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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Aug 10. 2021

<모가디슈>

한국 영화는 어쩌다 <의형제>에서 <모가디슈>로 역행하게 됐나.


<모가디슈>를 봤습니다. 여기저기서 볼 만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트레일러 한 편, 스틸 사진 한 장 보지 않은 채 접한 딱 한 줄의 로그 라인만으로 제 머리에선 이 영화가 총알이 빗발치는 모가디슈 시내를 어떤 '독재 타도'와 '우리 민족끼리'로 채울 지 그려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한국 영화에 당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국영화 + 역사물' 조합이라니요. 보지 않아도 어떻게 흘러갈지 얘기할 수 있어요. 몇 년 동안 한국 영화 헛 본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극장에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오직 극장만이 줄 수 있는 영화의 경험이 그리웠습니다. 영화 티켓을 받으면서 머릿 속에 있던 모든 편견과 이미지를 최대한 지우려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좋을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잡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객석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계를 지배한 영화 흐름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북한에게서 '적과 악'의 이미지를 탈색시키고 '친구' 이미지를 덧입히는 작업. 둘째, 시대물을 통해 민주주의를 우상화하고, 학생 운동을 미화하고, 군사 독재로 되살아난 한국 경제와 사회, 정치를 죄악시하는 작업. 셋째, 반일 작업. 한번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생각해보세요, <태극기 휘날리며>나 <연평해전>처럼 북한과 적으로 대치하는 영화가 몇 편이나 있었나요. 한국 전쟁 이후 부활한 한국 경제나 사회를 긍정적으로 그린 영화가 있던가요. 현재 한국 영화는 외세에 맞서 친구로 하나가 된 남한과 북한을 그립니다. 영화 속 한국의 경제와 사회는 온통 적폐와 부정, 이기주의로 가득 찬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반면 그 대척점에 선 이들은 개인의 이득 따윈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공의 선과 민주주의 만을 위하는 숭고한 존재입니다. 전후 현대사는 독재가 만들어 놓은 똥통이고, 그 똥통에서 '시민'과 '국가'를 건져 올린 주체는 '깨어있는 대학생'들의 혁명 운동 덕분입니다. 어떠한 입체성도 용납되지 않는 선형적이고 단순한 고전적 이분법.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런 작업들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단조롭고, 단순하고, 거칠고, 촌스러웠습니다. 항상 한반도에 위기가 발생하면 외세의 방해를 뚫고 남과 북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적으로 남한 내정에 간섭하과 일본은 주적(!)의 자리를 꿰찹니다. 한국의 정부 관료(특히 검찰)는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모습이고 그에 대항하는 인물은 숭고하게 '시민의 힘'과 '민주주의'를 외칩니다. 세상이 어디 그런 이분법이 다인가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역사적이고 전 지구적인 두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도를 정면으로 받아내야 했던 대한민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 힘들고 거친 시대를 관통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무수히 많은 과오와 실수, 부패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부정'이 있지만 또 어떤 부분은 시대적 소산인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튼 그런 부정만이 대한민국을 정의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떤 국가도 정의롭기만 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선하고 이타적이기만 한 인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국가와 개개인은 욕망을 지니기에 끊임없이 정의와 부정, 이타심과 이기심 사이를 오가며 존재합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부정들이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많은 정의와 가치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발현되었고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우린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영화는, 더 나아가 예술은 소재와 주제에 상관없이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언제나 믿어왔습니다. 제가 지금 한국 영화계에 갖고 있는 강한 불만과 불신은 하나입니다. 다양성의 상실. 그리고 그 다양성의 상실이 단순한 우연이나 이윤 추구를 위한 필연이 아니라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 다양한 사건과 소재, 주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고려, 조선, 한국, 소말리아, 시대와 시간을 막론하고 어느 소재를 가져와도 결국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로 수렴되고, 이런 맹목적인 수렴이 무한 반복되는 작금의 한국 영화계를 보면 세뇌와 선동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작품성 따윈 아랑 곳 없이 국가의 이익만을 위해 제작되는 중국 영화를 가리켜 '몰상식'하고 '저질'이라고 비난하지만 제 관점에서 대부분 한국 영화 역시 저질 중국 영화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치가 제작한 <의지의 승리>를 의도가 매우 위험한 영화라고 하지만 의도의 위험성과 불손함을 따지자면 <강철비 2>도 그 못지않게 위험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역사성이나 완성도에서 그 두 영화를 비교 선 상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일이지만). 북한에게 남한은 적화통일의 대상이라는 것은 1960년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시시떄때로 군사적 도발을 해오고,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을 살해합니다. 여전히 군사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고 여러 비대칭 전력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 영화에서는  한국의 지도자와 군인은 느슨하고 능력없고 허술하고 욕망에 가득 찬 반면, 북한 지도자와 군인은 '능력'있고 '원칙'에 충실하고 겉으론 차갑고 무서워보이지만 매우 '따뜻'한 존재로 대비시켜 부각시킵니다. 왜 이러는 거죠. 의도가 뭔가요. 예전에도 북한을 인간적으로 그린 영화들이 간간히 있었습니다만 그 반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과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가 부쩍 늘었고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 모두 동일합니다. 



