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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14. 2021

탈코르셋이라는 망상

화려한 빛이 감싸는 한국 거리의 이면

페미니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은 탈코르셋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여성은 사회에서 정의한 여성스러움(예를 들면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고 날씬한 몸을 가지는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페미니즘의 하위 운동입니다. 그럼 왜 그들은 사회가 정의한 여성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여성스럽다'는 미적 관념 혹은 기준은 남성 권력 중심이고 남성이 만든 자의적 기준이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장하거나 머리를 기르는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는 '여성스러움'을 하는 일체의 행위를 "흉자(흉내 자X)"라고 부릅니다. 즉, 남성의 기준을 따르고 남성 권력에 부역하는 '남성적 행위', '여성에 대한 배신 행위'라는 거죠.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 여성스럽게 꾸미는 여성. 즉 "흉자 행위"를 하는 여성은 비난받아 마땅한 여성이자 아직 메트릭스의 진실에 눈 뜨지 못한 '네오'같은 존재인 것이죠.



네, 아마 여기까지만 읽어도 뜨악하실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탈코르셋'과 '흉자'는 현재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을 잘 보여주는 개념과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를 오직 억압과 피억압으로 구분 짓고,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언어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곧 '남성 혐오'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제는 그 본 뜻이 완전히 전도된 오염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혐오 세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 진정한 남녀평등, 남녀 모두 서로를 배제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평등을 위한 진화된 양성 평등 운동과 그에 걸맞은 새로운 언어가 나와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페미니즘을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탈코르셋은 물론 '흉자'라는 개념은 허무맹랑하게 들립니다. "뭔가 이상한데"싶지만 그게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려면 뚜렷이 그 반대 근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너무도 당연히 여겨왔던 것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이죠. 매번 나갈 때마다 화장을 하고 옷을 고르는 것이 귀찮아서 싫은 적은 있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남성 권력의 억압이기 때문에 싫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을 테니까요.




탈코르셋 개념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세계가 지닌 복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탈코르셋의 상위 개념인 페미니즘 자체가 포스트 모더니즘과 신마르크스주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에게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란 '억압과 피억압'의 이분법적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그 이분법적 세계관을 더 극단으로 밀어붙여 탄생시킨 기형적 개념, K-페미니즘이 바로 탈코르셋입니다.


그럼 이 기형적 개념이 무시한 사회적 맥락은 뭘까.



1.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끌린다. 

칸트는 아름다움으로의 이끌림은 '선험적'이라고 했습니다(그것의 탐구는 경험에 의하지만).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란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고 있는 속성이라는 것이죠. 인간이 아름다움에 이끌린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굳이 칸트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누구나 인정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누구의 얼굴이 "이쁘다"의 좁은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음악, 건축, 그림, 조각, 사진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총체적 현상을 모두 말합니다. 또한 이것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며 문명이나 도시 간 왕래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타 문명과 교류가 없는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외딴 원시 부족에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는 언제나 존재했죠. 그리고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 또한 아름다운 존재가 되길 "선험적"으로 원합니다.


