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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Feb 15. 2019

극한직업(2019)

이제 와서 리뷰가 무슨 소용 있겠냐만은



지금 와서 이 영화에 대한 리뷰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아바타> 관객 수를 깼다는 뉴스를 접하고 지금이라도 저의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극한직업>의 기억을 남겨보는 게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관람객 수 1,400만 명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이 영화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이 조금 힘들었습니다. 연극/뮤지컬 식 대사에 과한 연출이 더해진 배우들의 오버스러운 연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연기는 원래 조금 과한 면이 있습니다. 무대와 떨어진 관객에게까지 배우의 연기와 대사가 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뮤지컬의 연기는 연극보다 한 발 더 나아가는데(그래서 뮤지컬 식 연기/노래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어쨌든 각각의 예술이 지닌 연기 특성에는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연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영화가 연극/뮤지컬 같은 무대 예술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첫째, 시각적으로 인물의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관객에게 전달 가능하다는 것. 둘째, 청각적으로 아주 작은 숨소리도 또렷하게 전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연기는 연극/뮤지컬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큰 스크린을 통해 보는 과장된 연기는 관객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 연극 무대에서는 잔뼈가 굵은데 영화는 처음 데뷔하는 배우의 연기가 어색하게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죠. 연극 무대에서의 좋은 연기가 반드시 영화에서의 좋은 연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매체에 따른 연기 보정이 필요한 것이죠.





<극한직업> 속 배우의 연기가 분명 연극식 연기는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대사나 주고받는 스타일이 연극 식이긴 하지만 그들이 행한 연기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가 들어간 과한 오버 연기였습니다. "에에에에~~~~~?!?!?!?!"로 대표되는 일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연기 말이죠. 



이게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반드시 현실의 모사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세상에는 현실을 그리되 현실 같지 않게 묘사하는 '영화적인 영화'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베리 젠킨스 감독의 <문 나이트>나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아무튼 감독 연출이나 통제 밖의 막무가내 오버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의한 오버스러운 연기가 영화의 일관된 톤 앤 매너와 합치되면 오버 연기는 감독이 창조하려는 영화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로써 중요하게 기능합니다. 정극과 희극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한국 영화가 이러한 세계관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습니다. 누구는 오버하는데 누구는 차분하고, 배우들은 오버하고 있는데 영화의 톤 앤 매너는 지극히 현실적인 식으로 통일성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이런 통일성의 부재는 곧 핍진성의 실패, 혹은 세계관의 실패로 영화 여기저기에서 드러나면서 관객의 영화 몰입을 깨뜨립니다.





하지만 <극한직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에 의한 배우들의 오버 연기는 또한 감독의 연출에 의해 영화 전반적으로 유지되는 우당탕탕 톤 앤 매너와 합일을 이루면서 코믹하고 에너지 넘치는 <극한직업> 특유의 분위기를 창조해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저일 것입니다.

저들의 과한 연기가 감독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장치라는 걸 알면서도 원체 그런 연기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의 취향 때문에 눈 앞에 펼쳐지는 현란한 오버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것은 갈비인가, 치킨인가" 혹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이상한 포즈를 잡는 만화적 연출 등에서 나오는 슬랩스팁 코미디가 저에게 유효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누벨바그나 뉴아메리칸 시네마 영화만 보는 '진지충'는 아닙니다. 유해진 주연의 <럭키>는 정말 재밌게 봤고, 제 인생 최고의 영화는 <시민 케인>이 아니라  <스타워즈>이니까요. 다만 저는 하이퍼 드라이브를 하는 우주선 안이든, 거대한 괴물과 인간이 싸우는 외계 행성이든, 미 대통령이 핵 미사일 발사를 고민하는 백악관 벙커 안이든, 형사들이 모인 치킨집이든 공간과 사건에 상관없이 그 사건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듯 연기는 사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빅 식>을 보면 배우들 모두가 그 세계 안에 실제 숨 쉬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인물들 같지만 충분히 유쾌하고 재밌습니다. <럭키> 속 유해진의 모습도 때때로 어느 정도 설정과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유해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맞물려 충분히 자연스러운 웃음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장르와 달리 코미디는 설정과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배우들의 과한 연기가 허용되는 장르입니다. 하지만 <극한직업> 속 인물들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 코미디 영화에서나 볼 법한 만화적으로 과장된 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연기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곳 미국에서 연기

디렉팅을 배울 때 선생님은 눈 한 번의 깜빡임이나 입술의 작은 떨림, 대사 중간에 존재하는 잠깐의 공백도 모두 연기이며 감정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조명이든, 편집이든, 사운드든 과목을 떠나서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모든 선생님들이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감정의 전시'를 금기시했습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상황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길 주문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들이 일본의 드라마는 좋아할 수 있어도 코미디는 싫어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들의 '전시적'이고 만화적인 연기에 거부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극한직업> 내내 빵빵 터지는 관객들을 보며 혼란스러웠습니다. 


