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몹시 부르다, 그리고 더부룩하다.
재미있는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영화는 '나'가 개입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딱 내 얘기야"라고 느끼는 것은 두 말할 필요 없다. 비록 나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해도 영화에 푹 빠져서 캐릭터를 제삼자가 아닌 내 친구, 가족처럼 생각하며 그의 입장에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무서워하는 영화. 그런 영화는 어떤 앵글에서 커트가 어떻게 들어가는지, 조명을 어떻게 쳤는지, 어떤 배경음악이 깔리는지 분석하게 되지 않는다. 팝콘 먹는 것을 잊게 만들고, 2시간이 30분처럼 느껴진다. 내가 마치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어간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왜곡시키는 영화, 내게 별 5개 영화는 그런 영화이다.
내가 제일 재밌게 본 마블 영화는 <아이언 맨 1>, <어벤저스 1>이다. 이후 나온 영화들도 나름 재미있긴 했지만 제작이 거듭되고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될수록 재미와 흥미는 떨어졌다. 그들이 지키려는 목표가 지구를 넘어 우주의 평화로 확장되고, 얘는 사실 어떻고 쟤는 사실 어떻고, 스톤들이 어떻고, 이야기가 발전될수록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졌다. 회가 거듭될수록 강한 적이 나타나고 그에 발맞춰 더 강해지는 히어로들을 보면서 '드래곤 볼'이 떠올랐다. 그 모든 감상의 종합. '물린다'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이야기가 발전되고 고도화될수록 그 이야기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어지고 '타자화'되는 나. 남들은 점점 환호하고 기뻐하는데 나만 동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느낌. 이것이 그 이름도 거창한 MCU, 마블 세계관에 대한 내 감상이다.
마블 영화에서 점점 나 자신이 멀어지는 것은 사실 영화 산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기하급수적으로 덩치가 커지고 있는 거대 공룡 디즈니가 전 세계 영화판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느낌, 한국의 재벌에는 치를 떠는 한국사람들이 왜 전 지구적 재벌이자 '갑'인 디즈니는 사랑하는지.. 이런 영양가 하나 없는 회의감이 마블 영화에 대한 내 현자 타임에 부채질을 했던 것 같다.
마블 스튜디오, 루카스 필름, 20세기 폭스까지 건틀릿에 차례차례 스톤으로 끼고 있는 영화판의 타노스, 디즈니의 횡포는 차치하고, 오직 영화 <어벤저스:인피니티 워>의 내 느낌은 뭘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 떠올려보자.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보자. 최고의 스테이크는 배고플 때 먹는 한 접시의 스테이크. 그게 최고다. 진짜 맛있는 스테이크 스무 접시가 내 앞에 있다면? 몇 접시까지는 맛있겠지만 금세 물릴 것이다. 그게 <인피니티 워>를 본 내 느낌이었다. 한 영화에 정말 필요한 한두 명의 히어로, 그게 개별 히어로의 매력과 강점을 가장 잘 부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히어로의 화려한 등장, 그것은 너무나 휘황찬란하지만 화려한 전시효과는 곧 사라진다. 그들이 한데 모여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각 히어로가 가진 개별적 특성과 매력은 매몰된다. 그렇게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성이 쉽게 소모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생각하나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분위기를 봤다. 마치 2002년 월드컵 4강행과 같은 광란. 분명 이 영화에는 엉성하고 개연성 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나만 다른 영화를 본 것인가.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에서 그렇게 날카롭게 시나리오를 분석하던 냉철한 과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팔 한번 휘젓는 것만으로 행성 하나 가뿐히 가루로 만드는 타노스는 왜 그렇게 한낱 미물들과 투닥거리고 있는 걸까, 몇십 분씩 이어지는 그들의 싸움을 납득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없으니 지루함이 밀려왔다. 와칸다의 강력한 방어막을 맨몸으로 뚫는 괴물이 기관총에 죽는 건 어떤 사연인가. 그런 자잘한 허점은 미뤄두고 가모라와 타노스 부녀간에는 과연 어떤 속 깊은 정이 있기에 저런 눈물겨운 드라마를 펼치고 있는 것인가. 타노스는 가모라의 행성에 사는 인구의 절반을 죽이고 그녀의 어머니까지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가모라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히어로들의 스펙터클한 싸움을 보여주기에 바쁜 나머지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가모라와 타노스 간 관계 구축은 소홀히 했다. 한 스크린을 꽉 채운 히어로들. 그 스펙터클을 다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른 것인가. 영화란 그런 것인가.
지금 마블 스튜디오는 영화라는 예술 장르가 탄생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분야를 개척했다. 영화의 드라마화. 마블은 티브이에서만 존재하던 '드라마'를 극장으로 옮겨 '극장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일련의 영화는 마치 여러 캐릭터들이 만드는 독립적인 작은 이야기(에피소드)가 모여들어 하나의 통일되고 거대한 이야기 줄기(드라마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만든 마블의 업적은 정말 놀랍다. 그 어떤 제작자나 감독도, 그 어떤 배급사나 스튜디오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시도였다. 누군가는 이런 마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고맙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 현상이 영 마뜩잖다. 마블의 개별 히어로들이 어벤저스 안에서 매몰되고 소비되는 것처럼, MCU 안에서 개별 마블 영화들이 매몰되고 소비되고 있다.
디즈니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전 세계의 그 어떤 배급사보다 경제성을 우선시한다. 더 적은 편 수의 영화로 더 높은 수익을 올리는 효율성을 추구한다. 아무리 현대 영화가 예술보다 산업에 더 가깝다고 할지라도, 예술의 DNA를 잃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 어떤 예술도 할 수 없는 공감각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 장르이다. 디즈니는 영화에 효율성을 최우선 하면서 영화의 예술성을 지우고 경제성을 덧칠하고 있다.
나는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게 됐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이 영화 진짜 좋다", "이 영화는 내 인생 영화"라고 생각한 많은 영화들의 정보를 찾아보면 유독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예술/독립영화를 전문으로 제작, 배급하는 회사로 20세기 폭스의 자회사이다. 이 회사는 <28일 후>, <몽상가들>, <28주 후>, <원스>, <주노>, <슬럼독 밀리어네어>, <500일의 서머>, <내 이름은 칸>, <블랙 스완>, <트리 오브 라이프>, <디센던트>, <노예 12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버드맨>, <쓰리 빌보드>, <셰이프 오브 워터> 등을 제작/배급했다. 그렇다. 재미와 작품성을 당시에 성취한 많은 영화들이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졌다. <20세기 폭스>사는 거대 예산이 들어가는 상업 영화를 주로 다루고, <폭스 서치라이트>는 저예산의 예술/독립영화를 다룸으로써 상업과 예술을 동시에 추구하는 책임감 있는 사업 포트폴리오인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가 20세기 폭스를 인수하면서 폭스 서치라이트를 없앤다는 소리가 돌았다. 지금은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즈니 정도의 시장 지배력을 지닌 기업이라면 폭스 서치라이트 같은 회사를 없애기는커녕 디즈니 만의 예술/독립영화 전문 제작/배급사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익과 효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디즈니가 그런 비효율에 투자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어벤저스:인피니티 워>는 이익과 효율이라는 디즈니의 역량과 비전의 최정점에 있는 영화이다. 애초에 내가 좋아하기가 힘들다. 마블의 영화들은 거대한 목표를 향한 과정에서 소비되고 목표 속에 매몰된다. 영화 한 편 한 편은 그 자체로서 마땅히 존재해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련의 마블 영화들에서 세련된 겉모습을 한 자본주의의 포악한 이면이 보인다면 한낱 오락 영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