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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Nov 15. 2021

레드 노티스

순수한 오락 영화가 주는 재미와 미덕



레드 노티스는 별거 아닌 영화입니다. 영상 작법이나 내러티브, 캐릭터까지 새로울 거 하나 없는 하이스트 & 버디 무비죠. 영화의 전체적인 영상이나 구조, 흐름을 보면 <다이 하드>, <더 록> 류의 1990~2000년대 초반의 전형적인 할리우드 상업 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스튜디오의 주문과 오락 영화 문법에 충실한 전형적인 직업 감독의 작품 혹은 "제품". <1917>, <듄> 같은 거대함도 <기생충> 같은 사회 비판과 담론도 좋지만 제가 기다린 영화는 이런 영화입니다. 뻔하고 남는 거 하나 없지만 가볍게 소소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


이런 영화를 우습게 볼 일은 아닙니다. 비록 야심 없고 소소한 영화지만 소소함과 재미는 별개. 오락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금방 뚝딱 만들 것 같지만 "시대와 남녀노소를 초월"해서 즐거움을 주는 오락 영화를 꼽아보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냐, 오락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캐릭터가 전형적이고,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익숙한 캐릭터로 어떻게 끝날 지 뻔히 알고 있는 영화가 러닝 타임 내내 관객의 이목을 붙잡는 일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죠. 조금만 삐딱선을 타면 바로 아무도 찾지 않는 비디오용 영화로 전락해버리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오락 영화와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의 구분선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죠. 어쨌든, 오락 영화에서 거창하게 "시대 초월성"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저 러닝 타임 동안 세상 시름 잊고 즐거울 수 있는 '만만치 않은 작업'을 훌륭히 수행했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런 면에서 <레드 노티스>는 어느 하나 모나거나 부족한 것 없는 육각형 밸런스를 자랑하는 훌륭한 오락 영화입니다. 


캐스팅:

라이언 레이놀즈, 더 락, 갤 가돗 캐스팅이 대체 불가할 정도의 완벽함은 아닙니다. 그 자리들을 어느 배우가 대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나름 여러 배우가 떠오르니까요. 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와 세 배우가 지닌 특유의 캐릭터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캐스팅을 염두에 둔 것처럼 훌륭하게 잘 매칭 됩니다. 


시나리오와 편집, 액션 연출:

어느 하나 사족처럼 늘어지거나 너무 짧게 느껴지는 시퀀스나 씬이 없었습니다. 모든 장면과 대사가 모두 나름의 의미와 이유가 있었고 있어야 할 자리에 필요한 만큼 적절하고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죠. 야심 없는 영화가 다 좋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런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몸에서 힘을 뺌으로써 자기 객관화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객관화는 적절한 균형의 영화로 이어질 확률을 높입니다. 반대로 몸에 힘을 너무 줘서 균형이 무너진 영화의 사례 중 하나로 <익스트랙션>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토르'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익스트랙션>은 엄청난 액션 시퀀스로 큰 화제가 됐던 영화입니다. 하지만 몇 번의 롱 테이크 액션에 심하게 매몰된 나머지 액션에 모든 공력을 올인하고 산화해버린 안타까운 케이스입니다. 캐릭터 묘사도 서사 흐름도 좋지 않은데 액션에는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매우 불균질한 영화로 전락해버렸죠. 이런 불균질한 영화는 요즘 흔하게 생산되고 있는 '화려한 트레일러가 전부인 떡밥 영화' 혹은 '10분 남짓되는 유튜브 리뷰 전용 영화'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레드 노티스>가 좋은 오락 영화라는 건 어느 하나 튀는 구석 없이 러닝 타임 내내 모든 캐릭터, 대사, 이야기 흐름이 마치 적당히 따뜻한 죽처럼 술술술 막힘없이 잘 넘어간다는 거죠. 





효과적인 코미디와 감독의 연출:

코미디에서 대사, 특히 펀치 라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물들이 대사를 티격태격 주고받다가 마지막 날리는 한 마디인 펀치 라인은 코미디의 화룡정점입니다. 배우 간 액션과 리액션도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 펀치 라인이 어색해도 그것을 받아내는 상대방의 리액션이 좋아서 죽은 펀치 라인에 인공호흡을 시키는 경우도 많죠. 펀치 라인도 상대의 리액션도 좋지 않으면 그 씬이나 컷 전반이 김 빠진 콜라처럼 확 가라앉습니다. 그런 김새는 컷이 반복되면 영화의 리듬이 자주 끊기면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어느 지점부터는 그런 좋지 않은 코미디 요소가 관람을 심각하게 방해하게 되죠. 


