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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Sep 10. 2020

<테넷>

난해한 설정에 눌린 캐릭터와 서사



<테넷>을 말하기에 앞서 <곡성>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관객의 혼을 송두리째 뺏어버리는 매우 힘 있고 강력한 흡입력을 지닌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어떤 생각도 할 겨를이 없습니다. 폭풍 같은 서사의 파도에 그저 몸을 내놓고 있을 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며 그때서야 영화를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제야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영화에 흠뻑 빠져 재미있게 즐겼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재미있게 영화를 즐긴 이라면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요소들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봤는지 등등 영화를 더 이해하고 감상과 생각을 나누고 싶은 욕망.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죠.






우리는 영화를 왜 보는가. 저는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재미있고 즐거우려고 영화를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와 즐거움이 항상 <극한직업> 식의 박장대소나 <트랜스포머> 식의 화끈함 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위험한 아이들>이 주는 감동도, <맨체스터 바이 더 시>가 주는 사회적 비판도,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 주는 음악적 쾌감도 모두 영화적 재미와 즐거움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르나 소재, 주제를 떠나 영화를 보는 동안 몰입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적 재미는 곧 몰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영화의 본질이며 영화를 보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관객(특히 한국)은 이 점을 간과하고 영화를 교과서와 같은 진리나 혹은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의 객관적 정보 전달 미디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적 재미보다는 사회적 메시지나 정보 전달에 천착하며 현실성이나 내적 개연성에 집착합니다. 물론 영화가 그런 사회적 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우선은 무엇보다 재미와 즐거움입니다. 영화는 짧은 러닝 타임 내에서 이야기를 압축시키고 서사적 재미를 전달하기 위해 많은 사실들을 변형시키거나 끼워 넣거나 빼는 등 왜곡이 흔히 발생합니다. 제발 영화는 영화로만 보세요. 정보 전달과 메시지를 찾으려면 논문이나 책, 다큐, 뉴스를 보세요. )






우리는 앞에서 좋은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말의 의미는 곧 관객이 영화에 흠뻑 몰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몰입 혹은 재미는 감독의 연출력과 서사의 흐름, 캐릭터 구축이 근간을 이룹니다. 그 세 기둥이 훌륭하게 수행될 때 관객은 캐릭터들에 공감하며 응원하고 슬퍼하고 긴장하고 즐거워합니다, 즉 영화에 몰입합니다. 영화의 소재, 주제, 설정, 장르가 무엇이든 그 세 기둥이 제대로 서있는 영화, 그래서 관객이 몰입하는 영화가 훌륭한 영화입니다(저의 이야기는 상업영화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난해함과 재미. <테넷>을 말하기 앞서 <곡성>을 말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테넷>은 매우 난해한 영화입니다. 난해한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요? 나쁜 영화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난해한 영화를 훌륭한 영화라고 착각합니다만 난해한 영화는 그저 난해한 영화일 뿐입니다. 그리고 난해한 영화는 곧 좋지 않은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제한된 러닝타임을 난해한 설정, 개념, 소재, 주제를 설명하는데 허비하느라 정작 집중해야 할 캐릭터와 서사를 놓치기 쉽거든요. <테넷>이 그러한 덫에 걸렸습니다. 난해함에 갇혀 이야기와 인물을 놓쳤습니다. <곡성>을 보고 그렇게 리뷰와 분석을 찾아보던 제가 <테넷>은 아무 리뷰도 분석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지 않았거든요. 





<테넷>은 세 가지 이유에서 그리 재미있는 영화도 완성도 높은 영화도 아니었습니다. 


첫째, 캐릭터와 서사. 볼거리는 훌륭합니다. 적어도 영화 전반 30분~1시간까지는 놀란 감독 특유의 규모 크고 생생한 액션 씬과 흥미로운 '인버전' 씬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입니다. 놀란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인버전' 세계관에 매우 심취한 듯 보였습니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서사를 촘촘히 엮는 대신 '인버전'에 깊이 빠져들어갔습니다. 인버전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는데 러닝 타임을 할애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주인공이나 캐릭터 들에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이던가요?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랐나요? 더군다나 두 명의 주인공이 중심이 되어서 끌고 가던 영화는 중후반을 넘기면서 한 명의 인물(애런 존슨)을 더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상당히 애매합니다. 그냥 한두 마디 하고 사라지는 듯 보이던 인물이 끝으로 가면서 의외로 큰 역할을 하는데 이 존재가 참 밑도 끝도 없습니다. 조연급에 해당하는 적절한 소개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나타나 꽤 큰 역할을 해내는 과정에서 인물의 구도가 흔들립니다.


