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언제 봐도 어머니 품같이 편안하고 오목조목 가슴에 와닿는 바다. 동지나 해는 고국이 가까워서 좋고, 태평양과 대서양은 사나운 파도가 있어 마도로스가 배 타는 걸 실감 나게 해서 좋고, 지중해는 저 먼 옛날 희랍의 용사들이, 로마의 십자군이 건너다녔기에 어렸을 때부터 가슴을 설레게 하고 지금도 참 좋아하는 바다이다. ‘HAPPY NINA’ 호는 그 잔잔한 바다 위를 대왕고래가 유연하게 물살을 헤쳐가듯 미끄러져 가고 있다. 다시 통신실 옆 덱에 나와 있다. 시원한 미풍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린다. 담배 연기 사이로 저 멀리 스페인 영토가 아스라이 보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치는 화물선과 어선들. 그리고 꼬리를 무는 우리 배 프로펠러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흔적.
어머니의 편지. 편지지에 빼곡하게 예쁜 필체로 메우신다. 일제 강점기에 고녀를 나오시고 평생을 어린 왕자에 칭찬과 격려로 일관하신 어머니. 지금은 세상 사람이 아닌 까칠했던 형수조차 칭찬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드디어 남희에게 칼을 뽑았다.
사랑하는 막내야!
전에 충신동 살 때 친구들과 같이 왔던 그 아가씨는 어떻게 됐니?
에미가 지금까지 눈에서 지워지지 않으니.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니?
유빈 누나도 까탈스러운 네가 그때 라면 나누어 먹던 아가씨 이야기를 듣고, 얼굴은 모르지만 자기 올케로 점찍고 있단다.
물론 에미의 칭찬도 한몫했다만.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경치 좋은 도봉산 밑에 아파트 하나 사놓았다.
네 월급으로 전세, 융자 안고 샀다.
한국에 돌아와서 마음에 들면 전세 빼고 들어가 살아도 된다.
하하하. 어머니! 지금 당신 막둥이가 열병을 앓고 있다우. 어머님이 전쟁 끝나고도 권총 차고 다니던 아버님 만나서 그렇게 애간장 녹았듯이. 아~ 상큼한 바다! 왜 남희만 생각하면 온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고 이리 행복할까? 내가 맛이 갔을까?
“국장, 국장! 방송 듣는 대로 쵸사와 같이 선장 집무실로 오세요.”
안 선장님의 방송 소리가 들린다.
‘아, 나미야, 잠깐!’이라고 혼잣소리하고 캡틴 방으로 간다.
“어이, 국장! 요즘 왜 이리 보기 힘들어요?”
캡틴의 반가움이 묻어나오는 말에 씩 웃는 거로 대답한다.
“쵸사도 거기 앉고.”
일항사와 나는 캡틴 집무실 소파에 엉덩이를 걸친다.
“자, 왜 오라 했냐면 만기가 안 된 다른 선원은 아테네에서 매선수당 받고 다 귀국하기로 했다네. 우리 셋이 남았네. 그럼 쵸사는 전선 해도 되나?”
일항사가 대답한다.
“네, 선장님. 저도 애 엄마 보고는 싶은데 돈 들어갈 데가 많아서....”
캡틴이 고개를 끄떡이며 나를 쳐다본다.
“네, 선장님. 저는 못 먹어도 고지요. 그런데 피리우스에서 시간 나면 독일 좀 날아갔다 오면 안 될까요?”
캡틴이 내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려. 스케줄 보고 결정합시다. 오늘은 나라님이 드시다 가신 위스키 한잔할까? 기관장님과 일기사도 부르게.”
배에서 술자리가 벌어지면 대부분 여자 이야기로 시작해서 기승전녀로 끝나기 일쑤다. 캡틴은 박학다식하고 경험이 많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종종 해준다. 모두 앉아 시바스 온더록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로 가는데 자네들 많이 들어 본 선박왕이라는 오나시스의 국적을 아나?”
“그리스 아닙니까?”
“이름이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라서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터키에서 태어났다네. 지들끼리 땅따먹기 싸움하다가 나중에 거기가 그리스 땅이 된 거야. 오나시스가 처음부터 부자였던 건 아니었대. 그가 우여곡절 끝에 그 당시 벌써 지하철이 다니는 화려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을 때 수중에는 단돈 몇십 달러밖에 없었다네. 그렇게 가난했던 그가 담배 장사를 하며 일어나 나중에 선박왕이 될지 누가 알았겠나. 그는 2차대전 후 필요 없게 된 군용 유조선을 헐값에 사서 수리해 운항하면서 비싸게 되팔아 서서히 부자가 되었다네. 게다가 사우디와 원유 수송권을 독점 계약하여 벼락부자 반열에 오르게 되지. 오나시스 국적은 세기의 미녀 올리비아 핫세와 같은 아르헨티나라네. 그렇게 세계 최대 선박왕이 되고 나중에는 당시 가장 매력적인 미합중국 대통령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재혼했잖은가? 우리 마도로스 출신도 중고선 하나 사서 잘 굴리면 그렇게 부자도 되고 미인을 만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하하하~.”
캡틴의 말에 우리도 부자가 되어 미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살짝 안고 마도로스를 위해 모두 건배했다. 한 모금씩 하고 안주를 집어 먹자 안 선장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기고 오나시스가 가자, 남은 재클린 여사는 많은 유산을 받아 그냥 묵고살았으면 이야기가 재미없지 않소? 그녀는 기자로 활동했던 가슴 뛰던 처녀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언론과 출판계에 뛰어들어 잡지를 발간하고 책을 출판하면서 사업가로 자리 잡아 케네디와 오나시스라는 전남편들의 후광을 뒤로 하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합디다.”
재클린은 오나시스와 결혼 생활 중에 불화로 이혼을 준비하다가 오 선생이 지병으로 돌아가시며 유언장에 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아 소송하여 적지 않은 유산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와 출판계에서 일하면서 마이클 잭슨의 자서전을 편집하기도 했단다.
시바스 잔을 마주치는 횟수가 늘자 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조금씩 졸음 모드로 가는데 캡틴 머리 위로 남희가 웃으며 손짓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여 애매 몽롱한 미소를 짓는다. 일항사는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며 ‘국장, 쟈 또 맛이 간 거 아이가?’라고 중얼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