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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09. 2019

버닝(2018)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미루고 미루던 그 화제의 <버닝>을 지금에서야 봤다. 왜 말이 많은 영화였는지 알 것 같다. 사회비판적 맥락이 다분히 깔려 있는 캐릭터와 장치들. 하지만 그런 비판적 맥락을 떠나서 이 영화는 마치 <곡성>처럼 서로 모순적이고 다의적 상징과 텍스트를 곳곳에 깔아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보는 이의 시선과 해석에 따라 주제나 메시지, 장르까지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사회 비판적 텍스트로 읽어냈다. 스티븐 연이 상징하는 유산계급, 그리고 그 외 인물들이 상징하는 무산계급의 이야기. 유아인과 전종서로 상징되는 현시대 젊은이의 좌절과 절망.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비판했다. 청년의 사회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냐고. 하지만 이 영화를 비판하는 많은 리뷰들은 하나같이 이 영화를 오직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흑과 백으로만 보고 있었다. 이런 마르크스주의 프레임이 현시대까지 유효한 면은 분명 있지만, 문제는 대한민국의 프레임은 현시대에 맞게 보정되지 않은 낡은 버전이란 점이다. 각 메타포와 텍스트를 읽어내는 그들의 해석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영화를 읽어내는 프레임에 영화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주객전도가 일어나고 있었다(뭐, 거대담론이란 것이 그렇듯).


뭔가 사회를 비판하는 것 같은데, 알 수 없게 쫄리는 듯 스릴러도 있는 것 같고.. 이 영화를 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가. '모르겠다'가 아마 맞지 않을까.




지금껏 살아오며 세상에 대한 내 유일한 해석은 '모른다'이다. 자신의 집권과 정권 안정을 위해 수백 명을 죽인 지도자, 미치광이라 불려 온 휴전선 너머의 영도자가 남녘의 대통령과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귀요미로 바뀌는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은 정말 모른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통일은 곧 한반도 공멸이라며 절대 해선 안 된다 부르짖던 사람들이 지금은 반드시 통일을 해야 되는 (국민학교(!) 때 배운 낡은) 이유들을 마치 최신 이론 인양 나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 정말 모르겠다'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선과 악, 필연과 우연이 뒤섞인 세상. 정의롭다 하는 사람이 온갖 더러운 짓을 저지르고, 악인의 이면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불과 몇 년 사이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세상. 이것이 금세 저것이 되고, 저것이 어느새 이것이 되어있는 세상. 100% 좋은 사람도, 100% 나쁜 사람도 아닌 이기적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때론 조금 나쁜 짓을, 때론 착한 짓을 하며 사는 세상. 저 사람이, 저 집단이 사라지면 평화와 정의가 찾아올 것 같았는데,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악인(이라 보이는)이 등장하는 세상. 달라지지 않는 세상. 과연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세상.


20대의 나에겐 분명한 가치와 당위, 정의가 있었다. 이건 나쁘고 이건 좋고, 이건 해도 되고 이건 해선 안 되고, 이건 선하고 이건 악하다는 분명하고 또렷한 선이 존재했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그 분노는 뜨겁고 맹렬했으며 그 분노는 언제나 정당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한국과 세계의 역사를 조금씩 들여다 보고, 뉴스와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수년간 또렷하게 존재해왔던 관념의 선, 가치와 당위와 정의의 경계선. 그 위의 어딘가에 또 다른 선이, 그 위의 어딘가에 또 다른 선이, 그 위에 또 다른 선이 수 없이 덧칠해졌다. 세상을 알면 알수록 무수히 많은 선들이 서로의 위에 그어져 이젠 경계가 그 의미를 상실했다.


지금은 누가 무엇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것보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아졌다. 내가 알고 있는 선, 정의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이것의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 다음 달, 내년에 그것이 또 어떻게 인식될지, 또 다른 사실이 밝혀질지 알 수 없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에는 사실 또 다른 이면과 의미가 숨어 있었다. 명백했던 많은 것들의 의미가 퇴색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되었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세상은, 그리고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다는 것이 지금의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를 미스터리라고 표현했다. <버닝> 개봉 후 가졌던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때 세상에 대한 답을 갖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답이라기 보단 '답이 있다'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사회는 답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다가 아닌 이 세상, 미스터리 같은 이 세상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세 캐릭터의 서사는 완벽하지 않다며 "스티븐 연이 정종서를 죽였을 거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종수의 의심이다. 그게 저는 세상의 미스터리와 연결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미스터리'. 그것이 바로 <버닝>을 관장하는 세계이다. 이창동 감독은 결론이 없는 조각들을 늘어놓았다. 그중 어떤 것은 사회비판적 함의를 갖는 조각이고, 어떤 것은 순수히 영화적이고 장르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로써의 조각이다. 그것은 질서 있게 정렬되어 있지 않고, 어지럽게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보면 볼수록 고구마에 목이 매이는 영화, 어느 하나 속 시원한 게 없는 영화. 감독의 인식에 닿은 현재의 세계, 답이 없는 미스터리 같은 세계. 그 축소판이 바로 <버닝>이다.




