보다 그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지, 무엇이 그들을 서럽게 만드는지, 무엇이 그들을 외롭게 만드는지. 그런 것들, 우리 역시 누군가 들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해주길 원하지 않던가요.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어른들이 알아주길 원하지 않나요.


당신은 70세, 80세가 되어도 지금처럼 트렌드에 민감하고 시대와 정치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나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왜냐하면 인간, 우리 모두는 저마다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통해 생존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그 사고체계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진화되어온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열린 마음', '편견 없는 마음'은 사실 몹시 힘든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열린 마음'이란 곧 나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인식과 사고의 기반을 부수는 일이며 곧 나의 판단 기준을 상실해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태생적 한계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면 적어도 우리 스스로를 단속할 수는 있습니다. 한계를 인식하면 관성을 멈추거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너무 부정적이고 강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절대 정의가 아니라는 생각. 내가 특별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만큼 타인의 존재도 마찬가지라는 생각. 다양성은 그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부터 나온 개념이라는 것. 민주주의는 그런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치 체계라는 것만 이해해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혐오와 갈등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어른 세대는 전쟁의 폐허에서 한국을 지금까지 성장시킨 이들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다 자기 잘될라고 그런 거다'며 폄하합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모두 곤궁과 궁핍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던 시대였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개인보다 국가와 단체를 강조하던 때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깊은 애국심을 지녔고, 자신과 국가를 일치시켰습니다. 국가적 경사가 곧 개인의 경사이자 행복이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의 노동에는 성공하고 싶다는 개인적 차원의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해서 자식 세대에게는 조금 더 나은 나라를 물려주고 싶다는 소망과 국가적 차원의 의미도 함께 있었습니다. 밤낮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기에 극소수의 국가만이 경험한 기적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했고 많은 국가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었지만, 그 빠른 성장이 낳은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언제나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기 마련이고,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특별한 상황에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냉전이라는 위태로운 이데올로기의 최전선에서 배고픔을 면하고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특별한 을 취했습니다. 많은 문제와 부작용이 있지만 그것은 그 당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목표와 실행 방법의 유효기간은 만료되었고 우리는 지금 그 끝에 와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어른 세대가 일궈놓은 성취를 비하하고 그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내놓은 방법이 지닌 부작용과 문제만 부각시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이후 한국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따져 보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 만이 아닌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고, 잘된 일은 더 지킬 때 우리가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직시할 때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이 되길 원하는 지 그 방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어른 세대가 이룬 성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발판 삼아 조금 더 성숙하고 지속 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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