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대는 저물고 있는가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 단순히 대통령 한 명 만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전반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승천하기 시작해서 2차 세계 대전 직후 전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거대한 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미국의 금융 위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가며 전 세계로의 영향력을 확장한 중국. 트럼프 행정부 집권 이후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는 미국과 주요 동맹국 간 신뢰와 동맹. 기존 질서에 금이 가고 있는 지금, 좁은 틈새를 찾아다니며 틈을 파고 들어가고 있는 중국.

코로나 전염병과 관련해서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두둔하는 모습을 줄곧 유지했던 WHO, 그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지적한 트럼프의 성명.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이벤트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세계 질서에 큰 변화가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쯤 한방에 보낼 수 있다고 여전히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지금의 중국은 지난 1980년대 미국의 한 마디에 나가떨어졌던 일본과는 질과 양 모두에서 다릅니다. 엄청난 내수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 금융위기로 국내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이, 중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한 앞마당을 펼쳐 놓았습니다. 엄청난 경제 차관/원조를 담보로 각 국의 자원과 항구, 전기 등 인프라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트럼프의 가장 큰 잘못은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 국내 경제에만 매몰되는 과정에서 정작 미국의 가장 큰 힘이자 자신인 전세계적 네트워크와 동맹, 거기서 오는 막강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WHO 관련 이슈나 5G 네트워크와 관련해 국가 안보를 문제 삼으며 화웨이 사용 금지를 매우 적극적으로 독려한 트럼프의 요청을 끝내 거절하고 화웨이 장비 구매를 승인한 여러 주요 유럽 국가들의 예 등은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얼마나 줄어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20년, 아니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러는 사이 중국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같은 제3세계뿐 아니라 유럽 대륙에도 그 영향력을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미국이 지원을 끊거나 줄이고 있는 수 많은 국제 단체들에 대한 지원도 중국은 늘려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해도 이길 수 있다는 미국의 군사력도 옛말입니다.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십 년도 넘게 질질 끈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서 '악의 축'이라 비난하던 탈레반과 한 테이블에 앉아 협약을 맺고 초라하게 철수하는 미국을 보지 않았습니까.

미국 중앙은행은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기부양책을 쏟아냈지만 구조부터 흔들리고 있는 미국 경제에 아주 미약한 심폐소생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앙은행이 언제까지 전 국민의 호주머니에 돈을 찔러 줄 순 없는 노릇입니다. 늘어나고 있는 사망자와 별개로 이 사태가 조금만 더 장기화된다면 미국 경제는 지난 금융위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매우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될지 모릅니다. 과연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법처럼 미국 경제가 이전의 완전 고용률과 활황으로 원상복귀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계속 주춤거리게 될지.

출판된 지 꽤 된 책이지만 니얼 퍼거슨은 저서 '시빌라이제이션'의 후반부를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대 제국의 몰락에 꽤 할애하면서 로마부터 영국까지 세계를 정복한 제국의 몰락은 모두 '부채'와 과련 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미 엄청난 부채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일말의 죄의식'이나마 있었던 미국은 지난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그 죄의식의 족쇄마저 풀어버렸습니다. 지금 미국 정부는 무한대에 가까운 돈을 찍어내고 있습니다. 기축 통화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무한대로 찍어내는 일을 과연 전 세계가 밑도 끝도 없이 용납할 것인지. 만약 어떠한 이유(내부적 요인이든 내부적 요인이든)로든 그것이 더는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그땐 어떤 일이 발생할지. 그때 중국은 어떠한 움직임을 보일 것인지.

제가 너무 부정적인 모습만 보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