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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Feb 04. 2019

벨벳 버즈소(Velvet Buzzsaw, 2019)

다시 넷플릭스는 실망을 안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2월 1일 <벨벳 버즈소>가 넷플릭스에 풀렸습니다. 이 영화는 <나이트 크롤러>를 연출했던 댄 길로이 감독의 작품으로 제가 꽤 기대하고 있었던 영화입니다. <나이트 크롤러>가 어떤 영화입니까. 길거리 듣보잡(!) 리포터의 광기가 영화 내내 엄청난 에너지로 뿜어내져 나오던 수작 아닙니까! <벨벳 버즈소>의 주연은 <나이트 크롤러>에서 주연을 맡았던 제이크 질렌할입니다. <나이트 크롤러>의 감독과 주연 배우가 다시 의기투합해 만든 미스터리(?) 영화. 기대 안 할 수가 없었죠.





제이크 질렌할은 안타까운 배우입니다. <나이트 크롤러>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그리 주목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 못했습니다. 질렌할의 연기는 그만의 고유한 표정과 어투라는 박스 속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나이트 크롤러>에서 그가 보였던 엄청난 연기는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지만, 이후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준 일련의 꾸준한(!) 실망은 <나이트 크롤러> 속 광기 어린 카메라맨 역이 그가 지닌 연기 색깔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에서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는 역할, 그러니까 질렌할에게  딱 맞는 맞춤 옷같은 역할이었기에 엄청난 연기가 가능했다는 결론을 갖게 만들어줬습니다. 말하자면 질렌할의 연기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능력을 뿜어낼 수 있는 연기 스펙트럼이 극히 좁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제이크 질렌할은 캐릭터의 한계가 분명한 라이언 고슬링과 유사한 연기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다른 영화는 차치하고 <나이트 크롤러>에서 엄청난 연기를 끌어냈던 댄 길로이 감독이 다시 제이크 질렌할과 만났기 때문에 다시 그의 연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역시 넷플릭스는 넷플릭스다. <벨벳 버즈소>는 대단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이트 크롤러> 속 엄청난 에너지와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선 줄거리를 간단히 보자면, 이 영화의 배경은 갤러리, 미술 산업계입니다. LA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갤러리인 로도라 갤러리. 그 갤러리의 '로도라' 관장에게 큰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것 같았지만 커리어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조세피나'. 그녀는 출근길에 우연히 한 노인이 건물 복도에 쓰러져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들어간 노인의 집에서 조세피나는 기괴한 분위기의 미술품들을 목격합니다. 그녀는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높은 미술 비평가, 말 한마디로 작가나 전시회를 쥐락펴락하는 모프(제이크 질렌할)에게 이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모프는 이런 작품은 본 적이 없다며 이 그림들은 엄청난 가격에 팔릴 것이라 말합니다. 조세피나는 그 그림들을 몰래 가져와서 자신을 내치려 했던 갤러리 관장 로도라에게 찾아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이용합니다. 조세피나를 내팽게치려 했던 로도라는 그 그림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조세피나를 끌어들여 대대적인 전시회를 열고 그 그림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됩니다. 하지만 작품에 관여한 이들은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 영화가 하려는 말은 뻔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는 성공이라는 욕망에 들끓는 인물들로 묘사됩니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LA가 상징하는 바는 꽤 큽니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 영화 배경으로써의 LA는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화려함, 성공, 욕망, 겉치레, 가식 같은 조금은 부정적인 키워드로 대표되는 공간이거든요. 아무튼 노인의 죽음과 함께 발견된 수상한 그림, 세간의 큰 인기를 끌게 되는 그 그림을 자신의 성공에 이용하려는 모든 인물들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합니다.


이 영화가 실망스러운 이유 첫째, 인물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캐릭터들이 모두 단순하고 평면적이에요. 그 어떤 인물에서도 캐릭터 변화character arc나 고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같이 종이 인형 같습니다. 그저 욕망하다 죽고, 후회하다 죽습니다. 매력적인 인물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극을 추동시키지 못하고 버려지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로도나 갤러리의 경쟁 갤러리를 운영하는 존 돈돈, 그레첸(토리 콜렛), 피어스(존 말코비치), 코코 등 많은 주요 인물들이 그저 극과 전혀 상관없는 일부 파편적 이야기에만 관여하거나 캐릭터와 잠깐 관계를 맺고 사라는 식으로 곁가지로써 소모되고 맙니다.