둘째, 내적 완결성의 부재. 좋은 영화는 영화 외 다른 공부(!)를 하지 않아도 관객이 이해할 수는 영화입니다(물론 대단히 흥미롭고 완성도가 뛰어나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과연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요? 꼼꼼히 분석한 영상이나 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어려운 개념을 어렵게 만드는 건 쉽습니다. 게으르고 불친절하기도 쉽습니다. 정말 어려운 작업은 난해한 개념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죠. 굉장히 재미있고 훌륭하고 흥미로운 영화도 아닌데 공부가 필요한 영화. 학구열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나 놀란 감독의 팬이 아니라면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입니다.


셋째, 저급한 각본. 제가 영화 리뷰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개념이 "Show Don't Tell" 이죠. 배우가 구구절절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 개념이 문학과 영화를 근본적으로 구분 짓는 내러티브 방법이기도 합니다. 문학은 텍스트로 되어 있는 한계 때문에 캐릭터들의 입(혹은 작가)을 빌어 모든 걸 말해야 합니다(물론 분위기 묘사 등으로도 전달 가능하지만).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연기와 미장센, 음향 효과, 음악 등 다양한 영화적 내러티브를 통해 극을 진행하고 캐릭터의 의도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아무리 난해한 설정이나 소재도 이러한 영화적 내러티브로 풀어가야 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저급한 각본, 가장 게으른 각본이 바로 모든 걸 대사로 말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캐릭터들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영화는 영화적이지 못한 영화, 실패한 영화입니다. 


<테넷>은 그 지점에서 실패합니다. 연구원과 물리학 석사, 악인의 입으로 구구절절 설정을 설명합니다. 만약 어떠한 개념을 영화적 내러티브로 쉽게 풀어낼 수 없다면 그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 그 개념을 버리고 더 쉬운 개념으로 바꾼다. 둘, 그 개념을 잘 풀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작가를 고용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항상 각본에 약한 감독으로 지적받아왔습니다. 그리고 <테넷>에서 그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을 드러냅니다.






결국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에서 인버전 개념과 그 이미지에 집착하는 나머지 캐릭터와 서사를 잃었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신기하고 흥미롭기만 했던 인버전 씬들은 이내 익숙해졌고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캐릭터에 공감과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관객은 극에서 점점 멀어졌고,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난해한 말과 이미지는 관객을 극으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뜨려놓았습니다.



아마도 놀란 감독의 팬들이라면 <테넷>을 본 후 난해한 인버전 개념과 상징을 알고자 부단히 고민하고 많은 분석 리뷰를 찾아볼 것입니다. '깊은 공부(!)' 끝에 모든 정합성의 깨달음에 도달한 팬들은 이런 생각을 해낸 놀란은 역시 천재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팬이 아닌 대부분 일반 관객은 이 영화의 난해한 개념과 설정에 관한 공부(!)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재미가 별로 없거든요. 반면 <곡성>은 비록 영화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재미있습니다. 흡입력이 강력합니다. 그리고 그 재미로 인해 관객은 영화에 관해 더 알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스레 갖습니다. 또 <곡성>은 여러 리뷰를 보며 공부(!) 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나름의 해석을 내놓을 문이 폭넓게 열려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곡성>과 <테넷> 간의 차이입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배우. 주인공 '존 데이빗 워싱턴'이 과연 이 배역에 맞는 배우인지 의아합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 매력도 연기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요. 의외의 수확은 '로버트 패틴슨'입니다. <트와라잇> 이후 그저 그런 배우였던 그가 <테넷>에서는 스크린에 나타날 때마다 엄청난 존재감과 매력을 드러냅니다. <더 배트맨>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어서 예고편도 안 보고 있었는데 그의 존재감을 보니 갑자기 기대가 됐습니다. <테넷>은 <더 배트맨>의 마케팅용 영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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