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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29. 2020

백두산

우리가 정말 중국 영화를 욕할 자격이 있는가.



한 때 한국 영화는 기승전눈물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의 소재가 무엇이든 끝은 관객의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최루성 멜로(혹은 감동)로 끝났더랬습니다.


지금의 한국 영화는 기승전정치입니다. 이미 지난 여러 한국 영화 리뷰에서 정치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또 언급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소재를 불문하고 결국 모든 이야기가 정치라는 결승점, 그것도 항상 똑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향해 치닫는 지금의 한국 영화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구소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주의 미술부터 시작해서 모든 예술이 사회주의 선동을 위해 복무해야 했던 시절 말이죠.


과거. 영화 후반, 낮은 선율이 깔리면서 서로가 그윽하게 바라보는 순간 "아, 또 시작이구나" 그동안 애써 쌓았던 감정을 모두 날려버리던, 신물 나던 최루성 멜로(혹은 감동)가 오히려 나았구나 싶습니다. 그 영화들은 적어도 도구로 전락되지 않고 예술로서 자존했으니까요.


<백두산>은 누가 봐도 오락 영화입니다. <램페이지>에서 '더 락'이 거대 괴물들과 싸우는데 갑자기 정치 얘기가 나오는 걸 상상할 수 있나요? <단테스피크>나 <볼케이노>에서 재앙과 싸우는데 정치 얘기 나오는 걸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이런 재앙 오락 영화에까지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정치 이야기를 심어둔 것에 할 말을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락 영화를 정치 선동 영화로 둔갑시킨 것은 차치하고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밑도 끝도 없는 엉터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연성과 핍진성 측면에서 도저히 말이 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네, 압니다. 저도 오락 영화를 볼 땐 '저게 말이 되냐'의 기준을 상당히 낮추고 보는 사람입니다. 애초에 액션 영화의 가치는 추리소설처럼 '논리성과 개연성'에 있지 않기에 굳이 눈에 불을 켜고 오류를 가려가며 장르 영화가 주는 고유한 재미를 반감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해도 엔간히 해야죠. 만약에 정치적 색을 싹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난센스로 일관했다면 차라리 B급 영화를 보는 재미라도 있었을 겁니다. 영화는 온통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인데 사회비판적 이야기는 또 하고 있으니 결국 이 불균질한 엉터리 영화는 성에 갈라진 강남대로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모든 걸 차치하고, 6개월 된 임산부인 수지가 다리에서 차와 함께 떨어져 한강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다가 어떻게 지진과 홍수로 아수라장이 된 서울을 뚫고 인천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타게 됐는지, 어떻게 지진의 여파가 백두산에서 한참 떨어진 남녘땅까지 미치는데 정작 바로 옆 지하 갱도는 멀쩡한 것인지, 지도 하나 없이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북한을 그리 잘 돌아다니는지, 마동석은 그 짧은 시간에 대체 무슨 시뮬레이션을 그렇게 돌리는지, 인천항 밖에서 피켓을 들고 미군에 항의하며 반미 시위하던 사람들이 펜스가 무너지자 왜 갑자기 미국인들이 타는 배에 타는 건지(님들 방금까지 반미 시위하지 않았어요), 그 외 무수한 '말이 안 됨'을 제외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 설정 하나는 왜 하정우와 그의 부하들은 그토록 멍청하고 어리바리한 것인가입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어리버리함에 부대원들이 나올 때마다 영화를 그만 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혹시 뒤에서라도 그 설정에 대한 언급이 있을까 싶었지만 제 야속한 바람일 뿐이죠. 이병헌은 철두철미한 능력자인데 남한의 병사들은 발 하나 맞추지도 못하는 멍청이들인 이유가 대체 뭔가요. 지휘관인 하정우는 명령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일일이 물어보고 동의를 구하는 이유, 혹시, 정말 혹시, 감독은 그런 모습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한 걸까요.


 <백두산>을 보고 심란해졌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 영화를 조롱합니다. 공산당 선전 영화네, 영화가 수준 이하네 말이죠. 근데 <백두산>을 보고 저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한국 영화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요즘 나오는 많은 한국 영화들이 과연 중국 영화보다 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요 몇 년 충무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인 영화들은 공산당 선동 도구로 쓰이는 중국 영화들보다 나을 바 전혀 없습니다. 메시지에 갇힌 탓에 영화는 도식적이고 캐릭터는 평면적이며 이야기는 일방적입니다. 해석의 여지는 없는 일방향적 메시지 주입. 메시지 전달을 위해 서슴지 않는 사실 왜곡. 과연 한국이 자랑하는 주연 배우들과 그래픽 기술이 대거 들어간 <백두산>이 중국의 <유랑지구>나 <특수부대 전랑>보다 나은 영화인가. 적어도 저에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주얼을 놓고 본다면 이미 중국은 한국과 동등해졌습니다. 오히려 최근 나오는 많은 중국 드라마와 영화의 비주얼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래픽만 떼놓고 본다면 지금의 한국 영화는 중국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유랑지구>의 엄청난 스케일의 유려한 그래픽을 보고 <백두산>을 보면 애들 장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간간히 터지던 이병헌의 바보 같은 웃음 연기였습니다. 적어도 그가 바보같이 웃을 때가 유일하게 심란함이 좀 가시고 따라 웃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만 그 장난 섞이고 바보 같은 이병헌의 웃음은 목마른 자가 마시는 소금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톤과 충돌하며 횟수가 거듭될수록 불균질 성을 높이는 안타까운 연출이었기 때문이죠.


제가 혹시 너무 나쁜 점만 이야기했나요? 이 글은 제가 느낀 실망감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한국 영화를 사랑하고 아끼고 싶지만 정말 그게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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