탈코르셋이 비상식적인 말도 안 되는 논리인 이유, 그 첫째는 바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혹은 본능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 미니스커트를 사고, 볼이 복숭아 색인 화장법을 익히고, 매일 헬스장을 다니고, 샤넬 향수를 뿌리는 이유는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에게 복종"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늘따라 이쁘게 먹은 화장이나 머리 모양에서 내가 느끼는 만족감은 "억압에 대한 굴종"이나 "권력 집단에 부역"하는 데서 오는 피가학적 쾌락이 아닌 그것이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를 꾸미기 위함이 남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 드는 사람과 데이트하거나, 멋진 사람과의 교제 가능성을 높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함이지 '노예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2.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물론 홀로 자존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외딴곳에서 홀로 살다 죽는 삶을 "인간적인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프로그램을 많이 보신 분이라면 알 겁니다, 그들이 얼마나 외로움에 사무쳐하는지.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자연인들은 여전히 사회와 인연의 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이란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하나가 '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명이란 수많은 인간들이 어울려 살기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들고, 다양한 직업군이 생겨나고, 지식을 쌓고, 그것을 전파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등 거대한 사회를 이뤄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결과물의 총합일 것입니다. 아무리 미술을 그리고 조각을 남기고 자신이 지닌 지식을 책으로 남긴들 홀로 살다 죽는 인간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라고 부르기 힘든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타인과 관계를 이루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사회의 수많은 관계 그물 안에서 존재하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지닙니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호감을 얻는 데 있어서 물론 외모가 절대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능력, 유머, 도덕, 성격 등 다양한 요인이 있죠. 하지만 분명한 점은 나를 꾸미는 행위의 근저에는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 또한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모에 신경 안 쓰는 '공대남'이라고 해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외모에 관심을 갖습니다. 머리는 어떻게 하고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검색해보고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자신을 꾸밉니다(비록 서툴더라도;). 


우리는 어떤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판단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 하나, 사람을 처음 만나 판단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바로 첫인상이라는 것.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1분이 채 안 되지만 한번 자리 잡힌 사람의 인상은 그것이 바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첫인상이 외모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자세, 말투, 몸가짐, 심지어 냄새, 만남의 장소까지 대단히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지만, 외모가 첫인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윤리적으로 나쁜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물론 뭐든 과하면 문제지만). 외모가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진화심리학과 뇌과학이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 쉽고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사람은 아름다움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아름다워지면 더 많은 이들이 나에게 끌립니다. 그 끌림이란 개인적 차원에서 사랑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차원으로 보면 곧 좋은 인상과 호감을 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거나, 비즈니스를 하거나, 작은 가게를 할 때 등 사회 생활을 함에 있어 타인에게 좋은 인상과 호감을 준다는 것은 그 반대 케이스보다 훨씬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정과 호감, 사랑을 원하는 존재인 인간이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죠.


아무리 못된 짓을 하고 못나고 추해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인정받고 호감을 얻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이쁘게 갈고닦고 능력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외모를 갖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탈코르셋 운동은 외모와 아름다움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3. 사회에는 많은 약속들이 존재한다.

자신이 사회와 남성으로부터 억압받았다는 페미니스트의 '간증'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회 약속을 무시해서 돌아오는 비난입니다. 학교나 아르바이트, 군대나 직장 등 다양한 형태의 환경에는 구성원들이 정한 암묵적 약속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약속을 어길 때는 비난을 받습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약속을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탈코르셋'이란 이름으로 행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대부분 사전에 어떠한 친절한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멋대로, 자의적으로 행해집니다. 그리곤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여성을 탄압한다"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버리며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호소"합니다. 


TPO라는 말이 있습니다. 옷차림은 장소와 때, 경우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것을 번듯한 규칙이라고 부르지만 말이 좋아 규칙이지 사실 TPO는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 룰 혹은 에티켓을 그럴싸하게 개념화한 것일 뿐이죠. 아무튼, 변호사, 화장품 가게 점원, 카지노 딜러, 패스트푸드 점원, 선생님, 전자제품 대리점, 금융 컨설턴트 등 각각의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유형에 어울리는 어떠한 겉모습(꾸밈 혹은 외모)이 있습니다. 특히 이 '직업적 외모 코드'는 고객과 직접 만나는 서비스직일 때 더 중요해집니다. 갈래를 더 나눌 수도 있습니다. 같은 서비스업 내에서도 직원이 지녀야 하는 외모 코드는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나이키>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에게는 섹시함보다는 건강함이, 반대로 <빅토리아 시크릿>에서는 여성스러움이 직원에게 더 선호되는 덕목일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같은 스포츠 업계라고 해도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에 따라 건강미보다는 여성미를 더 강조하는 브랜드가 있을 수 있고, 속옷 업계에서도 섹시함보다는 편안함이나 건강함을 더 강조하는 브랜드가 있을 수 있죠. 이렇듯 직장인이라면 그가 속한 업태와 업종,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에 따라 천차만별 서로 다른 이미지를 지녀야하는 것이 직장생활에 따른 규칙입니다.