버려지는 수많은 인물 중 '코코'를 한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코코는 주인공인 조세피나의 뒤를 이어 로도나 갤러리의 데스크를 맡는 신입 직원입니다. 극 중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데 피어스(존 말코비치)와 함께 유일하게 살아남는 인물이자 적지 않은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경찰, 갤러리 관계자, 아니면 현장 발견을 굳이 안 보여줘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한 인물이 꾸준히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다?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코코가 이 영화에서 하는 일은 현장에서 소리 지르는 일 밖에 없습니다. 코코라는 캐릭터가 하는 기능 그 일 밖에 없는데 영화 초중반부터 은근히 여기저기서 많이 등장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죠. 영화 내적으로 이야기에 기여하는 바가 없는 인물이 자꾸 등장한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영화가 산만하고 이야기가 어중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영화가 재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조심스레 추측 보건대 감독이 생각한 코코라는 캐릭터는 <시카리오> 속 에밀리 블런트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에밀리 블런트는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인물은 아니지만 주요 사건 현장에 모두 참여하며 사건을 바라보는 '목격자'로서 기능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사건을 먼발치에서 관망하기만 하는 소극적 목격자가 아닙니다. 정의와 시스템을 중요시하는 선한 인물로서 법과 정의의 경계가 끊임없이 흐트러지는 사건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정의를 바로잡아보려 하지만 혼란스러워하고 좌절하는 인물입니다. 관객은 그녀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죠,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시카리오>에서 베니시오 델 토로, 조쉬 브롤린과 함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자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적극적 목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에밀리 블런트가 없었다면 <시카리오>는 그저 액션 시퀀스가 조금 뛰어났던 범작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영화는 코코를 충분히 에밀리 블런트 같은 인물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벨벳 버즈소>의 주요 사건은 신참내기 코코가 갤러리의 데스크를 맡게 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니까요.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고상한 척하지만 오직 본인의 욕망만 좇는 이들, 즉 미술 산업계의 이면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코코의 시선을 통해 보여줬다면 이야기좀 더 풍부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벨벳 버즈소>에서 코코의 역할은 사건 현장에서 소리 지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없었죠.


둘째,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이 영화는 영화 시작 후 약 40분 정도가 지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인물들이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전 시간은 판을 짜는데 할애하는데 그 방식이 산만합니다. 꽤 복잡한 역학관계로 얽힌 많은 인물이 한번에 쏟아져 나옵니다. 존 돈돈은 누구고 그가 하는 일은 뭐가 피어스는 소속고 에드는 또 어디 소속이고, 그레첸은 모하는 사람이고 등등 많은 인물들이 빠르게 언급만 되고 지나가서 누가 누군지, 누가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중반이 넘어가면서까지 제대로 파악이 잘 안 됩니다. 결국 영화 뒤로 가면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되기는 하지만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레이어가 전혀 없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갤러리를 이야기 배경으로 하면서 미술 산업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조금 하려는 시도는 보입니다. 한 명의 비평가에 의해서 전시회가 좌지우지되는 모습이나, 중요한 작품들은 부자들만이 독식하고 향유한다는 대사, 유명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한 갤러리 관장이 작업실에 놓여있는 쓰레기봉투를 보고는 안경을 고쳐 쓰며 '굉장한 작품'이라고 찬탄하자 작가 왈 '그건 쓰레기 내놓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 등에서는 현대미술계를 비판하려는 시도가 아주 조금 엿보입니다. 그런데 그냥 엿보이고 끝납니다. 더 깊이 있는 문제의식이나 그 비판을 내러티브로 편입시키는 등의 고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몇몇 대사나 숏이 불규칙하고 파편적으로 드러나며 소모될 뿐입니다.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큰 이야기 줄거리로 편입되었다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언급만 되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소모되어버리니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서 영화를 더욱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미스터리 서스펜스에 더 초점을 두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양새가 된 거죠.





결국 이 영화는 도식적이고 뻔하게 흘러갑니다. 도식적인 플롯은 언제나 캐릭터 부재와 맞물려 가는데.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살아있지를 않으니 관객은 캐릭터들에게 이입하지 못하고 한 발 떨어져 사건을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그저 기계적인 사건의 연결로 전락하고 맙니다.


많은 영화, 대부분의 영화가 예측 가능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클리셰라고 말하는 전형성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클리셰는 수많은 영화의 시행착오와 성공을 통해 자리 잡은 영화 스토리 텔링의 문법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WHAT?이 아니라 HOW?, 즉 클리셰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입니다. 사실 요즘 영화들, 특히 넷플릭스 제작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깊이있는 이야기나 캐릭터 고민없이 그저 쓱싹쓱싹 문법에 맞게 영화를 만든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들의 고민은 오직 소재에 있어 보입니다. 문법을 따르되 그 안에서 캐릭터 구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만들고, 캐릭터가 어떤 고민을 갖고 결국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지, 영화의 미장센은 어떤 목적과 의미를 지향할 것인지 하는 많은 고민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이야기와 캐릭터의 고민없이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 새로운 소재에만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캐릭터는 부재한데 개는 비슷한 이런 영화혹시 인공지능이 각본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넷플릭스의 영화들은 심지어 영화들의 미장센 분위기, 특히 색감이 비슷합니다. 영화 촬영의 규격에 대한 엄격한 가이드라인 때문일까요. 각본 뿐 아니라 촬영이나 컬러그레이딩도 인공지능이 일괄적으로 하는 것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데, 넷플릭스 영화는 맛있지도 않은데 똑같으니 음식을 계속 내놓고 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넷플릭스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에게 기대작이었던 <킹덤>, <벨벳 버즈소>은 모두 실망을 안겨줬습니다. 넷플릭스 콘텐츠에 대한 제 편견(!)은 더 깊어기만 했네요. 요 몇 년 전 세계를 휩쓸던 넷플릭스에 언젠가부터 위기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존, 훌루, 디즈니 등 경쟁자들의 출연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아닙니다. 넷플릭스 작품에 실망하고 질려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내부적 요인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모르긴 몰라도 여기저기 꽤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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