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삶의 공허함과 모순성에 대해서
그림을 많이 보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미술 사조의 변화와 대표적인 예술가들 정도만 간신히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오히려 미술 작품보다는 미술가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때론 화려하고 때론 비극적이지만,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들의 욕망, 시기, 질투, 좌절, 후회, 행복, 슬픔. 수 백 년 전 존재했던 천재들에게서 삶의 동 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여전히 유효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의 삶, 더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빨래를 돌리면서 정말 오랜만에 미술 팟캐스트와 관련 자료들을 조금 들춰 보았습니다. 램브란트와 들라크루아. 언제나처럼 오늘도 저의 렌즈는 그들의 작품보다는 인생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램브란트의 인생에서는 이른 나이에 그가 이룬 엄청난 성공과 그 뒤를 잇는 철저한 실패, 그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삶의 낙차가 가져다준 거대한 공허, 하지만 끝내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보이는 한 인간의 초연함을 느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인생에서는 인간의 모순성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램브란트 :
삶의 허무함과 초연함에 대해서
램브란트는 30대에 커리어의 정점을 맞이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마침 긴 전쟁으로 유럽 대륙이 황폐화되는 동안 그 비극에서 한 발 빗겨 있으면서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이며 상업과 무역을 한껏 꽃 피우는 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른 나이에 엄청난 돈과 명예를 얻게 된 램브란트는 저축 따윈 안중에 없었습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대저택을 구입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긴 램브란트는 지금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욜로 라이프를 제대로 즐겨주십니다.
하지만 유럽 내 긴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저물면서 램브란트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급격히 가세가 기운 그는 결국 50살의 나이로 파산하게 되지만 62살에는 아내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은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못생긴 노파를 그리다 터지는 웃음 참지 못해 숨이 막혀 죽었다는 화가 제욱시스와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자화상을 끝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20대의 저와 30대의 저, 시간이 흐르며 달라진 하나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도시의 이면에 눈이 떠졌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조금 더 민감해졌다는 것입니다. 30대 시작과 함께 작게나마 제 사업을 시작하면서 매일 12시 넘어 집에 들어가던 제 눈에 점점 도시의 다른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휴대폰을 세 개, 네 개씩 들고 추운 거리를 서성이고, 막차를 타고 이동하며 콜을 기다리는 대리기사들의 모습. '임대', A4 용지에 거칠게 쓴 두 글자가 붙은 많은 상점들. 이 도시에 그토록 많은 대리기사들과 빈 상점들이 존재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항상 그곳에 있어왔지만 저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었기에 연극의 배경막처럼 느껴졌던 것이었겠죠. 하지만 제 일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배경막에서 한 명 한 명의 배우, 각자의 삶을 위해 무던히 애쓰는 하나의 주체로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24시간 커피점과 편의점에서 지친 눈으로 여러 대의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대리기사들, 막차를 가득 메운 그들의 고단한 삶에서 저 자신과 제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임대'가 나붙은 상점들, 분명 '대박'을 외치며 호기롭게 시작했을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끝내 마지막 희망을 접고 정들었던 상점의 문을 닫는 결정을 내릴 때 어떤 감정이었을지, 이제 막 제 사업을 시작하고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리를 쓰던 저에게 그런 상상은 연민과 불안,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성공적인 화가에서 집에 더 이상 팔 것이 남지 않은 몰락한 화가가 된 남자. 그의 삶은 그의 그림만큼 극적입니다. 저는 그의 화려한 시기보다 50대 이후 삶에 더 깊은 관심과 연민이 갔습니다.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성과 같은 대저택의 주인으로 살던 이가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은 어떤 것일까. 우리 같은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한 고통일 것입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그 고통을 안고 어떻게 생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 삶은 어떤 비극적인 모습일까.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파산한 50대의 초상화에는 아직 근엄함과 위엄이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정서 역시 존재하는 듯합니다.
