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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Oct 12. 2021

오징어 게임을 다 봤습니다.

왜 한국영화는 관객을 불쾌하고 진 빠지게 만들까.

지난 글에서 저는 오징어 게임을 1화 약 25분만 보고 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정말 놀랍도록 매일 온갖 외신에서 <오징어 게임>과 관련된 각종 기사를 쏟아내는 상황을 보고 있으니 뭔가 응아 싸고 뒤를 안 닦은 느낌. "내가 뭔가 놓치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애증"의 넷플릭스를 다시 틀었습니다.



결론. 1화 25분만 보고 가졌던 선입견은 (적어도 저에게) 사실로 확증되었고, 저의 K-콘텐츠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겨우 이 정도의 드라마가 이렇게 전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영화, 드라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초반의 조악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붕 뜨고 과장된 연극식 연기가 뒤로 간다고 나아질 리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기대한 사람이 바보겠죠.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바뀌지 않는 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날 리 없으니까요.



이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가 저를 가장 화나게 만들었던 부분은 마지막 기훈과 '깐부' 일남이 죽기 직전 했던 나눴던 대화입니다. 분명 <오징어 게임>은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사회비판극입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가 취할 수 있는 궁극적인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사회가 불평등하고 삶이 힘들어도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는 더 나아질 수 있어" 식의 긍정적 할리우드 스타일. 반대로 "이 사회, 사람들, 다 틀렸어. 다 죽어야 돼" 식의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적이고 염세적인 한국 스타일.



<오징어 게임>은 노골적인 대사와 자극적인 폭력 묘사를 통해 극 내내 후자의 태도를 견지하고 했습니다. 이정재가 마지막 결정적 순간 게임을 포기하면서 '그래도 세상은 아직 선함이 살아있어!', 긍정적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K-movie를 얕보지 마랏!" 식으로 동네 형 '상우'가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 디스토피아적 드라마는 결국 전형적인 '한국식 다크 사이드'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제의 일남의 임종 장면. 주로 일남의 대사로 채워져 있는 침대 씬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대단히 오랜 시간이 할애된 씬으로 극의 마지막, (지난 에피소드로도 모자라) 감독은 일남의 몸속으로 들어가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사를 통해 (매우 촌스럽게도) 직접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장면은 이 드라마가 달려온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결말로 기능하는 가장 중요한 씬 일터. 일남(=감독)은 기훈(=관객)에게 묻습니다. 그 아수라를 겪고서도 당신은 아직 사람을 믿느냐고. 일남은 계속 일장연설을 이어갑니다. 제 예상은 대충 이랬습니다. 일남이 비록 오랫동안 세상을 향해 부정적이었지만 기훈의 행동을 통해 생각이 달라졌고 결국은 세상을 향한 시선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이죠. 마지막 게임에서 상우의 죽음으로 기훈이 상금을 타긴 했지만 어쨌든 그가 마지막에 보인 인간적인 결단은 인간을 향한 믿음과 따뜻함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일남은 제 예상과 다른 충격적인 대사를 내뱉습니다. (네, 제가 한국 감독을 얕봤습니다).



"부자가 되니 세상이 재미가 없어. 그래서 마음이 맞는 자신의 고객과 이런 일을 벌이게 됐어. 근데 보는 것도 재미가 없더라고 그래서 직접 참여하게 됐어. 삶은 짧아. 너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



저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인간 이하의 짓을 꾸미게 됐냐는 기훈의 채근에 적어도 "게임이 잔인하다고? 거긴 사회의 축소판일 뿐이야", 혹은 "인간성이란 게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보고 싶었어", 아니면 "아무리 사회가 지옥 같아도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어"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재미가 없어서 이런 짓을 꾸몄다"고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여전히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태도를 고수하거나 "죽기 직전에서야 당신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태도를 선회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그럴싸하게, 마치 현명한 노인이 오랜 기간 응축된 삶의 지혜를 전수해주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고 일장연설로 감독이 관객에게 직접 전하는 메시지라는 것이 하는 "부자라서 삶에 재미가 없고,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매년 죽였다" 고요?



