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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03. 2020

익스트랙션

이야기가 액션을 위해 복무할 때



부제가 전부입니다.

액션을 위해 존재하는 이야기, 그래서 공허한 이야기, 공허한 캐릭터.



많은 영화가 이야기와 캐릭터보다 액션을 내세웁니다. 화려한 볼거리. "저도 액션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요" 그런 팬의 한 명으로서 화려한 볼거리를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영화가 내세우는 그 화려한 액션이라는 씨앗은 이야기, 캐릭터, 연출이라는 세 요소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심어졌을 때 비로소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새로운 액션은 자극과 같습니다. 아무리 입이 떡 벌어지고 기상천외한 액션이라도 관객은 그 자극에 금방 익숙해집니다. 비슷한 씬이 계속되거나 반복되면 아무리 흥미로웠던 액션 연출도 곧 지루해집니다. 스크린에서는 주인공이 온갖 고생을 하고 총에 맞고 비행기고 로봇이고 자동차고 다 폭발하는데 "왜 계속 이것만 나와?" 하고 지루해하는 최악의 결과가 벌어지죠. 따라서 그 기상천외하고 화려한 액션은 양날의 검으로 기능합니다. 영화 내에서 관객의 역치를 한껏 끌어올리기 때문이죠. 높이 올라간 역치 때문에 이후 영화 속 웬만한 액션은 관객을 만족시키기 힘듭니다.


이야기와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관객은 감정을 이입하지 못합니다. 영화와 나를 분리시킵니다. 주인공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대신 팔짱 끼고 강 건너 '구경'하게 되죠. 구경꾼에게 흥미로운 액션씬은 곧 익숙해지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구경꺼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익스트랙션>이 바로 그렇습니다. 베일에 싸인 한 남자, 하지만 알고 보면 아픈 과거를 안고 있는 싸움 잘하는 주인공. 80년대부터 이어져온 흔한 설정. 하지만 영화가 얼마나 주인공에 애착을 갖고 캐릭터를 쌓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관객은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며 그들의 행동과 결정에 안타까워하고, 속 시원해하고, 속상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씬에서 동일한 소재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건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 영화가 캐릭터 구축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그의 속사정을 이야기하는 컷과 씬들이 있죠. 영화 시작 부분, 여자 리더와의 대화, 중후반 자신을 지켜 준 옛 동료 및 아들 인질과의 대화 등이 주인공 캐릭터를 구축하는 기능을 합니다. 중간중간 약을 먹는 것도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작은 설정(클리셰이긴 하지만)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 모든 건 너무도 형식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캐릭터의 행동과 극의 진행이 도식적으로 느껴집니다. 주인공의 행동과 결정, 그 모든 고생이 진짜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여기서는 이렇게 해서 관객한테 알려주고 여기서 한 번 더 속 마음 이야기하고"하는 식으로 작가의 장기판 위에서 움직이는 장기짝처럼 느껴진다는 거죠(안타깝지만 사실 이런 형식적이고 도식적인 전개와 캐릭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중후반 옛 동료의 집에서 주인공이 구출하려는 아이와 나누는 대화 장면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던 그 아이가 주인공의 가족사를 '꼬치꼬치' 캐묻던 그 씬. 주인공을 마치 인질범 대하듯 하던 그 아이가 주인공에게 어떻게 애착을 갖게 됐는지 둘의 관계 구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 더군다나 그 아이의 캐릭터 구축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둘만의 '내밀한 대화'는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자연스러운 소통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도식적 진행으로 느껴지는 이유이죠.





헐거운 캐릭터는 여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위 사진 속 오른쪽의 강인해보이는 남자. 초중반부터 주인공과 아이를 들들 볶는 저 사내는 왜 이다지도 아들에게 집착하는 걸까요. 무슨 이유가 있는지, 이 남자는 이 아이에게 어떤 애착이 있길래 이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을 내던지는 것인가, 그 결정의 동기가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인지, 아니면 돈 때문인지, 아니면 임무 때문인지, 또 다른 무엇이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익스트랙션>의 액션이 나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저기 공들인 흔적이 너무 드러나서 오히려 민망할 정도입니다. 중간에 보이는 롱테이크에서는 꽤 야심과 욕심도 느껴집니다. 하지만 제가 영화 리뷰를 쓰면서 여러 번 반복하는 말이지만 만약 액션만 좋다면 굳이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을 아깝게 보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예고편 보듯이 몇 분짜리 액션 장면 클립만 보면 그만이죠.


저는 결국 영화란 시각과 청각으로 이루어진 소설, 즉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물론, 반대하실 분도 있겠고, 어떤 영화들은 시각과 청각이 너무 뛰어나서 이야기를 잡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연출이 뒷받침 될 때의 이야기지만요). 저의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보며 도달하게 된 저만의 결론이기는 하지만 꽤 확고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눈 돌아가는 진기명기가 펼쳐져도 이내 그 모든 자극은 익숙하게 되고, 한번 자극에 익숙해진 내 수용체는 더 강한 자극이 들어오지 않는 한 지루함을 느끼던 그 숱한 경험들. 화려한 미사여구와 비싼 스타군단으로 치장하지만 결국 커다란 실망과 용두사미로 그치던 그 무수한 영화들. 하지만 반대로 캐릭터에 애착을 갖게 되면 별 것 아닌 액션이라도 몰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그럼 <존 윅>은 뭐냐? 그건 뭐 대단히 이야기가 있고 그러냐 반문하실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존 윅>은 뭐랄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장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전에는 없던 독특한 영화라는 점 하나는 분명합니다. 이야기는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물론 시리즈의 뒤로 가면서 뭔가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1편을 생각하면 정말 황당할 정도로 이야기가 없습니다. 영화의 홍보와 투자를 위한 한 줄 이야기 요약인 '로그 라인'이 진짜 영화 이야기의 전부인 영화는 <존 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황당합니다. 그런데 <존 윅> 속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캐릭터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짧게 짧게 캐릭터를 드러나는 컷이 강력해서 관객이 존 윅에게 애착을 갖게 만듭니다. 연출이 좋다고 해야겠죠. 하지만 <존 윅> 캐릭터 구축은 사실 캐스팅이 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키아누 리브스라는 독특한 배우가 캐릭터와 너무 잘 맞아서 마치 존 윅의 화신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존 윅>이라는 캐릭터가 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정말 기가 막힙니다. 마지막으로 <존 윅>의 독특한 세계관을 무시할 수 없죠. 낯설지만 매우 흥미로운 그 독특한 세계관. 이 조합은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어떤 캐릭터, 어떤 새로운 세계와 이미지가 나타날 지 관객을 궁금하게 만듭니다. 한 마디로 <존 윅>은 그저 단순하고 멍청하게 총질만 하는 액션 영화로 치부할 순 없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존 윅>의 액션만 말하지만, 그 수면 위 빙산으로 보이는 화려한 액션 밑에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존 윅>이라는 영화를 <익스트랙션>과는 달리 매우 흥미로운 영화로 만드는 것입니다(물론 동의하지 않을 분들도 있겠지만요).






결론은 <익스트랙션> 역시 홍수처럼 쏟아지는 넷플릭스 공산품 -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도식적인 영화 -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은 지 오래됐기 때문에 차라리 이 정도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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