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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코쉬 Jul 19. 2024

고작 100m 거리의 아름다움(중)

존재감 없는 존재들의 존재감

나는 이른 아침 그곳의 ‘풍경’도 좋아하지만, 일요일 늦은 밤 그곳의 ‘정취’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침의 시공간이 반짝거리며 생기 넘치는 비현실적인 느낌이라면, 일요일 늦은 밤에 현현(顯現)하는 시공간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현실적인 느낌이거든요. 대략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은 그렇습니다.


어둠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거리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각자 나름의 이유들로 이곳을 뜨겁게 달궜을 겁니다. 그걸 두고 누군가는 활력이 넘치는 곳으로, 누군가는 산만하고 정신없는 곳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어느 쪽이든 딱히 상관없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거리가 뜨겁다는 사실에 대해서는요. 그리고 마침내 후덥지근했던 열기는 비로소 이 시간이 되어서야 차분하게 식어가는 것 같네요.


나는 평소에도 밤에 걷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물론 일부 장소에 한정해서 말입니다. 그나마 작년 파리에 갔을 때는 센강 주변도 밝고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도시의 치안이 괜찮다고 생각돼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종종 산책을 즐겼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본능적으로 밤 산책의 욕구가 사그라들더군요. 물론 한국에서도 낯선 곳의 밤 산책은 조금은 부담이 됐겠지만 이곳은 동네라서 인적이 드물어도 전혀 부담이 없습니다. (당당)


평소 도로를 빽빽하게 채웠던 자동차들도 이 시간에는 거의 없습니다. 사람이고 자동차고 항상 이 공간을 가득 채웠던 존재들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 모두가 각기 다른 존재였겠지만, 주의 깊게 관심을 두기 전에 내 의식 안에서는 단지 ‘존재’라는 단어로 존재를 묶어버립니다. 그야말로 아무 존재감이라는 게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항상 존재하는 대상들로부터는 크게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일요일 밤에 걷는 이 거리에는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부재(不在)라는 대조적인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나의 감각에 그 존재를 알립니다. 그러고 보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나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겁니다.


한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에게 존재감이 없던 존재들도 모두 ‘제 집’이 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특별히 ‘사람 살려’ 정도의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평소의 나는 무심하게 지나쳤을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십 명, 몇백 명 지나치고 계속 지나쳤겠죠.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당장 이곳에 없었던 존재들이라 해도 별 상관이 없죠.


그러나 일요일 밤의 이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그들의 부재(不在)를 통해서 그들의 존재(存在)를 실감하곤 합니다. ‘다들 제 집에서 쉬고 있겠구나’라고 말이죠.


누군가는 종일 아이들과 놀아주고 녹초가 되어,

누군가는 내일 중요한 발표를 걱정하며,

누군가는 월요병에 시달리며, (가깝게는 제 아내)

누군가는 ‘다음 주는 힘내보자!’ 다짐을 하며 말입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동시에 이것도 제 아내)


모두 한 가정의 소중한 존재들이었을 겁니다. 조용히 이 시공간 속을 걸을 때면, 이런 색다른 감각을 경험을 하곤 하는데, 나처럼 무심한 사람이 이런 류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즐겁기도 합니다.


나는 이 시공간 속에서 평소에 하지 않을 만한 사색(思索)을 즐기는 편입니다. 이 말이 평소에 하지 않을 만한 어떤 주제를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색다른 사색의 주제들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온갖 가지의 생각들이 듭니다만, 나는 자신 있게 그 상태가 머리가 ‘텅텅’ 비워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숫자를 많이 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평소에 머리가 매우 경직된 느낌입니다. 그에 비하면 ‘텅텅’ 한 상태는 매우 유연하고 자유로운 상태라고 말할 수 있죠.


그렇게 머리를 ‘텅텅’ 한 상태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자유로이 놔두고 걷다가 보면, 어느 발걸음부터는 ‘퐁당퐁당’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 아이디어에 주의를 기울이면


‘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데, 재밌네’


라고 하는 과정이랄까, 그렇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꼬치꼬치 따지신다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만, 아무튼 묘사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야 많지만, 특히 그런 임의성 내지 의외성이 아마 상당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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