그 씬이 끝나고 극은 계속 이어지는데 하나도 눈에 들에 오지 않았습니다. 일남의 말을 통해 드러난 감독의 저급한 시선이 머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습니다. 곱씹을수록 더 불쾌하고 화가 났습니다. 많은 한국 영화들에 때론 불쾌하고 때론 분노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오징어 게임>에게 대단한 철학이나 담론을 바랐던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인간의 악함과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게 만든 그 이유가, 마치 감독 자신이 깨우친 삶의 지혜처럼 전하던 마지막 메시지라는 것이, "부자가 되니 삶이 재미가 없고 그래서 사람들을 죽여왔다" 니요. 저는 거기서 감독의 삶과 돈,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엿봤습니다. 8회에 걸쳐 그토록 많은 인물들의 고단한 삶과 고통을 드러내고는 그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며 도착한 종착점이 '재미'라고요? 제가 <오징어 게임> 1회 중간까지 보고 이미 불쾌했던 이유는 지하철역에서 공유가 이정재에게 돈을 주는 대신 뺨을 때리는 씬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간단하면서 다른 어떤 형태의 폭력보다 인간에게 가장 큰 모욕감과 굴욕감을 주는 폭력은 뺨을 때리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대가 없이 돈을 주는 대신 상대의 뺨을 때린다는 그 설정은 감독의 시선을 압축적으로 대변한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모든 살육의 파티가 극 중 말도 안 되게 허접한 VIP들의 재미 때문인 건 알겠어요 그건 극 중에서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감독이 VIP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오징어 게임>은 마지막 일남의 임종 씬 자체가 없었어야 합니다. 극 내적으로도 게임과 관련된 아무런 단서 없이 끝내는 것이 시즌 2를 위한 떡밥 차원 해서 더 유용합니다. 관객의 해석과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아 더 많은 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잔인한 폭력이 냉정한 사회의 비유라는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단순히 유흥으로 즐기는 VIP들의 행위를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로 단순히 치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일남(=감독)의 말이 그 모든 걸 망쳐버렸습니다.



단순한 부자들의 유흥 때문이었다면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이 짊어진 삶의 고통을 이렇게 이용했으면 안 됐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하면 안 됐습니다. 그 시체를 관에서 꺼내 장기를 적출하며 시신을 훼손해선 안됐습니다. 만약 끊임없이 이어진 잔인하고 혹독한 살인들이 "지금 이 사회가 이렇게 냉혹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었다면, 이 드라마의 끝을 일남(=감독)의 "재미" 발언으로 끝냈으면 절대 안 됐습니다. 그건 죽어간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극이 이어지는 내내 감독의 시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냉소와 자조가 느껴졌습니다. 기분이 몹시 나쁘지만 그러려니 생각했습니다. 그게 요즘 한국 영화의 전형이니까요. 제가 진짜 불쾌하고 화가 났던 건 감독이 극 내내 자신의 시선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노골적으로 일남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황동혁 감독은 사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신해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듯 보였지만 "재미" 발언을 통해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결국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남이 게임 참가자들을 자신의 재미를 달래 줄 도구로 봤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도구화'가 <오징어 게임> 뿐 아니라 지난 수년간 한국 영화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을 살육하는 잔인한 폭력을 그리고 싶다면 스릴러나 공포의 장르에만 천착하면 될 일입니다. 저는 그런 장르물로서의 폭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장르물에서는 실제 사회와 영화를 구분 짓고 이건 영화일 뿐이다 명확히 정의 내린 세계관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 비현실적 세계관 속 캐릭터는 오롯이 영화적 캐릭터로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 고발극은 전혀 다릅니다. 한국영화는 어떤 장르를 차용하든 영화의 세계관을 현재 우리 사회로 배경을 설정합니다. 영화 속 인물을 명백한 가상의 영화적 캐릭터가 아닌 실제 존재하는 누군가의 소중한 친구, 아빠, 엄마, 동생으로 설정하고 인물의 많은 면을 보여주면서 관객의 연민과 동정을 삽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한 잔인한 살인과 폭력, 그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고통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아주 차갑게, 별 대수 아니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립니다. 한국 영화를 보고 나면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치는 이유가 바로 그 이유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캐릭터들을 다루는 감독의 태도입니다. 그들에 대한 따뜻함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잔인하게 죽이며 극의 전개를 위해, 영상 스타일을 위해, 감독의 메시지를 위해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그러면서 감독은 사회를 비판하는 모순의 아이러니, 그것이 현재의 K-콘텐츠입니다. 제가 점점 한국 영화를 멀리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폭력의 방식과 억지 전개,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면서 들이미는 메시지. 그 모든 것이 몹시도 불쾌합니다.