17세기를 살다 간 램브란트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내리막에서 반등하지 못한 채 협곡의 깊은 곳에서 발버둥 치다가 끝내 생을 마감합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들은 삶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받아들일까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분명 많은 이들은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억울함에, 분노에, 슬픔에 젖어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상화 앞에서 언제나 근엄함과 진지함을 일관하던 램브란트는 그의 마지막 초상화에서 끝내 웃음을 보입니다. 결국 삶이란 다 그렇게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성공과 실패가 다 무엇이냐고 관조하는 듯합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저승사자로 보이는 듯한 어두운 존재 앞에서 아기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재밌게 잘 논다 간다` 말하듯 너털웃음을 짓는 이 마지막 초상화를 그냥 지나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예술, 아니 모든 이의 삶이 그렇듯 외피를 드러내고 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 그 작품, 그 인물은 좀 더 다른 의미로, 더 큰 의미로, 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들이 박제된 역사 속 수많은 인물 중 한 명이나 혹은 그저 도시의 배경이 아닌 욕망하고 노력하고 행복하고 좌절하고 슬픔을 맛보는 뼈와 육체를 가진 한 사람, 나와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식됩니다.
세상에는 실패한 수많은 이들 중 재기에 성공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칙칙한 어둠의 협곡을 힘겹게 기어올라 다시 눈부신 해를 본 이의 새로운 삶, 다시 힘과 생기를 되찾은 이들이 덤덤하게 풀어놓는 재기 스토리는 언제나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좌절의 시간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추스르고 다독이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시간들, 길고 긴 어둠의 시간 끝에서 보였을 밝은 빛. 그들의 이야기는 지난 몇 년 전 밤거리와 막차 안을 메운 대리기사들과 굳게 닫힌 상점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모든 것이 마치 저의 일처럼 느껴지고 그들을 응원하게 됩니다.
들라크루아 :
삶의 모순성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천재라 부르며 사랑하고 기억하는 대표적인 화가들 중 많은 이들은 사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많은 혹평 속에 생을 마감한 이들이 많습니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문을 연 마네나 인상주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 고흐 같은 화가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이데거'와 함께 '끝내주는 이름의 대표적인 인물' 들라크루와는 19세기 전반 고전적인 화풍이 득세하던 프랑스에서 그와 대척점에 있는 낭만주의적 화풍을 보이며 이후 등장하는 인상주의의 씨를 뿌린 인물입니다. 그에게 영향받은 젊은 화가들이 그를 칭송했지만, 주류를 장악하던 신고전주의 화가들에게 "술 취한 빗자루로 그린 그림"이란 혹평에 시달리기도 한 화가이기도 합니다(그렇기는 하지만 고흐만큼 철저히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화가는 물론 아닙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 자신이 동시대 주류 화풍이었던 신고전주의(윤리, 이상, 명확한 정치적 입장, 질서 정연한 구도, 완벽한 마무리)의 반대 지점에 있는 낭만주의(표현적이고 거친 붓 자국, 강렬한 색채 사용, 개인적이고 문학적 상상력)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인상주의를 시작하려는 젊은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인물이지만 한편 스스로 낭만주의 임을 부정하고 고전주의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류 화가가 되기 위해 8번의 시도 끝에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진보를 혐오한 보수주의자였으며, 그의 주요 작품은 모두 정부가 구입했고, 이력 중반 이후 그가 몰두한 일은 공공 기관과 교회를 장식한 대형 역사화와 종교화였다는 것입니다.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모순성을 갖는 삶이 많습니다. 많은 이들의 행동이 때론 모순적이고 때론 모호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그런 그들의 삶의 모습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항상 새롭게 다짐하고 결심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이런 목표 저런 목표를 세워보지만 끝내 또 다른 목표로 덮어씌우기를 합니다.
잘못된 일이란 걸 뻔히 알면서 못내 눈을 감고 '이번만' 스스로 되뇌며 행동하기도 합니다. 내 일이 아니면 불의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의 일이어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잦아지며 그 모습에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만약 후세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우린 얼마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존재로 보일까요.
모든 선택의 변수를 구별해내서 분류하고 가중치를 더해 산출한 값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 그 결정을 반드시 이행하는 사람. 언제나 감정이나 행동의 낭비 없이 효율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우린 때로 이런 사람을 우상시하고 동경하지만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공지능에 가장 가까운 존재, 가장 빨리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인공지능과 인간이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는 우린 이성적이지 않다는 점일 것입니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 본능과 욕망과 충동에 의해 행동하지만 이성과 합리와 절제라는 포장지로 이쁘게 포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당히',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그 모든 모순과 비합리는 우리가 아직 기계가 아니라는 다행스런(!) 반증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런 비합리적 존재이기에 타인에게 너무 높은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요.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프랑스 인상주의를 시작하는 중심인물 중 한 명이자 제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 마네 역시 그가 존경하고 영향받은 들라크루아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인상주의 화가 임을 부정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주류에 편입되려 노력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