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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y 24. 2022

범죄도시 2

판을 뒤엎을 것인가 신명나게 놀 것인가


전혀 기대하지 않고 봤던 <범죄도시 1>는 정말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요즘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탄탄한 이야기,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여준 흔치 않은 웰메이드 오락영화였죠.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점은 풍부한 캐릭터였습니다. 거의 매번 한국 영화 리뷰를 쓸 때마다 제가 되풀이했던 말이 "한국 영화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다"였는데 보기 좋게 극복했죠.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영화 속 형사 마석도는 딱 붙는 쇼트트랙 유니폼처럼 마동석 본인에게 딱 맞는 아주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습니다.



언젠가 이동진 기자는 영화 속 좋은 캐릭터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캐릭터는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 "이 영화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일을 겪게 된 걸까" 등등 말이죠. 어떤 영화의 속편이 나오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런 관객의 상상력을 충족시켜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이거 속편 나오겠네" <범죄도시 1>을 보고 처음으로 든 이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캐릭터의 힘이 가장 컸죠. 비단 마석도 뿐 아니라 좋은 캐릭터가 참 풍부한 영화였습니다.






<범죄도시>는 사실 <공공의 적>, <베테랑>과 궤가 유사한, 거의 같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악당과 대결을 벌이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두 영화의 주인공 역시 강하고 매력적이죠. 하지만 그들에게 없는 한 가지. '마블리'. 거대하고 육중하지만 슬쩍슬쩍 드러나는 귀여움, 그 양가적인 면이 비현실적인 파워에 실려 악당들을 날려버리는 형사 마석도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설경구), <베테랑>의 서도철(황정민)에게선 볼 수 없는 풍부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지닌 인물입니다.



많은 액션 영화의 공통점 중 하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시퀀스에서 영웅과 악당 두목이 멀쩡한 총을 버리고 벌이는 맨손 격투씬입니다(혹은 딱 그때 총알이 다 떨어지거나). "굳이" 그러는 이유 중 하나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관객의 분노를 유발했던 악당이 총알 한 방으로 쓰러지는 건 너무 허무한 일이죠. 흠씬 두들겨 맞는 악당을 보며 관객은 대리만족과 함께 희열을 느낍니다. 굳이 멀쩡한 총을 내려놓고 벌이는 맨손 격투는 액션영화의 클리셰적인 장치입니다. 그 폭력의 카타르시스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마석도 만큼 짜릿한 희열을 준 캐릭터가 한국 영화에서 또 있었나 싶습니다. 분명 현실적인 조폭-형사물인데 히어로적인 파워를 아주 살짝 가미한 마석도 캐릭터가 뿜어내는 액션 쾌감! 한국 영화를 떠나 할리우드를 생각해봐도 맨손 격투에서 이렇게 짜릿한 쾌감을 준 캐릭터가 있을까 싶습니다. 할리우드에서 마석도와 가까운 캐릭터를 뽑자면 '더 락' 정도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 락의 액션이 우악스럽게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면 마석도의 액션은 말그대로 타격이 터져나올 때 주는 쾌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감독의 연출도 칭찬해줘야겠죠. 어쨌든 마석도는 영웅과 악당의 '비등비등한 파워'에서 오는 아슬아슬 심장 쪼이는 쫄깃함은 없지만 대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경이로운 힘으로 압도해버리는 희열을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저는 <범죄도시>의 속편을 기대했고, 역시나 곧 속편 제작 소식이 들렸습니다. <범죄도시 2>의 시사회 평이 상당히 좋고 8편까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제 기대는 높아져만 갔죠.






결론부터 말하면 전 <범죄도시 1>이 더 좋았습니다. 첫째, <범죄도시 2>는 유머가 뭐랄까요, 내가 방금 분명 웃었는데 웃은 내 자신이 좀 멋쩍은 걸쩍지근한 상황(!)의 반복. 꽤나 유머가 억지스러운데 분위기와 캐릭터 자체가 유쾌해서 그 유쾌함에 그냥 나도 "허허허~" 휩쓸려가는 느낌? 그리고, 사실 이 부분이 제일 큰 것 같은데, 제가 <범죄도시>에 워낙 호의적이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긍정적으로 이 영화를 보고 있어서 웬만한 상황도 그저 너그럽게(!) 웃어주는 느낌. 어쨌든 분명 제 머리는 이 유머와 상황들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입은 웃고 있는 처음 해보는 특이한 경험이었습니다. 



