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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r 31. 2020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국의 교육 제도에선 절대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가 태어날 수 없을 거라고. 근데 과연 교육 제도의 문제일까요.


적어도 저에게는 교육 제도의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스티브 잡스는 일반적인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수능 교육을 강조하는 한국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있어도 그는 학과 공부 대신 컴퓨터를 파고들었을 겁니다. 디지털 고등학교를 가거나, 알바로 돈을 모아서 코딩 학원을 다니거나, 아니면 하루 종일 쳐박혀 유튜브로 코딩을 배우거나 했겠죠.




제가 생각하는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X어먹을 도덕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보이콧을 당하고, 신상을 탈탈 털리곤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는 나라죠. 멋드러진 강의나 지식인들의 토크쇼 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말합니다 한국은 '재기'를 용납하지 않고 '실수'를 봐주지 않는 차가운 나라라고 말이죠. 그런 문화, 사회구조가 과연 어디서 온걸까요. 가만히 보면 사회가 불평등하고 문제로 가득하다 불평하는 많은 개개인들이 사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타인의 실수/행동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경우를 흔하게 봅니다.


웃기는 건 마치 중세시대 수도사를 뽑는 것 같은 그 높은 도덕적 잣대가 오직 한국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유명인(유명인은 공인이 아닙니다, 공인은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유명인은 유명인일 뿐, '사인'일뿐입니다)의 음주운전 한 번, 대마초 한 번에도 나라가 뒤집어지는데, 해외 유명인에게는 어찌나 그 잣대가 관대한지. 이 모순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지. 만약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한국인이었으면 재기해서 <아이언 맨 1편>을 찍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만약 제작자가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던 그에게 역할을 맡겼다면 당장 인터넷 게시판이 난리가 나고 영화 보이콧 들어갔을 겁니다. 현업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아무리 그가 배역에 완벽히 들어 맞아도 굳이 다른 배우를 물색할 겁니다. 실수와 재기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과연 누가 만드는 거죠?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을 읽은 사람은 알고 있을 겁니다. 그가 얼마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리더였는지. 그에겐 타인의 인격 따위 안중에 없었습니다. 그의 세상은 온 지구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타인의 기분이나 인권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무자비한 CEO였습니다. 혼외자와 그 자식으로 넘어가면 얘기는 저 먼 은하계로 넘어갑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있었다면. 한반도의 성인군자분들이 그를 과연 가만히 뒀을까요? 여론이 진작에 마녀의 화형식을 치렀을 겁니다. 어쩌면 위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예에서 처럼 평판과 여론을 두려워한 이사진에서 그를 먼저 자를 지도 모를 일입니다. 천재가 과연 한국의 교육 제도 때문에 못 나오는 걸까요?




개인에게 매우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그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날라치면 무슨 맛집을 찾은 것처럼 메뚜기떼처럼 몰려들어 사회적 매장의 구덩이를 파고 밀어 넣는 이런 갑갑한 사회에서는 다양성과 천재성, 그 둘의 근원인 인간의 야수성이 발현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이면서 창의적일 순 없는가? 얌전하고 고분고분하면서 고정관념을 파괴할 순 없는 것인가? 다른 이를 불편하게,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천재적일 순 없는가? 타인을 다 행복하게,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혁신적일 순 없는가?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최대한 뇌의 에너지를 아끼는 방향으로 진화된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새로움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존재라고요. 나와 다름에서 오는 본능적인 이질감과 거부감, 주변이 바뀌는 것에서 따르는 피곤함, 귀찮음. 창의성, 다양성은 기준을 향한 도전, 사회가 '당연히 그렇다'라고 생각해온 일반적인 관념 즉 '관성'에 대한 도발입니다. 혁신은 기존의 틀을, 판을 뒤집어 엎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야수적인 아이디어, 당돌함, 태도는 언제나 사회를 불편하게,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 X어먹을 다수의 불편함을 한국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 화석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사고방식은 조건반사적으로 불편함과 생각의 관성을 도덕의 문제로 치환시킵니다. 그러면서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며 천재를 원하고 다양성을 원합니다. 미국의 다양성과 천재성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들이 지닌 문화적 포용성과 관대함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조금만 별난 옷차림의 사람을 봐도 눈을 흘기고, 누군가 조금만 '당연함'에서 벗어난 글을 올리면 '도덕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매장을 벌이고는 당사자에게서 기어코 사과를 받아내면 '정의가 승리했다' 쾌감을 얻는 사회. 천재가 나오지 않고, 다양성이 부족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과연 이게 교육 제도 탓일까요?

 



차이코프스키에게 변태적 성욕을 금하게 하면서 훌륭한 곡을 내놓길 바랄 수 있을까요? 클림트의 스튜디오에 나체 여성의 출입을 금하면서 그가 훌륭한 그림을 내놓길 바랄 수 있을까요? 남에게 상처 주지 말고 갑질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스티브 잡스에게서 혁신을 바랄 수 있을까요? 천재성은 새로움을 착상하고 실행하는 인물의 내재적 의식과 욕망의 총합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고, 나를 불편하게 한다고 잘라버리면 그 천재성 기능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고 맙니다. 마치 에런 튜링에게 화학적 거세를 하고 사회적 지탄을 받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인류의 사상을, 예술을, 삶의 지평을 넓히고 역사를 진보시킨 천재들은 다양성이 강처럼 흐르는 비옥한 사회에서 등장했습니다. 대부분 당대의 '정상인'이 볼 때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산 도발적이고 문제적인 인물들, 사회적으로 반대와 논란은 있을지라도 큰 틀에서 그 재능과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포용해주는 사회였기에 그들은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타인의 '비정상성'을 껴안을 수 있는 관대함을 지녔습니까? 혹시 '틀림이 아닌 다름'이란 깃털처럼 가벼운 수사를 외치면서 정작 이 사회가 '다름을 틀림'으로 경직시키는데 일조하는 메뚜기떼 중 한 마리, 혹시 당신은 아닙니까.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서 영화는 안 들어오고 잡(스)생각만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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