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ep at a time

한걸음씩, 오늘이라는 의미

by 은혜의 마음

까미노를 걷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삶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면역반응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퍼지는 희귀 자가면역 질환을 진단받고,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몸과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병이 발병한 후, 깊은 우울증까지 겹쳐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고, 결국 한국의 엄마 곁으로 가 6개월간 치료와 돌봄을 받으며 다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노르웨이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50이라는 나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건강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까미노 순례길. 그러나 나는 걷기로 했다 — 무엇보다 나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내가 깨달은 한 문장은 너무도 단순했다.

“One step at a time.”

한 번에 한 걸음씩.


희귀병 진단은 결국 수년간 일하던 대학병원 간호사 일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일’이라는 기둥이 무너지자, 자연스럽게 내게 스트레스를 주던 여러 요소들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오히려 삶의 의미도 함께 희미해졌다. 매일 무언가를 해내며 살아가던 나는 갑자기 멈춰 선 것 같았고, 삶은 지루하고 텅 빈 느낌으로 가득했다.


몸의 염증 반응은 이전보다 훨씬 줄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예전의 나는 마라톤을 여러 번 완주하고, 운동을 통해 큰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운동을 무리한 후엔 어김없이 몇 주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통증과 피로 속에서 회복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에 조금밖에 못 해도, 오늘을 무사히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것.

자기 돌봄과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결국은 내 삶을 다시 채워줄 수 있다는 가능성.


까미노의 800km 순례길도 하루하루가 쌓여 가능했다.

그리고 그 하루는 늘 “한 걸음”에서 시작되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이 하루도 결국은 그런 ‘한 걸음’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여정 가운데,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조용히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의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안식 가운데 거하라.”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더 강해야 하고, 더 바빠야 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통과 멈춤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속에 찾아오셨다.


일을 멈춘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순간 속에서, 그분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평안과 은혜로 덮어주셨다.

내가 가치 있다고 느꼈던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남아 있었다.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딸이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이제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파트타임으로 방문간호사 일을 다시 시작했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고, 나를 돌보고 삶을 가꾸기에 좋은 여건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새로운 시간들을 어떻게 의미 있게 채워야 할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에서 벗어나 나를 돌보는 것, 느리지만 정직하게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리고 이전처럼 성취가 아닌 존재 자체로 충분한 삶을 만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질문을 안고 살아간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내일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돌보는 이 시간이, 어떻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그리고 매일 아침, 조용히 하나님께 묻는다.

“주님, 오늘도 제가 당신의 안식 안에 머물게 해 주세요.”

“제가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내도록 도와주세요.”


아직 답을 다 찾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다.

내 삶은 오늘이라는 작은 걸음들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나는, 오늘도 조용히 한 걸음을 내디딘다.

그 걸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시작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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