"일본 코미디의 과장 연기와 <극한직업>의 과장 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영화 속 인물들의 연기 자체가 제 안에서 소화 되질 않으니 그들이 자아내는 해학과 풍자가 저에게 들어올 리 없고,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하는 주변 관객들 사이에서 저는 외딴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데 나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이질적인 고립감 속에서 급기야 어느 순간 "아.. 내가 뭔가 문제가 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인간이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마음이 편한 사회적 동물인걸까요.



연기에 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과장 연기는 거북하지만 <극한직업>의 과장 연기는 좋아하는 심리가 여전히 잘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다른 관객처럼 신나게 웃고 즐기지 못했지만, 저의 개인적인 즐거움 여부를 떠나서 <극한직업>은 칭찬받아 마땅한 큰 미덕이 하나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미디 장르에 충실했다.

그렇습니다. 코미디 같은 코미디, 장르에 충실한 코미디, 잘 만들어진 코미디가 대체 얼마만입니까.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아름다움'이 아닌 정치적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용병의 싸움, 마약 밀매, 조폭의 다툼, 외환 위기, 남과 북의 스파이, 군함 모양 섬에서의 노동, 택시 운전, 좀비가 된 왕, 성 지키기 등 소재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상관없이 영화들은 하나의 결승점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런 영화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한국 영화 시장에서 다양성이 상실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이 있으면 저런 비판이 있기도 하고, 이런 관점이 있으면 저런 관점이 있고, 무거움이 있으면 가벼움이 있기도 하면서 세상을 향한 시야가 균형을 이루고, 다양한 재미가 공존해야 하는데, 세련되지도 않은 작법으로 단도직입적이고 거칠게 영화의 목적을 들이미는 똑같은 영화들을 보고 또 보며 지친 저는 "그만해라아아, 마이 묵으따 아이가" 를 읊조릴 수밖에 었습니다. 교조적 일장 연설과 훈계에 사하라 사막이 된 한국 영화계에 재미와 즐거움이란 코미디 장르에 충실한 <극한직업>의 등장은 시원한 한바탕 소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 다섯 명의 인원으로 조폭 전원을 제압하고 소파에 앉아있는 그들을 비추며 내보내는 음악은 그 이름도 거룩한 <영웅본색>의 '당년정'


https://youtu.be/DSVE7GVBQqY


밑도 끝도 없이 <영웅본색>을 패러디하는 그 쇼트, 제가 이 영화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그 장면은 <극한직업>의 선언과 같습니다. 


소파 어디서 났냐고? 어떻게 우리가 얘네를 다 이겼냐고? 왜 우리가 여기 이러고 앉아있냐고? 음악은  왜 이러냐고? 뭐 막 피곤하게 물어보고 그러지말고 그냥 즐겨, 이건 코미디 영화잖아.


그래도 역시 최근 한국 영화의 사회비판적 중력장에서 완전 벗어날 수 없었던 지 이 영화 역시 곳곳에 사회비판적 요소가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바로 <극한직업>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강력한 펀치 라인이 있는 대사를 가볍고 재치있게 날리고 쿨하게 지나감으로써 사회 비판을 '훈계'가 아닌 '풍자'로 승화시킵니다. 풍자야말로 고차원적 작법이자 코미디가 가진 최고의 미덕입니다. <극한직업>은 한국 영화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멸종된 '풍자 DNA'를 호박에서 꺼내 다시 되살린 한국판 '쥐라기 공원'이라고 말하면... 오버겠지요.



호박..



저는 <부산행>이 한국 영화 역사에 있어 <쉬리>와 같은 기념비적인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선 절대 안 된다고 모든 관계자가 손사래를 치던 '좀비' 소재를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후 다양한 한국의 좀비 영화 제작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부산행>은 한국 영화의 범위를 확장시킨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극한직업>은 재미를 떠나서 제가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부산행>처럼 소재의 영역을 확장시킨 선구자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사실 <극한직업>은 클리셰 덩어리), 다만 코미디 장르에 충실한 <극한직업>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일장연설 영화가 주를 이루는 충무로의 영화 제작 흐름을 바꿀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말입니다. 한 눈 팔지 않거나 괜히 똥폼 잡지 않고 오롯이 웃음과 즐거움에 천착한 <극한직업>은 한국 영화계에 고마운 영화 임은 분명합니다.





PS.

<극한직업>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영화가 쇼트를 굉장히 잘게 나눴다는 것입니다. 특히 초반~중반 부분은 일상적인 대화 씬에서도 정신없이 컷이 바뀌는데 무슨 <테이큰> 액션씬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잘게 자른 쇼트를 이어 붙인 만큼 속도감이 느껴지는 씬도 있었지만 과하게 느껴지는 씬도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이런 편집이 좀 자극적이란 느낌이었습니다. 영화 학과든 어디든 누가 한국 영화 평균 쇼트 수와 <극한직업> 쇼트 수 비교 분석을 한번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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