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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코쉬 Jul 03. 2024

연극 <러브레터>, 아날로그의 매력

편지는 느리고 조금 불편합니다, 그래서 매력이 있죠.

#1. 오랜만의 연극

어느 날, 대학교 때부터 가깝게 지내는 동생이 고모 할머님께서 예술의 전당에서 '러브레터'라는 연극으로 공연을 하시는데 한번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영화나 OTT도 질리던 차에 직접 연극을 보러 가본지도 꽤 되어 흔쾌히 그러자고 했습니다.


#2. 강렬한 첫 연극의 경험기와 풀리지 않는 의문

잠시 제가 본 첫 연극에 대해서 생각이 나서 말해보면, 저의 첫 연극은 고등학교 때 현장학습을 통해 봤던 연극이었는데,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연극이었죠. 당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담임 선생님께서 극 중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도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시는 겁니다. 저는 그냥 흔한 남고생들의 호들갑을 주의시키려 하시는 줄 알았죠. 그런데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전쟁 속에도 사랑이 피어난다.' 네, 그런 스토리도 있더라고요. 그냥 사랑도 아닙니다. 아주 격정적인 사랑의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죄송하게도, 우리는 절대 정숙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로서는 억울한 부분이 꽤 많습니다. 남고생들에게 그런 장면(?)이 나오는 연극을 보여주시면서 정숙을 요구하시는 건 20년이 지난 지금도 무리한 요구였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의심에 더 가깝습니다)은 선생님들께서 보고 싶으셨... 다소 무례한 의심일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가뜩이나 연극이라는 예술의 특성이 영상 매체보다 관객에게 더욱 직접적인 인상을 남기잖아요. 이런저런 이유로 연극이라는 예술은 제게 꽤나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습니다.


#3. 연극 '러브레터'

연극 '러브레터'는 1988년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작가 A.R. Gurney가 직접 낭독공연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국가와 다양한 공간에서 공연된 스테디셀러 작품입니다. 이 연극의 여주인공 '멜리사'와 남주인공 '앤디'는 50년에 걸친 그들의 러브레터를 읽어가는 것으로 극을 이끌어 나갑니다. 대부분 편지의 낭독만으로 모든 감정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로서는 어쩌면 더욱 깊은 내공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배우라면(그럴리 없지만)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극은 대부분 편지 낭독으로만 이루어져서 관객은 마치 라디오 사연을 듣는 것 같기도, 관객 본인들의 그 시절 러브레터를 대신 읽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4.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연극은 2시간 정도로 짧지는 않았습니다. 극을 이끌어가는 동안 두 원로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멋있었죠. 연극이 끝난 후 큰 박수갈채가 장을 가득 메웠고, 장내가 밝게 바뀌며 무대의 조명이 두 배우를 향해 쏟아졌습니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일단 저는 아직 연극의 막이 내린 걸 바로 실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뭐든지 느린 탓도 있겠지만 어디선가 멜리사와 앤디의 이야기가 계속 존재할 것만 같았죠. 멜리사와 앤디의 실제 모습이 지금 두 배우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고요. 아마도 극이 끝나갈수록 두 주인공의 나이도 들어가는데 마지막 시점의 멜리사와 앤디의 나이대가 두 배우들의 실제 나이대와 비슷했다는 점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만큼 몰입감 있게 연기를 훌륭히 해낸 이유도 크겠죠.


두 배우를 향해 쏟아지는 조명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모면서 문득 '직업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들이 짧게 스쳤습니다. 동생에게 할머님께서 6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셨다는 말을 전해 들은 탓일까요. 부끄럽게도 저만 해도 일을 시작한 지 10년도 채 안 되었지만 그동안(또는 지금도 여전히) 종종 다른 일을 생각하곤 하니깐 말이죠. 그렇다고 꼭 한 가지 일에 평생 전념하는 것이 옳고, 그렇지 못한 것이 옳지 못한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60년을 한 가지 일에 몰두하고 지금도 열정을 가진 채 활발히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돈과 명예를 떠나 본인이 행복하지 않았다면 좀처럼 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이지만 분명 아직도 조금 더 잘하고 싶고, 본인 일을 할 때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실 것 같습니다. 두 배우와 저는 직업이 다르지만 큰 범주에서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바라본다면 그런 부분들은 꽤 존경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4. 연극이 끝난 후, 든 생각

