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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Nov 04. 2019

예술적 허영에 대해서

미국에서 불고 있는 <기생충> 열풍을 보며



네, 인정합니다. 제목이 조금 도발적입니다. 제 개인의 경험을 미국인 전체 현상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저의 경험을 통해 본 미국인의 예술적 허영, 특히 영화 관람에 나타나는 허영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대상을 미국인에 한정지었지만 사실 이건 한국인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많은 이들에게 해당이 될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불고 있는 <기생충>의 열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엔드 게임>의 활화산 같은 상업적 성공은 아닙니다만 기준을 독립영화에 맞춘다면 꾸준히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는 지금 <기생충>의 인기는 분명 이례적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인터넷에서 더 폭발적입니다(언제나 그렇듯). 현재 영화를 다루는 미국 유튜버 대부분은 <기생충>을 다뤘고, 그들의 평은 거의 모두 10/10, 압도적입니다. 리뷰 영상들에 달린 반응 또한 뜨겁습니다. 모두 "올해의 최고 영화" "오스카 작품상을 반드시 줘야 한다"라며 상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 영화에 대해 이해를 했을지, 혹시 낯선 나라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예술적으로 훌륭하다고 알려지니 예술적 자아를 뽐내고 싶은 딜레탕트들이 많은 것은 아닌지, 지금 일고 있는 열풍의 레이어를 한 꺼풀 벗겨보고 싶어 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근히 예술적 허영심이 있습니다. 예술 영화를 감상할 때와 오락 영화를 볼 때의 마음 가짐이 사뭇 다릅니다. 뭐랄까 티켓을 살 때부터 이미 마음은 머리에 빵모자를 쓰고 토트백에 바케트를 꽂고 있는 프랑스적인 느낌적인 느낌. 영화 관람 후 리뷰를 쓰거나 인증샷을 올릴 땐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남들이 싸구려 영화 볼 때 나만은 예술의 '찐'을 향유하는 '멋진 사람', '남들 다 보는 액션 영화 볼 때 난 이런 우아하고 고상한 영화 감상한다'는 거만함(?)이 마음 한 구석 스멀스멀 오르지만 그 빵빵한 자아를 대놓고 드러내는 건 또 마이클 베이 영화처럼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애써 자제하는 이 간사한 사람의 마음이여.



시간을 거슬러 보면 그런 예술적 허영심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 표출된 사례가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드 나잇 인 파리>. <미드 나잇 인 파리>는 본격 시네필보다는 '영화 딜레탕트'의 입맛에 딱 맞는 영화였습니다.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정작 영화는 한 편도 안 본 대표적 감독 '우디 알렌'이란 점에서 허영 거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슬슬 차오릅니다. 배경은 닳고 닳은 뉴욕, LA가 아닌 프랑스의 '빠희'. 예술과 삶의 이상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주인공이 20세기 초로 시간 여행을 해서 당대를 휩쓴 예술가들과 조우한다는 이 기막힌 설정. 게다가 (고맙게도) 연출과 구성, 플롯은 전혀 난해하지 않고 내러티브는 흥미로워서 즐겁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미드 나잇 인 파리>는 대중이 먼저 찾진 않지만 영화에 좀 관심 있다 하는 이들의 예술적 허영심을 슬슬슬 간지르기에 적격인 영화였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이 영화를 접한 이들은 앞다퉈 이 영화의 리뷰를 썼고 영화는 서서히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미드 나잇 인 파리> 류 영화의 리뷰나 SNS 인증샷을 보면 <트랜스포머> 인증샷을 찍을 때와 묘하게 다른 화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왜 이래, 나 예술 향유하는 사람이야."