우린 자유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화장하기 싫고, 머리 기르고 싫고, 치마 입기 싫고, 여성스럽기 싫은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개인의 선택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가 무조건적인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과는 별개로 어느 사회든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구성원간 약속이 존재하며 그 약속을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여성스럽기 싫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외모에 어울리는 업종이나 회사를 택해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일하고 싶은 회사가 여성스러운 외모를 원한다면 그 회사의 룰을 따르는 게 이치에 맞는 행동일 것입니다. 이것은 남성 권력이 만든 억압이 아닙니다. 여성 CEO가 있는 화장품 회사, 의류 회사라고 해서 모두 노메이크업에 숏컷에 펑퍼짐한 바지를 입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 모두 따라야 할 자연스러운 사회적 약속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무시한 채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 결과 따르는 비난의 대상을 비상식적인 본인이 아닌 "여성" 전체로 멋대로 확대시키고 이것을 "억압"이라고 호도하는 행위는 여성의 인권이 아닌 사회 혼란과 남녀 갈등만 조장하는 행동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생각건대 탈코르셋을 선언한 여성들은 일상에서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까 합니다. 


"아, 이 옷 이쁜데, 잠깐, 이 옷이 "이쁘니까" 사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 그럼 가게에서 제일 안 이쁜 옷을 찾아야 하는 걸까?"

"안 이쁜 걸 사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이 셔츠가 너무 타이트한가? 그럼 굴곡이 드러나니까 여성미가 생겨나는 것일까?"

"요가할 때 레깅스를 입어도 되는 것일까?"

"잡티가 가려지는 선 블락을 사도 되는 건가?"


옷이나 화장품(을 산다면)을 살 때마다 자문해야 할 것이 끝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질문에 정답이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들이 피해야 하는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의 경계가 레고처럼 "이건 떼고 이건 남겨놔도 되고"하는 것처럼 딱딱 떨어지는 물리적 분절의 개념이 아닌 무지개처럼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며 이런 아름다움에 관한 혼란은 비단 외모 뿐 아니라 건축, 그림, 인테리어, 영상, 디자인 등 우리가 접하는 모든 시각적 경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에서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라는 인식과 기준 자체가 지배계급인 남성 권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기 때문이죠. 어디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외모에만 한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어불성설이죠. 그러니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곧 아름다움 그 자체를 피해야 하는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자동차를 살 때, 인테리어를 꾸밀 때, 필기구를 살 때, 에어비앤비 숙소를 구할 때, 책을 살 때 등등 일상생활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의 근저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페미니스트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매 순간마다 미적 요소를 따져보며 아름답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매 순간마다 나의 선택이 아름다움에 기반한 것인지 아닌지, 이 아름다움에 여성성이 있는지 없는지 아닌 지 따져야 하는 삶.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모든 걸 차치하고 탈코르셋 논리의 가장 큰 구멍은 남성이 외모를 꾸민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남성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외모를 꾸미는 남성들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대로 남성이 지배 계급이고 여성의 외모 가꾸기가 억압에 의한 거라면 남성의 외모 꾸미기는 어떻게 설명되는 걸까요. 게다가 요즘은 남성도 점점 화장을 하는 시대인데 이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까요. 남성들이 페미니스트화되는 과정인건가요? 탈코르셋의 논리와 주장이라면 외모를 꾸미는 남성 존재 자체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남성의 화장이 같은 지배계급인 다른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죠. 대부분의 남자들은 남자들끼리만 만날 때는 거의 꾸미고 나가지 않거든요. 하지만 반대로 여자들은 남자가 없는 모임에도 꾸미고 나가는 일이 많지 않던가요. 과연 이 꾸밈이라는 것이 누가 누굴위한 행위인가요.