둘째, 악당 캐릭터도 저는 강해상(손석구)보다 1편의 장첸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상황은 충분히 현실적이고 좋은데 강해상 캐릭터는 조금 억지스럽달까요, 무자비함, 특히 '장첸'과 비교해서 더 무자비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과하게 보였달까요, 앞뒤 안 가리는 폭력을 굳이 전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셋째, 배우들의 연기가 전반적으로 모두 붕떠있었습니다. <범죄도시 1> 역시 살짝 뜬 감이 없잖게 있었지만 코미디적인 요소들을 감안했을 때 수긍이 가능한 수준.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워낙 잘 잡혀서 "저 인물은 실제로 저렇게 행동하겠다" 납득을 주었던 반면, <범죄도시 2>는 영화 속 인물들이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 모두 힘을 바짝 끌어올려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많은 장면들에서 '대학로에서 촌극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죠. 이런 연극적인 과한 인상은 <극한직업>에서 '극한'까지 경험했었드랬는데, 차라리 <극한직업>은 작정하고 코미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해서(영화 끝부분 갑자기 소파가 나오고 <영웅본색> 음악이 흐르던 부분은 근래 보기 드물게 약을 빤 설정이었죠) 나름 괜찮았던 반면, <범죄도시 2>는 코미디와 심각함이 만드는 부조화가 꽤나 컸습니다. 배우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커다란 스크린에서 이런 식의 과한 연기를 보는 건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대사라도 억양과 톤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단 1초의 불필요한 컷으로도 짜게 식을 수 있는 것이 코미디입니다. 절제와 감각이 정말 중요한 장르죠. 감독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1편과 2편의 감독이 다르네요(연출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넷째, <범죄도시 1>이 주어진 러닝타임 내에서 액션 뿐 아니라 캐릭터 하나하나 살뜰하게 챙긴 속이 꽉 찬 영화였다면, <범죄도시 2>는 마석구에 올인하고, 저기 조금 멀찍허니 강해상이 있고, 그 외 인물들은 변두리에 곁가지로 있는 영화입니다. 대부분 캐릭터들이 꽤나 소외되어 있죠(그래서 그 빈약한 시나리오를 채우려고 더 오바스러운 연기를 시키나 싶기도 하고). <범죄도시 1>은 단순한 액션 영화치고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두 축 마석구, 장첸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 악당 캐릭터만 장첸의 오른팔과 왼팔인 위성락과 양태, 조금 얼빠진 악당 황사장, 도승우, 장이수, 독사까지 6명이나 됩니다. 거기에 강력반 팀원들도 4~5명 정도가 있죠. 그 많은 인물들이 배분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서사에 꼭 있어야 할 중요한 인물들로 그려집니다(심지어 몇 분 나오지도 않는 분식집 아이 '왕오'까지 중요한 축을 담당하죠). <범죄도시 1>의 모든 찬사가 간판인 마동석에게 돌아갔지만 사실 칭찬은 촘촘하고 탄탄한 이야기로 풍부한 캐릭터들을 구축한 시나리오와 감독의 연출에 가는 것이 더 마땅합니다. 이런 많은 캐릭터들을 모두 매력적으로 그린 영화는 정말 드뭅니다. 그나마 생각나는 영화라면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 공교롭게 모두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네요. 그 시절의 최동훈은 정말 최고였습니다ㅠㅠ. <범죄도시 1>에서 마동석이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모든 캐릭터들이 조화를 이뤄 아주 좋은 화학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죄도시 2>는 스포트라이트를 마석구 외 다른 인물들이 소외되는 바람에 이야기의 직조가 꽤 헐겁고 단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 2>는 상영시간 내내 시계를 보지 않게 만드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지난 1편에 비해 여러 단점이 있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마석구라는 캐릭터의 잠재성을 파악한 후 그 캐릭터를 빛나게 하기 위해 집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범죄도시>를 프랜차이즈로 이어갈 장기적인 포석에 맞춘 다분히 전략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요, 마석구의 괴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서 그 파괴력과 존재감에 공력을 집중했습니다. 