이런 허영심을 비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저도 그런 사람 임을 부인할 수 없거든요. 허영의 대상이 예술이든 지식이든 물질이든, 그런 마음은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마음 깊이 내재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거창하게 허영심을 꺼낸 이유는 미국인들에게서도 이런 똑같은 허영심이 고스란히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딜레탕트들에게서 말이죠. 많은 이들에게서 아시아 영화 특히 일본과 한국 영화에 대한 뭐랄까 '오리엔탈리즘'적 문화 소비가 엿보입니다. 동양 문화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낯설음+존경+경외감 같은 복합적인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들의 아시아 영화에 대한 평가는 유독 후합니다. 마치 한국인이 유럽의 예술영화 감독을 대할 때의 그런 느낌이랄까요. 우리가 프랑스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대중보다 고상하고 우월한 척하는 것처럼, 한국과 일본 영화를 리뷰하는 많은 미국인에게서 그런 태도가 짙게 엿보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외국 문화를 소비하지 않는 경향은 전 세계에서 미국이 아마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자막이 들어간 외화를 보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한국인(그외 전 세계인)과 달리 대부분 미국인들은 우선 자막이 들어간 영화 자체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의 이유를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 기저에는 수많은 레이어가 겹쳐있을 것이니까요. 여하튼 미국 내에서는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 외 영화를 본다는 것, 특히 서유럽권도 아닌 동아시아 영화를 본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건 '나 제3세계 영화도 보는 사람이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미국 내 아시아 문화와 관련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죠.






서사와 청각, 시각이 총망라된 예술인 영화만큼 관객에게 복합적인 요소와 주관적 경험이 강하게 작용하는 예술도 드물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영화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분분하지만 결국 개개인에게 좋은 영화란 재밌는 영화일 것입니다. 아까운 시간과 돈을 들이는데 평론가들이 좋다고 해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를 억지로 볼 이유는 없는 노릇이죠. 주관적 감상이 개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좋은 영화를 평가할 기준은 분명히 있습니다. 촬영, 연출, 플롯 구성, 스토리, 시나리오 작법, 캐릭터, 미술 등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쪼개 보고 그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분석하면 수준이 높은 영화와 낮은 영화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메타적 영화 분석이 아닌 개인적 감상 차원에서 좋은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이지만 이 재미라는 개념은 개인의 경험과 관념(선입견과 편견 등)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똑같은 영화라도 받아들이는 감상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여기 상징으로 가득한 예술 영화가 한 편 있다고 해봅시다. 기승전결은 모호하고, 플롯은 난해하고, 한 쇼트 쇼트의 길이도 깁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재미없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 감상 전 내가 평소 좋아하는 평론가의 극찬이 담긴 평을 읽었다면 이 영화를 단순히 재미없는 영화로만 치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자의 경우에서 그저 가볍게 무시하고 비난했을 지겨움이나 난해함은 후자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상징들을 고민해보고 재미를 찾을 만한 여지를 찾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미없어하는 내 개인적 감상을 밀어내고 타인의 해석과 감상을 끌어들이는 거죠. <리얼>, <인랑>, <엄복동> 같은 영화를 볼 때는 어떻습니까. 이미 부정적인 여론이 팽배한 영화를 볼 땐 "어디 어떻게 한 번 조롱해볼까"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나요. 사전 정보나 선입견이 없었다면 그냥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까지도 더 높은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조롱하곤 합니다. (<리얼>급으로 욕먹었던 <상류사희>의 제 평 한번 보고 가시죠 https://brunch.co.kr/@josetmojito/152 )



그렇습니다. 영화 감상이라는 경험에는 단순히 내 주관적 기준뿐 아니라 예술적 허영심이나 다른 이의 의견에서 비롯된 선입견 등 많은 요소가 반영됩니다. 그건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인에게도 마찬가지죠. 지금 미국에서 <기생충>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hype의 기저에도 그런 허영심과 선입견이 짙게 투영이 되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이미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는 뉴스는 이 영화가 상당한 예술적 수준을 지녔다는 관념의 토양, 긍정적 선입견을 깔아줍니다. 이 토양에서는 웬만한 식물을 심어도 잘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유력 매체들과 유튜버들의 만점에 가까운 평을 접하게 되면 질 좋은 토양에 충분한 비료와 물까지 준비됩니다. 내 생각 회로는 <기생충>을 적극 받아들일 만반의 채비를 마쳤습니다. 이미 승부는 끝났습니다. 남은 건(안 봐도 뻔하지만) 실제 관람뿐.



만약 <기생충>이 상업 영화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내 주관적 기준을 내세울 여지가 꽤 있거든요. 왜냐하면 상업 영화의 잣대는 누가 뭐래도 '재미', 그리고 상업 영화는 누구나 꽤 많이 보기 때문에 여러 훈련을 통해 재미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 영화는 다릅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시각은 내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흥미'에만 세팅된 내 주관적 기준은 상당 부분 해체되고 그 자리는 선입견(권위자의 의견)으로 대체됩니다. 마치 현대 미술을 대할 때처럼 말이죠. 사전에 선입견이 조성되지 않은 영화였으면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일찌감치 내팽게쳤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이해가 안 가고 재미없어도 이건 왜 그랬을까 저건 왜 그랬을까 애써 고민해보고, 리뷰를 찾아보며 실마리를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리뷰들을 찾아 헤매며 퍼즐을 끼워 맞추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기생충>이 기존 양식을 해체하는 아방가르드류의 극단적으로 난해한 영화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어느 정도 붙잡아두는 선에서 난해함을 던져줍니다. 예술과 상업의 교묘한 줄타기. <기생충>의 미덕이죠.








