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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May 21. 2024

바다가 없는 스위스의 대형 화물선

쿠바 봉쇄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상징한다고 알고 있다.

전쟁 중에 한 군인이 네잎클로버를 보고 따려고 허리를 숙인 순간에 저격수의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는 행운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복이 없는지 클로버 무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아무리 찾아봐도 본 적이 없다.

바다와 선원들 세계에도 미신을 믿는 경우가 많다.

예전 뱃사람들은 바다를 변덕스러운 여신처럼 생각했는데 폭풍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면, 바다 여신이 노해서 그런다고 믿었다.

그리고 여성이 배에 타면 여신이 질투해서 파도가 더 친다는 미신이 널리 자리 잡았다.


현대에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아 이스라엘이나 러시아 상선에 여성 선원이 많이 타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 함정에 여성 장교가 타고, 상선에도 여성 해기사가 여럿 승선하고 있다.

여성이 상선에 승선하고 30여 년 만에 여성 선장과 도선사가 화물선을 지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영국에선 이미 래전에 영국 해군 5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함장이 나왔다.

앞으로는 만여 명이 승선하는 20만 톤짜리 대형 크루즈선에 여성 선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뱃사람 사이에 전해오는 미신 중 순기능을 가진 것도 있다.

배에 앉은 다친 새를 된장 바르지 않고 치료해서 날려 보내거나, 날아온 날치 같은 물고기를 맛있다고 초장에 날름하지 않고 다시 좋은 데 가라고 바다에 던져주는 것이 배의 안전 운항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의 'HAPPY LATIN' 호는 도미니카의 아름다운 항구 두 곳에서 무사히 하역을 마치고 푸르디푸른 카리브해에서 순풍에 돛 단 듯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쿠바 아래 케이맨 제도를 지나고 있다.

조금 더 가면 좌현 쪽으로 멕시코 만의 유명한 휴양지 칸쿤을 지날 것이다.

비키니 입은 여인을 멀리서나마 눈요기할 수 있으려나?

몇 년 전 이탈리아의 크루즈선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가 해안에 더 가까이 가려고 항로를 바꿔 접근하다가 암초에 배가 좌초되고 배가 옆으로 누워 수십 명의 승객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다가 선장은 승객 구호 조치를 하지 않고 먼저 탈출하였다.

그리고 복귀 명령도 무시하여 엄청난 비난과 함께 살인죄로 형을 살고 있다.

대한국민이 운항하는 상선에서는 비키니를 보려고 항로를 바꾸는 그런 정신 나간 항해사는 결단코 없으리라.


공선이라 배가 수면 위로 많이 떠 있다.

선주와 대리점에 산토도밍고 출항과 미시시피강 이스트 파일럿 스테이션 도착 예정 일시를 타전하고 통신실 볼트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갑판 선창에선 곡물 벌크를 실으려고 분주히 카 데크에 떨어진 자동차 기름과 오일 자국을 물청소하며 선창 천정에 붙이고 있다.

아스라이 섬들이 보이고 갈매기가 배 위를 예쁜 자태를 뽐내며 날아다닌다.

우월한 미모와 몸매의 도미니칸 세뇨리따의 실루엣이 겹치며 다시 오지 않을 꿈같은 순간을 되새긴다.


멀리 스위스 소유 MSC LINE의 컨테이너선이 지나간다.

국토의 대부분이 알프스산맥에 걸쳐있고 땅이 척박하여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는 나라.

아름다운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나라 스위스가 관광산업과 고급 수제 시계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다가 없는 스위스가 대형 선박을 많이 소유하고 운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스위스의 선박회사 MSC LINE이 의외로 컨테이너 선복량 세계 1, 2위 덴마크 머스크 선사와 다투고 있다.

그 뒤를 프랑스, 중국, 독일, 일본, 대만이 뒤따르고 우리나라 현대상선의 후신인 HMM이 8위를 하고 있다.

해운 선진국인 미국과 영국이 선복량에서 한창 밀리고 있다.

MSC 회사의 명칭은 Mediterranean Shipping Company, 지중해 해운회사이며 1970년에 설립하였다.

MSC 사는 스위스에 바다가 없어 벨기에의 앤트워프항을 모항으로 800여 척이 넘는 컨테이너가 쉴 새 없이 전 세계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


스위스인들이 우리가 알기보다 억척인 것에는 용병을 봐도 알 수 있다.

스위스 용병은 신의와 명예를 목숨처럼 여겨 잠시 물러서면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도망치지 않았다고 한다.

알프스에 농사지을 땅이 별로 없으니 가난한 자가 먹고살 일이 고단하다.

그런데 용병으로 나가서 비겁한 모습을 보이거나 신뢰를 잃으면 동료와 후손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그들에게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던 강군으로 소문나 있다.

바티칸에서는 지금도 명예와 용맹의 상징인 스위스 용병을 근위병으로 고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물류가 이동할 수 없기에 반도 국가가 아니라 섬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좁은 땅에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해상무역권을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후손으로서 삼 면의 바다를 잘 활용하여 해운 강국으로 번성하길 해양인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란다.


지금 지나고 있는 우리가 잘 모르는 쿠바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카리브해에서 제일 큰 섬나라인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의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이다.