<버닝>은 애초에 답이 없는 영화이기에 이 영화의 내용 혹은 메시지는 관객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오롯이 의존한다. 사람은 아는 만큼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다. <버닝>에 투영된 이미지는 다름 아닌 나의 인식이다. 전종서는 스티븐 연이 죽였는가? 전종서가 죽은 것은 맞는 것인가? 우물은 있었는가 없었는가? 애초에 서사는 불완전하다. 해답은 없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씬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캐릭터의 눈빛, 극의 분위기 등 이 영화의 모든 것은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해서 서사를 직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마치 똑같은 뉴스를 접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세상에 객관이 있는가. 객관은 객관으로서 존재하는가.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미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미디어를 통해 투사되는 사건은 객관적인가? 사실인가? 사건은 진술을 묻는 기자에 의해 왜곡되고, 그것에 답하는 당사자에 의해 왜곡되고, 그것을 조사하는 경찰과 검사에 의해 왜곡되고, 그것을 전하는 미디어는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의 의도에 의해 왜곡되고, 데스크에 의해 왜곡되고 카메라의 앵글에 의해, 화면에 의해, 소식을 전하는 이의 톤과 제스처, 텍스트에 의해 왜곡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관념과 편견에 의해 왜곡된다. 하나의 사건 발생에서 출발해서 여러 단계를 거쳐 '나'에 도착하는 과정 중 얼마나 많은 사실이 잘려나가고 여러 관계자의 의견과 생각이 덧붙어 재구성되고 왜곡되는가. 그것을 사실, 진실, 완벽한 서사라 할 수 있는가.




이창동 감독은 "'버닝'은 청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들의 이야기로 카테고리화 되길 원한 게 아니다. (...) 더 넓은 의미의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서사를 받아들이는데 사실 이 서사라는 건 자기 욕망의 산물이다. 관객이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버닝'을 본 관객들도 다양하게 자기만의 서사를 찾길 바란다", “의도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한 건 아니다. 그저 던져버린 것이다. 관객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랐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개인적으로 <버닝>을 사회 비판적 영화로만 한정해 보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회적 함의로 외피를 둘렀지만 그 안에는 미스터리 스릴러적 요소와 연출 의도가 굉장히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미스터리 스릴러로 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화차>에 사회 비판적 함의를 조금 끼워 넣고 좀 더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분칠하고 중간에 확 그냥 끝내버린 영화. 그게 <버닝>은 아닐까.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 조차 감독의 의도가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건, 여전히 모호하고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석연치 않은 씬이 여럿 있지만 이 영화는 '미스터리'라는 감독의 화두를 촉매제 삼아 사회 비판적 시선과 미스터리 스릴러적 재미를 완벽하게 화학 결합한 영화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질적 요소의 완벽한 화학결합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완전 지워버렸다는 점, 그것이 주는 낯설고 어색한 영화적 체험. 이 경험은 코미디와 공포의 완벽한 조화를 이룩한(그렇다고 나는 생각하는) <겟 아웃> 때 처음으로 느꼈던 기분 좋은 어색함(!)이었다. 또한 <버닝>이 가진 아름다운 해석의 다양성은 의도된 촬영 기법을 통해 악의적(!)으로 해석을 모호하게 만든 <곡성>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영화이며 이런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PS 1. 물론 이 영화에 내 의견과 감상을 강요하는 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다.


PS 2. 스티븐 연의 어색한 한국어 연기는 오히려 '벤'이란 모호한 캐릭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캐릭터 구축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탁월한 캐스팅과 연기.


PS 3. 문어체에 가까운 부자연스러운 대사는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PS 4. 전종서의 연기는 이 영화의 결에 맞지 않게 참 별로였다.  


PS 5. 미장센, 오, 미장센!





위의 리뷰는 지난 2018년 7월 12일에 썼던 리뷰이다. 특히 진보진영에서 엄청난 비판에 시달리는 버닝과 이창동 감독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곳 미국에서 버닝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미국의 이곳저곳에서 올해 최고의 영화 탑 10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즐겨 듣는 미국의 팟캐스트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감명 깊게 본 영화 15편 중 한 편에 꼽았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오스카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에서 수상도 가능하다는 말이 미국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스티븐 연이 미 비평가협회 최우수 조연상을 탔다는 소식도 날아왔다.


웃긴 점은 미국의 평론가들조차 이 영화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를 못 한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의견이 분분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가 좋다"이다. 한창 이 영화가 욕먹을 당시 마음속으로 이창동 감독을 응원하고 지지했다. 이 영화는 그렇게 폄하당할 영화가 아니라고 믿어왔다. 꼭 이창동 감독이 오스카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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