이렇듯 탈코르셋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복잡다단 사회, 즉 다양한 생각과 욕구와 본능을 지닌 수많은 인간들의 역동적 집합체의 입체적인 측면을 무시한 채 오직 '억압과 피억압'이라는 권력 구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조금만 논의를 이어가도 금세 논리의 모순이 드러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페미니스트들 중 탈코르셋을 하는 이들은 각자 저마다의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배리나 씨처럼 처음에는 여러 시도를 해보다가 주변의 무시와 힐난에 포기한 사람도 있을 테고, 공대형들처럼 아예 처음부터 외모 꾸미기 자체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도 있을 테고, 아니면 그냥 꾸미기가 너무 귀찮은 사람도 있겠죠. 저는 탈코르셋이라는 개념이 다이어트에 지치고, 화장하기에 지치고, 이쁜 옷 사 입는데 지친 이들에게 근사하고 좋은 핑곗거리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여러 이유로 외모 꾸미기를 중단했는데 그게 나의 센스가 부족하거나, 게으르거나, 귀찮거나, 슬프게도 아무도 관심을 안 준다거나, 돈이 없어서라고 하면 내가 패배자 같은 생각이 들지만 "남성 권력에 대항한다"는 거창한 프레임을 짜는 순간 나의 '꾸미기 포기'가 갑자기 그럴싸한 여성 운동으로 승화되니까요.


저는 여성이 화장을 하던 안 하던, 치마를 입던 안 입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건 지극히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선택의 자유는 사회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 여행을 안 다니고,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을 안 하고, 주식 투자를 안 하는 행위들을 할 때 거창하게 '선언'하지 않는 것처럼, 외모를 꾸미지 않는 것 또한 마치 대단한 투쟁이나 혁명을 하는 것처럼 '선언'을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화장을 하지 않는 선택이란 주식을 하지 않는 것처럼 개인적 차원의 자유로서 지극히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둘째, 백보 양보해서 내 외모를 꾸미지 않는 행위를 사회적 통념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해도, 그 행위가 '탈코르셋'이라 지칭하는 대로 남성 지배권력에 맞선다는 생각은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장 안 하고 편하게 입고 다니는 것이 정말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용기 있는 행동인가? 천만입니다. 요즘은 편하게 입고 꾸미지 않고 다니는 여성과 남성들을 얼마든지 많이 봅니다. 그들은 그저 남의 시선을 게의치 않고 편하게 생활할 뿐입니다. 이런 격식이 사라지는 사회 분위기는 서구 사회처럼 '탈권위적' 방향으로 진행되는 한국의 변화 때문이지, 이것이 페미니즘 때문이 아닙니다. 지하철, 버스, 거리를 둘러보면 많은 이들이 편하게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성의 권리를 위하는 전사'라고 스스로 칭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던가요? 저는 오히려 요란하게 '선언'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분란을 일으키는 페미니스트보다 아무 말 안 하지만 편하게 자신의 스타일과 철학을 고수하는 여성이 훨씬 멋지며 그렇게 조용하지만 자연스럽고 자신감있는 행동이 오히려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많은 외국인들은 서울이 멋쟁이들의 도시라고 합니다. 여러 국가를 여행해봐도 우리나라처럼 멋쟁이 많고 옷 잘 입는 나라 정말 드뭅니다. 그것은 곧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만큼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말이겠죠. 한국 남성 화중품 시장이 미국 시장보다 더 크고, K-뷰티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고, 성형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 모두 남자와 여자 모두 한국 사회가 얼마나 외모에 치중하는 지를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의 탈코르셋은 거창한 페미니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더 깊이 내려가면 그 근본 원인은 사실 남녀 상관없이 외모를 무척이나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일종의 염증과 반발이 아닐까 합니다. 이쁘고 멋진 사람들로 채워진 화려한 거리, 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림자가 탈코르셋의 진짜 정체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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