15세기 신항로 개척시대에 후추와 향신료를 찾아 헤매던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착각하고 상륙했던 곳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아르헨티나인 체 게바라가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유지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어우러진 국가로 가려고 했. 

그러나 미국의 지나친 간섭과 피그만 침공 등 압박에 열받아 소련과 친하게 지내며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구소련이 해체되고 경제가 매우 어려워졌다.

북한처럼 사상의 자유가 완전히 통제된 국가는 아니며 나라님을 욕한다고 잡아가지도 않고 어느 정도 자유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쿠바에는 3페소짜리 지폐와 동전이 있다.

그리고 이 돈의 표지 모델이 중남미 전설의 혁명 지도자 '체 게바라'라서 기념 소장품으로 인기가 좋아 그의 사진이 들어간 티셔츠만큼이나 잘 팔린단다.


60년대 소련의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로 미국과 소련이 냉전 중 최고로 대립한 군사위기가 있었다.

50년대 말 실제 핵전력은 미국이 월등했지만, 소련은 가가린의 유인 우주 비행과 같은 홍보 효과와 철의 장막으로 자국에 불리한 정보를 철저히 은폐해 소련의 핵이 미국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뻥을 치는 게 먹혔다.

그런 와중에 소련이 미국을 코앞에서 타격할 수 있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하니 미국 안보에 큰 위기가 온 것이다.

그렇게 기지가 건설되던 중 미군 정찰기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하여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에 케네디 정부는 봉쇄를 택했다.

미합중국 해군은 항공모함과 90여 척의 대규모 함대를 보내 쿠바의 영해를 봉쇄한다.

이어 1,500대가 넘는 전투기를 소련의 핵 폭격에 대비해 요소요소에 배치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의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강제 수색과 압수 명령을 내리고 거부할 시 격침하라는 초강수를 둔다.


반면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은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깡패짓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아래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쿠바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NATO에 비상이 걸리고,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고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인류가 두려워하는 3차 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당시 소련 선박들은 핵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만약 소련 선박이 공격받았다간 바로 핵전쟁이 터질 상황이었다.

바티칸에서 교황은 라디오 방송에서 벌벌 떨며 '지금 우리 세계에서는 전쟁이 아닌 평화가 필요하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쿠바 상공에서 미군 정찰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고, 소련 핵잠수함이 핵 어뢰를 발사하려고 하는 등 모든 상황이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백악관에서 안보 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 곧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공포에 질린 것은 미국 수뇌부뿐만 아니었다.

소련 역시 엄청 쫄았다.

모스크바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모스크바에서 피난 나오는 행렬을 보고 모두 경악했다.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해상전력조차 미국보다 훨씬 약했던 소련은 끝까지 가면 지네가 먼저 망할 수도 있기에 흐루쇼프가 꼬리를 내렸다.

흐루쇼프는 43살에 대통령이 되어 애송이라고 얕잡아 봤던 케네디에게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미사일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흐루쇼프는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렇게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만약 핵전쟁이 터졌다면 소련과 쿠바는 확실하게 망했겠지만, 미국도 초토화되어 그 후유증이 오래갔을 것이다.

그 틈에 북한이 남침을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 남한은 보릿고개 넘기며 먹고살기도 힘들고 매우 혼란했었다.

한강의 기적은 몇 년 후의 일이고 미국이 쪼그라든 것과 함께 대한민국 역시 열강들에 눌려 지도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쿠바 남동쪽에 있는 관타나모는 콜럼버스가 상륙한 이후 스페인 땅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스페인과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그전 해 독립한 쿠바로부터 관타나모만을 미합중국 해군기지로 영구조차 하였다.

미국은 쿠바에 조차료로 매년 금화 2천 닢, 현 시가로 약 4천 달러를 지불하기로 한 날강도 같은 계약이었다.

미국과 쿠바는 카스트로 정권 이래 국교가 단절되었지만, 미국은 바로 적대국 안에 해군기지를 운영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카스트로는 주야장천 미군 철수 및 즉각 반환을 요구했다.

지만 미국은 계약대로 푼돈을 주면서 그냥 개겼다.

그렇다고 쿠바가 그 땅을 찾기 위해 전쟁을 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유명해진 이유는 포로수용소 때문이다.

관타나모 기지 자체는 쿠바 영토에 있으나 미국의 통치를 받는다.

법은 쿠바 법도 미국 법도 아닌 군법만이 적용되고 있다.

해군 대령이 기지 사령관으로 항만 시설, 공항과 학교가 있고 알카에다, 탈레반 조직원들의 포로수용소가 있다.

수감자 대부분은 테러 혐의가 있는 아랍인들이며 감금하여 학대, 고문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테러에 가담할 수도 있다는 의심만으로 알카에다 조직원이 아닌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이 그럴 수 있던 건 쿠바 땅이면서 미군이 지배하는 곳이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관타나모 해병대에서 수감자에게 한 가혹행위로 떠들썩한 적이 있는데 내 그럴 줄 알았다.

힘 있는 자들이 말로만 정의 운운했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왜곡하고 안면 바꾸는 게 세상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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