지금 한국 영화는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을 해체하는 예술성이 아닌 중국이나 나치 영화처럼 의도가 다분한 영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관람을 하면서 아무리 순수하게, '우연이겠지' 생각하며 감독의 의도를 배제하려 노력해도 마치 "이래도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모를테야?"는 식으로 관객의 얼굴에 파이를 짓이기며 억지로 먹이는 듯 거칠고 직접적인 연출 기법을 반복하는 영화들에 질려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이데올로기를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하고, 학생 운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우상화하고, 우리 민족 끼리 힘을 합쳐 외세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런 영화를 보며 통쾌한 쾌감을 느끼겠죠.



한 때 <마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타짜>, <달콤한 인생> 등 상업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으면서 순수한 재미, 사회 비판, 인간 본성 해체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채롭게 펼쳐 내던 한국 영화계는 일방적인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잠식당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국 영화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변호인이었던 저는 이제 완전한 타인으로 돌아섰습니다.



<모가디슈>는 그 거대한 한국 영화의 흐름을 두 가지나 취하고 있었으니 그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는 소말리아 정부군과 경찰의 부패와 그들의 국민을 향한 수위 높은 폭력성, 그리고 그런 정부에 저항하는 이들의 화염병과 그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독재 타도' 구호를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포르노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나열되는 이런 장면들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우린 이미 이런 장면을 지겹도록 무수히 봐왔습니다. 한국 영화 속에 현대사를 다룬 영화 중 이런 장면이 빠진 영화가 있던가요. 이 영화는 통속적 재연의 반복을 넘어 소말리아의 분쟁이 어떤 양상인지, 현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시키는 아이디드 장군이 어떤 인물인지, 독재 이후 시민을 등에 업고 들어선 또 다른 독재가 어떤 악행을 자행하는지 등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소말리아의 특수성이나 역사적 맥락은 거세한 채 폭력과 시위의 피상적 모습 만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모가디슈>. 결국 감독이 던지는 메시지는 뻔합니다. 영화는 소말리아의 낯선 군중의 모습을 외피만 쓰고 있을 뿐 <1987>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2시간이란 긴 러닝타임을 지닌 이 영화는 그렇게 피상적 이미지와 메시지 전달에 치우쳐 정작 중요한 캐릭터 구축을 소홀히 합니다(한국 영화가 언제나 그랬듯).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종이 인형 같습니다. 살아있는 캐릭터라고 부를 만한 인물은 김윤석, 허준호, 조인성, 셋 뿐이지만 그마저 조인성 캐릭터가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는 상당히 긴 시간 스크린을 점유하지만 머리에 남는 건 건들거리던 안기부 요원 역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조악하게 연기하던 조인성의 모습뿐입니다.



이 영화는 좋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가능성이 엿보였습니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강한 힘이 느껴지던 후반부 자동차 탈출 장면은 근래 보기 드물게 긴장감과 신선함을 주는 카 체이싱 시퀀스였습니다(<반도 2>의 그 민망함을 생각해보세요. 카 체이싱만 놓고 보면 롱테이크로 큰 화제가 됐던 <익스트랙션> 보다 좋았다고 느꼈습니다). 수송기에서 내리기 전 남과 북이 헤어지는 씬은 인물 간 캐릭터와 관계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찡함을 전해줬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신파로 끌고 가지 않은 선택 역시 좋았습니다.



송강호, 강동원 주연의 2010년 작 <의형제>는 제가 정말 사랑하는 한국 영화 중 하나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매우 드물게 높은 시나리오와 편집, 연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제가 꼽는 이 영화 최고의 미덕은 우리가 북한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을 절제하면서 정확히 짚어 줬다는 것입니다. 백주 대낮에 자행하는 남파간첩의 암살 행위는 여전히 남한과 북한이 적대 국가이며 언제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한편 고정간첩의 힘든 생활과 가족을 매개로 한 국정원 요원과의 우정은 그럼에도 남과 북이 결국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줍니다. 영화는 그렇게 남과 북의 모순적인 긴장 관계를 억지웃음이나 신파 없이 담담히 그려냅니다.



<모가디슈>는 <의형제>처럼 멋진 영화, 재미있는 영화,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되는 감독입니다. 하지만 영화 내내 메시지 주입에 치중하는 이 영화는 인상 깊은 몇몇 장면만을 파편적으로 남긴 채 끝나버렸습니다. 2010년의 <의형제>와 2021년의 <모가디슈>, 비슷한 궤를 지닌 이 두 영화는 지난 10년 간 한국 영화가 어떻게 내리막을 걷고 있는 지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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