여러 미국 영화 유튜브 영상을 봤습니다만 형용사의 나열로 끝나는 겉핥기 식 칭찬이 전부이거나, 나름 상상력을 발휘해(!) 해석을 시도하지만 너무 얕은 깊이에 민망하기만 한 영상을 많이 봤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예 A. 영화 속 부잣집에 걸려 있는 아이의 그림이 바스키아 풍의 그림이다. 바스키아는 사회 비판적 그림을 그렸던 천재다, 영화의 주제와 그림의 선택이 연결된다, 놀랍지 않은가.


예 B. 영화 속에서 와이파이 신호를 잡기 위해 애쓰는 가족의 모습은 남한과 북한의 긴장감을 말해준다.


예 A 속 영화의 소품이나 미술을 영화 주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중학생 감독도 할 수 있는 원초적인 장치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집 안에 걸어놓을 그림이 하나 필요한데 뭐로 걸어 놓을까.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아무 그림이나 갖다 걸어 놓는 감독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회 비판적 그림을 걸어놓자. 이런 결정은 너무 일반적이고 당연한 선택입니다. 배경 속 그림이 바스키아의 작품이라는 것에 놀라는 게 민망할 따름인 거죠.


예 B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댓글을 남겨 놓고 왔습니다. 와이파이 신호를 잡으려 우스꽝스럽고 과한 연기를 하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씬은 전형적인 봉준호식 연출입니다. 그것을 남북한 간 긴장 구도와 연결 짓는 건 말도 안 되는 상상이죠(한국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이랄까요). 이런 식의 과도한 해석은 특히 예술적 후광을 지닌 영화 리뷰에서 흔히 발견됩니다(참고로 저는 영화는 퍼즐 찾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징이 많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화는 집중을 저해하고 비겁하게 느껴집니다. 상징과 이스터 에그를 찾는 건 영화의 잔가지에 그쳐야 한다고 보는 편입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미장센과 연출, 플롯과 내러티브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이 느끼도록 전달되는 것, 그런 정공법이 상징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수준 높다고 생각합니다. 상징으로 가득한 난해한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큰 감동을 주는 드라마가 훨씬 만들기 어려운 법입니다).







예술을 감상함에 있어 작가의 창작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오롯이 나의 해석과 감상이 중요한가. 이 주제는 언제나 논쟁적이며 저도 왔다 갔다 합니다. 다만 만약 예술적 명망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관객이 프랑스 감독과 그 작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인기에 편승하는 모습, 엉터리 과잉 해석을 하는 모습을 프랑스 사람이 보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 미국의 <기생충> 열풍을 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작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미국에서 꽤 알려질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평론가나 리뷰어들이 "정확히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좋아하는 모습에서 동방의 이국땅에서 온 정체불명의 작품을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소비하는 것 같아 입맛이 쌉싸름했더랬습니다. 게다가 <버닝>이 미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이란 점은 그들의 '미지에 대한 사랑'에 더 정당성을 부여해주었을 것입니다.



글의 초중반에도 이야기했지만 예술적 허영심을 비난하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미국에서 불고 있는 <기생충> 열풍을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습니다. <기생충> 상영관 앞에 길게 늘어 선 줄을 보는 것은 정말 흐뭇한 일입니다. 다만 지금 미국에서 일고 있는 현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는 것을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할리우드는 멕시코 삼대장 감독들이 휩쓸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예술성과 상업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대사를 하는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받을 일은 아마 없겠지만 한국 영화가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버닝>과 <기생충>처럼 예술성을 내세우는 작품도 좋지만 미국의 일반 대중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상업 영화가 성공하는 모습을 한 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예술적 허영심이나 오리엔탈리즘 측면에서의 소비가 아닌 아무 편견이나 골치 아픈 분석 없이 봐도 정말 즐거운 오락 영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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