그에 따라 액션씬도 더 늘어났고 더 파워풀해졌습니다. 더 강력해진 마석구만 만나면 악당들이 여기저기 날려지고 기절하기 바쁘지만 그 비현실성의 정도가 꽤 나쁘지 않습니다. 현실과 비현실 간 절묘한 줄타기를 잘했달까요. 확실히 한국영화가 맨손 격투씬 촬영은 참 잘 합니다. 이정재, 황정민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 워크와 속도 조절이 과했다면 <범죄도시 2>의 긴장감과 박력은 딱 좋습니다. 액션이 펼쳐지는 동안 아무 생각 안 들고 바짝 긴장한 채로 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에게 최고의 맨손 격투 액션 영화는 여전히 <아저씨>입니다. 동서양의 모든 액션을 통틀어 간결함과 효율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원빈의 일련의 "아름다운" 격투 시퀀스는 충격 그 자체였고(그래서 <아저씨>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액션 감독, 무술 담당, 스턴트맨 등등에 꽤 큰 영향을 끼쳤죠. 그중 하나가 <존 윅>) 저는 그 이후에도 <아저씨>를 뛰어넘는 센세이셔널한 액션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굳이 하나를 꼽자면 '토니 자'의 <옹박>??). <범죄도시 2>는 <아저씨> 정도의 충격과 신선함까지는 아니지만 타격이 작렬할 때의 통쾌함 하나 만큼은 <범죄도시 1>을 업그레이드시켜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향점이 어딘지 분명히 인지하고 군더더기 없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힘 있게 밀고 가는 연출도 좋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헐겁고 인물들이 빈약해서 전개가 조금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습니다(이 정도도 못하는 감독들이 태반..). <공공의 적>에서도, <베테랑>에서도, <범죄도시 1>에서도 반복된 한국의 조폭-형사물의 뻔한 설정인 '조폭에게 칼침 맞는 형사' 클리셰가 <범죄도시 2>에서도 어김없이 나오지만, 같은 팀 형사인 오동균이 칼에 찔린 후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는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할 만큼 힘이 있습니다. 마석구 뿐 아니라 그의 팀과 경찰을 응원하게 되고 어서 빨리 악당들을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다 때려눕혔으면 좋겠다 애간장을 태우게 만듭니다. 확실히 클리셰는 WHAT이 아니라 HOW 입니다. 썼냐 안 썼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썼냐의 문제. 그런 면에서 <범죄도시 2>는 그 클리셰를 효과적으로 잘 썼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이런 순수한 오락 영화를 응원합니다. 이런 영화들이 성공해서 재미있는 오락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었으면 합니다. 영화 시장 세계 5위를 자랑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강철중' 이후 변변한 프랜차이즈 캐릭터 하나 없다는 것은 한국 영화의 스토리와 캐릭터가 얼마나 빈약한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강철비>, <부산행>처럼 설정과 캐릭터 모든 면에서 가능성이 있었는데 속편을 어처구니없는 정치 선전물로 만든 경우처럼 영화의 본질을 망각하고 시네마를 선전의 도구로 전락시킨 탓일 수도 있겠죠.



<범죄도시>가 프로덕션의 의도대로 8편까지 잘 이어져서 대한민국에서도 <분노의 질주>, <다이하드>, <터미네이터>, <쥐라기 공원>, <인디아나 존스>, <트랜스포머>와 같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가 나올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지금 전 세계는 얼마든지 한국의 영상 콘텐츠를 소비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전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Made in Korea에 신뢰를 갖고 한국의 콘텐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산행>, <기생충>, <오징어 게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정말 좋았습니다. 멍석은 제대로 깔려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판 위에서 신명 나게 놀지 아니면 이 판을 다 뒤엎을지는 한국의 영화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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