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접한 김연수 작가의 책은 딱 한 권 <밤은 노래한다> 뿐이지만 그 한 권 만으로 그는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더랬습니다. 일본 제국과 사회주의가 부딪치며 삼각파도가 일렁이는 곳, 그곳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남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일제 시대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입체적인 시각으로 조망한 정말 멋진 소설이었습니다.
소설가의 일은 그 책의 작가인 김연수의 에세이입니다. 마치 자신의 작업실을 직접 소개하는 것처럼 소설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소설은 어떻게 쓰는 지를 삶을 바라보는 본인의 생각과 적당히 버무려 개괄해줍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저에게 소설은 언제나 영화와 함께 '서사 예술'로서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소설의 서사 진행 방식과 원칙을 대략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풀어주는 <소설가의 일>은 일종의 서사에 대한 '원론'으로써 저의 지식을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며 기록했는데, 고개를 들고 보니 거의 책의 절반 가량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놓았습니다. 이러면 당최 사진이 무슨 소용이었는지..
조심스레 제가 내놓은 대답은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의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이 이미 떠난 버스처럼 불가능해 보여도, 그래서 그것을 위해 바치는 내 목숨이 개죽음이고 그 행위가 미친놈처럼 보여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설정한 의미와 목적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것.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일본 제국 앞에서 나 한 사람의 노력이란 마치 바위를 향해 날아가는 작고 연약한 계란처럼 미약한 것이지만 진심과 전력을 다하는 노력은 전염병처럼 주변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단 한 명에게라도 그 뜻이 전해진다면, 그래서 그의 생각이 바뀌고 삶의 태도가 바뀐다면, 그래서 그 변화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퍼진다면, 어쩌면 독립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우샤인 볼트를 이길 수 없는 육상선수는 비록 그가 선수 시절 우샤인 볼트를 뛰어넘지 못할 지라도 그가 선수 시절 행한 온갖 시행착오와 노력은 소중한 노하우와 경험으로써 그에게 남을 것입니다. 만약 그 선수가 후에 지도자가 되고, 충분한 재능을 가진 어린 선수에게 그의 노하우가 전해진다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선수는 우샤인 볼트를 뛰어 넘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위 사람이 모두 비난하고 조롱한다고 해도, 스스로 부여한 의미와 목적을 위해 경주해 나아가는 삶은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요. 그것이 민족의 독립처럼 거창한 것이든, 가족의 행복이든, 최고의 게이머가 되는 것이든, 인류의 평화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것까지 상관없이 말이죠. 삶이란 순간의 감각적 쾌락이 아닌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할 때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조심스럽게 내놓은 제 나름의 존재론적 결론이자 회의주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지극히 개인의 행복과 부의 축적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닌 타인(이웃, 사회, 국가 등)을 위해 바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바보 같은 짓 아닙니까?나의 인생에서 내가 편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타인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이들의 어리석은 희생을 통해 사회는 파편으로서의 개인이 모인 성긴 조직이 아닌 서로 끈끈이 연결된 조직으로서 오직 나 뿐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 나와 함께 더불어가는 타인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삶을 바친 이들을 우리는 '영웅' 혹은 '위인'이라 부르며 경의를 표하고 후세에까지 알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찾은 병원에서 처음으로 암 선고를 받던 날, 그는 '혹시나...' 그것이 오진이 아닐까 싶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혹시나'는 없었습니다. 2, 30대 그렇게 믿어 왔던 수많은 유혹과 혹시나.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불혹이 되니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현실적이 아니라 점점 비관적으로 변한다는 뜻인 것 같다.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다. 내 잘못도 아니고 세상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그건 우리가 너무 일찍 죽기 때문이다. 백 년 정도 산다고 해도 우리에겐 부족하다. 이백오십 년 정도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나는 낙관적으로 말할 수도 있으리라. 간절히 소망하면 온 우주가 나를 돕는다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국 이뤄지고야 만다고. 그게 바로 우주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백 년도 못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말한다. "간절히 소망해도 온 우주는 나를 돕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일들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니 혹하지 말자. "혹시나..."라고 말하지 말자. 다른 삶을 꿈꾸지 말고 이제 제정신으로 살아가자.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의문은 남는다. 그런 게 바로 우주의 법칙이라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은 무슨 의미인가? 나와 다르지 않다면 그들 역시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텐데 이런 무의미한 삶은 왜 이토록 흔한 것일까? 그건 우리에게 아직 미혹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젠 더 이상 혹할 것이 없기에 술의 기운을 빌어 잠시나마 혹하는 것일까요. 술기운에 기대어 과거 자신이 혹했던 기억을 끌어와 혹하는 것일까요.
그는 민주화 운동 속에서 산화되는 또래의 젊은이들을 보며 계속 되묻습니다, '왜 저들은 죽음의 길로 뛰어드는 것일까' 자신을 소설가로 만든 건 이 문장인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나를 소설가로 만든 건 그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나보다 먼저 살았고, 나보다 먼저 소설을 썼던 소설가들이 그들의 소설에 무수히 남겨놓은 바로 그 문장이었으니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번 더 말할 때, 우는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뭔가 다른 좋은 생각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 바로 그때 이 우주가 달라진다는 말.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그 말.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는 계속 이어갑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다.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력 역시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내가 쓰는 소설의 결말은 여기까지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새드 엔딩이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정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진, 마치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본다. 하지만 그건 절대 느닷없지도 않고, 기적도 아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세상이다."
"고통과 절망은 우리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하지만 우리 인류는 충분히 오래 살 테니, 우리 모두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겠지만 우리가 간절히 소망했던 일들은 모두 이뤄지리라. 우리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과 역사라는 무한한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뒤섞인 밤하늘처럼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면. 먼 훗날 어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즉시 바로 여기에서. 마흔 살이 지난 뒤에도 우리는 미혹돼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김연수는 삶에 대한 갓난아이처럼 미약하고 설익은 저의 생각을 전 인류와 우주적 관점으로 확장시켜 완결 지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멋들어지고 장대한 선언적 문장과 함께.
어느 시점에서든 누구나 삶에 흥미를 잃고, 의미를 잃고, 희망을 잃고, 이상을 잃고 '취함'에서 깨어납니다. 취함에서 깨어난 이들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나는 모든 것이 다 소용없다는 회의주의. 또 하나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세상에 항복하고 남들처럼 살라는 현실주의. 취함에서 깨어난 이에게 이상주의라는 세 번째 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달콤함과 현실의 쓴맛을 모두 맛 본 마흔 살의 '어른', 하지만 아직 회의주의와 현실주의라는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기에는 두렵고 망설여지는 이들에게 작가 김연수의 생각은 어쩌면 너무 관념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른논에 뿌려지는 단비와도 같기도 합니다. 분노해보기도 하고 냉소해보기도 했던 이가 도착하게 된 곳, 나이 마흔. 실패와 아픔과 좌절과 허무를 껴안지만 그 무게에 매몰되지 않고, 즐거움과 성공을 즐기지만 취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꾸준히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마흔에 들어선 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