<레드 노티스>의 펀치 라인은 배꼽을 움켜 쥘 정도의 빅 재미는 아니지만 피식피식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소소한 재미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코미디의 시작점은 라이언 레이놀즈인데 그 특유의 능구렁이 코미디도 좋지만 더 락과 갤 가돗의 리액션이 워낙 좋아서 그들의 리액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영화 전반에서 흐르는 이런 소소한 재미는 관객으로하여금 점점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고 캐릭터들을 애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무겁지 않고 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배우들의 개인기도 개인기이지만 저는 감독의 연출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모든 배우들은 자신의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각 씬과 컷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몫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졌거든요. 이런 TV용 오락 액션 영화에 대배우들이 등장하면 감독이 배우나 스튜디오에 눌려 영화가 전체적으로 어그러지기 쉬운데 이렇게 영화가 전반적으로 균형을 잘 잡으면서 대배우들의 캐릭터를 잘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감독이 연출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방증이겠죠. 프로듀서의 역할도 꽤 크겠지만요.



이 영화는 친구들과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유쾌하게 떠들면서 즐기기에도 좋고, 딱히 할 것 없는 연인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고, 온 가족이 모여 즐기기에도 좋은 영화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영화가 많았던 예전에 비해 요즘은 이런 영화가 매우 드뭅니다. 최근 액션 오락 영화, 더 나아가 전반적인 영화계의 큰 그림을 보면 오락 영화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마블이나 DC 프랜차이즈 영화는 이미 많은 시리즈가 진행된 탓에 지난 이야기와 흐름을 모르면 재미없는 수준까지 오게 됐고(그래서 그런 부분을 뛰어넘으려고 마블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니면 오락 영화의 액션 수위가 생각보다 너무 높고 잔인해서 불편한 경우도 많죠. 또 많은 영화들이 오락성에 애매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버무리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맹물 같은 영화로 전락하거나 아예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거부감이 들거나 너무 무거워지기도 하고 이 영화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영화가 되어버리는 케이스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저 하루의 스트레스를 잊고 싶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영화를 찾는 이들이 마땅히 볼만한 영화가 없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지금의 거장들이나 사회비판적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 조차 그들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입문하게 된 건 모두 과거 재미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랐기 때문이지 사회고발 영화를 보며 의협심을 길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부담 없이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가 많이 사라진 지금, 고전적(!)이면서 순수한 오락 영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을 고스란히 주는 <레드 노티스>는 적어도 저에게는 의미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는 영화가 교과서나 뉴스가 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고 해서 그 영화가 사실을 전달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생각은 없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역사적 사건이란 왜곡과 오류 투성입니다. 각색과 각본 작업을 통해 작가의 왜곡을 거치고, 그 시나리오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스튜디오의 왜곡을 거치고, 연출과정에서 감독의 왜곡을 거치고, 현장에서 배우의 왜곡을 거치고, 편집과 영상, 음향 등 후반 작업을 통해 다시 왜곡을 거치게 됩니다. 이 모든 프로세스 체인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왜곡들은 악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영화의 본성입니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인 영화는 긴 시간 동안 관객의 흥미를 끌어야 하기 때문에 서사의 중심에 재미와 흥미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건의 많은 부분이 삭제되거나 상상력이 더해지거나 특정 사실만을 강조하기 마련입니다.


무서운 점은 그 기다란 사슬에서 발생하는 이 일련의 왜곡들이 '재미'가 아닌 특정 정치 사회적 목적을 지니게 되는 순간 영화는 강력한 '선동' 도구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뉴스처럼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닌 재미와 흥미, 감동의 서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화가 그 어떤 플랫폼보다 무섭고 위협적인 선동 도구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과거 독일과 소련이 그토록 영화에 집착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죠. 그들은 선동의 힘과 그 플랫폼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간파했습니다(사실 과거 소련에서는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전방위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위해 봉사해야 했습니다). 


영화를 본다면 화면에서 보는 모든 건 그저 재미로 받아들이세요. 영화 시작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자막이 뜬다고 해서 자세를 고쳐 앉거나 하지 마세요. 릴랙스 하게 드시던 팝콘을 그대로 계속 드세요. 그냥,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수준으로만 가볍게 받아들이세요. 스크린을 통한 서사에 수많은 왜곡이 있었음을 잊지 마세요. 만약 그 사건이 흥미로웠다면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서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와 책을 찾아보세요. 애초에 무언가를 배우고 얻기 바란다면 극장에 가는 대신 도서관에 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저는 그것이 현대사회에 필요한 성숙한 시민 의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판도라> 같은 악의적인 선동 영화 제작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ps. 영화 전반에서 갤 가돗의 연기가 좀 붕 떠있는 감이 없잖게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갤 누나의 매력은 역시는 역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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