그 당시 연극이 끝난 직후 선 굵은 피상적인 감정의 자극은 없었습니다. 다만 연극이 끝난 후 2주 정도가 흐른 뒤에도 잔잔하게 계속 생각이 나긴 합니다. 이것이 깊고 긴 울림의 한 종류라면 그것이 맞겠네요. 감성적인 말괄량이 멜리사와 올곧고 이성적인 -혹은 그것을 추구하는- 모범생의 앤디. 종종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멜리사, 그와는 반대로 매 순간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때로는 다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곤 하며, 때로는 흔한 사내놈처럼 눈치 없는 모습을 보이는 앤디. 서로 대조되는 캐릭터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편지 낭독 형식의 연극에 입체감을 선사하며 잔잔한 즐거움을 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멜리사와 앤디는 관념적으로 하나의 인격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자기 내면 속에서 그런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기도 하니깐요.


#6. 익숙함

두 배우가 연기한 소년미, 소녀미가 왠지 모르게 아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질 때가 있습니다. 일례로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어릴 때 즐겨보던 시트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유튜브로 볼 수 있는데, 그런 영상들을 통해 가끔은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운 감정으로 올라왔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행복했던 건 아니지 않았나, 오바야.'라며 순식간에 감정을 추스르긴 했습니다만,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과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때로는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지금 그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장소도 이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익숙했던 것들이 문득 '이질적'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감정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7. 편지

문득 '아직도 편지는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SNS로 바로 하면 그만입니다. 옛날에 비둘기 날리고 봉화로 의사소통할 때 생각하면 정말 편리하고 빠르고 효율적이죠. 게다가 요즘 보면 더 그렇습니다만 비둘기는 날기 싫어해요. 얼마나 귀찮았겠습니까. 그런데 편지라는 소통의 수단은 아직도 살아남습니다. 대단하죠. 편지는 한 번 쓰면 고치거나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제일 힘든 건 '도대체 편지지는 뭘 사야 하나!'라는 겁니다. 요즘은 사실 다른 사람 주소도 잘 모르죠. 우편번호는 말할 것도 없고요. 우체통은 도대체 제가 찾을 때만 없는 것 같고요. 우여곡절 끝에 보냈는데 며칠 뒤 저의 집 우편함에 어디선가 본 듯한 편지지가 꽂혀 있습니다. 살짝 불안합니다. 그렇죠, 저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반송'이라는 문구가 인장 된 편지가 우편함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편지는 좀 느리고, 답답하고, 조금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편지를 쓰죠. 정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바로 SNS로 보내는 것과 직접 편지로 쓰는 것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날에는 정성스레 쓴 편지를 준비하곤 하죠. 음식 하나를 먹어도 정성이 담긴 음식은 바로 알아차립니다. 하물며 나를 생각하고 만든 음식이라니 이건 안 먹어봐도 맛있는 겁니다.


편지에는 애틋함, 기다림, 설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정성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정성스럽게 읽습니다(또는 읽어야 할 것 같기도, 그렇게 읽고 싶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SNS로 받은 메시지는 잘 생각이 잘 나지 않지만(물론 고백공격이라든지 그런 건 기억에 남겠죠. 물론 저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요.), 편지로 받은 내용은 썩 기억이 잘 나는 편입니다.


우리 모두 편지의 기다림과 불편함을 알기에 더욱 매력이 큰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바로 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그 매력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연극 '러브레터'에서 '편지'라는 요소는 매우 훌륭한 장치임에 틀림없어요.


여전히 잔잔하게 떠올리게 만드니깐요.


편지 기다리는 코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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