K-콘텐츠의 천편일률적인 사회비판 텍스트의 모순과 아이러니는 영화가 대단한 대의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정작 등장인물과 영화 속 세계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전혀 따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장치로써 살인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살인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입니다. 한국 영화가 그리는 날 것 그대로의 적나라하고 잔혹한 살인과 폭력 장면들을 보면 "이 감독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사람뿐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 한국 사회는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정하고, 이기적이고, 불신이 팽배하고, 돈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입니다. 대부분 감독들의 인간과 사회를 향한 시선은 체념적이고, 허무주의적이고 염세적입니다. 비판을 위한 부조리 묘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비판과 묘사의 지향점은 결국 인간 존중과 더 나은 사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 속 자극적인 영상에서는 어떤 생명의 존중, 인간의 존엄, 공동체적 가치 등에 대한 고민이나 고찰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폭력과 부정 묘사를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거 뭐 진짜 사람도 아니고 영화 속 인물인데 어떠냐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세계관은 가상의 시공간이지만 엄연한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안을 채우는 인물들 역시 가공의 인물이지만 그 시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관객은 그 세계를 관찰하고 경험하는 참여자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린 현실에서 절연돼 가상의 공간으로 안내됩니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마치 내가 실제로 아는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게 됩니다. 만약 그런 인물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면? 그런데 그 과정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아무런 존중이나 애착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세계관 속 모든 인물들이 그런 식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약육강식의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사회라고 끊임없이 주장한다면? 만약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영화의 세계관이 그렇게 부정적이고 염세적이라면? 제가 우려하는 건 감독이 영화 속 인물을 도구화하는 이런 시선과 방식이 한국 사회 전반에서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그런 '생명 존엄과 공동체 가치의 결핍'에 더해서 '돈'을 향한 천박한 감독의 시선까지 더해졌습니다. 부자들은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고요? 어떤 것을 사고 즐겨도 즐겁지가 않다고요? 삶의 목적이 소비와 향락이 다인가요? 이 세계에는 많은 돈과 영향력을 더 좋은 사회, 자신이 꿈꾸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부자들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그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지만 변화를 실현시킨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합니다. "돈이 많으니 삶이 재미가 없다"는 할아버지의 대사에서 제가 느낀 건 건물주로 매달 쉽게 돈 벌면서 겨드랑이에 일수가방 끼고 하루를 커피숍과 골프장, 술집을 전전하며 보내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양아치들의 삶이었습니다. 돈을 향한 이런 세계관이란 얼마나 천박하고 빈곤한 구시대적인 발상입니까. 8회에 걸친 소중한 인물을 향한 이 모든 무차별적 살인과 폭력이 고작 천박한 사고 때문이었다니. 저는 그런 감독의 발상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미디어에 나오는 사소한 이미지 하나, 말 한마디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상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하다며 오래된 유명 애니메이션의 '인어'가 흑인으로 바뀌는 세상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미디어 속 이미지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한국의 미디어와 영화를 채우고 있는 잔인하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이고 천박한 세계관에 대해 고찰해봐야 마땅합니다. 천편일률적으로 한국 사회를 이기적인 인간들의 약육강식 정글로만 그리고 그 어떤 가치보다 돈이 최우선이라고 그린다면, 그런 미디어가 혹시 한국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비판의 외피를 쓰고 반복되고 있는 부정적적인 사회 묘사가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대한민국 사람들, 전 세계의 그 누구보다 영화라는 픽션을 진지하게, 진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아닙니까.



PS. <오징어 게임>을 다 보고 나니, 이런 드라마가 전 세계적 히트를 친다는 게 더욱 께름칙합니다.


PS. 위에서 언급한 부분 외에 이 드라마가 가진 불균질성이나 감독의 취향에서 묻어나는 B급 영화의 냄새 등 흥미로운 부분들이 여럿 있지만 다 언급하려면 정말 많은 분량의 글이 나올 것 같아서 이야기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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