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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03. 2023

눈 뜨면 보이지 않지만, 눈 감으면 떠오르는



하얀 눈이 소담스레 내리는 리버풀 항에서 선원들이 당직 교대나 상륙을 나가려고 서둘러 밥을 먹고 나간 후 늦게 온 나와 항사만 사관 식당에 남았다. 

“어이, 국장님!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오. 싱글벙글하는 걸 보니.”

나이가 열 살인가 많은 항사가 역시 방긋방긋 입을 못 다물면서 말을 걸었다.

“아, 저야 만날 웃고 살죠. 그리고 우리 선원들은 배 붙이면 봄날 아닙니까? 쵸사님 편지가 여러 통 온 거 같던데 뭐 좋은 소식 있어요?”

“우리 셋째 딸년이 엄마 닮아서 아주 영리한데, 이번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네. 그런 거 보면 아빠 닮은 것도 같고. 하하하.”

“그래요? 참 좋으시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그 애가 이번에 반에서 13등인가 올라서 26등 했대요. 자식이 참.”

“네~?”


“그나저나 우리 총각 국장님은 애인한테 편지 많이 왔소?”

“배 타는 놈이 변변한 애인이 있나요?”

“그래요? 전에 국장이 까르따헤나에서 잡은 아귀 에서 나온 구겨진 편지 같은 것을 주워 갔다고 하던데, 그건 뭔데요?”

“아, 그거요. 별거 아니에요.”

“아니, 편지를 바닷물에 던져 버린 모양인데 거 뭐야 같은 과에 선머슴같이 쫓아다니며 괴롭혔다는 그 웃기는 아가씨 편지 아니오?”

“아, 네…”


내가 말을 얼버무리고 있자, 항사가 침을 튀겨가며 계속 말을 했다.

“하이고, 오죽했으면 총각이 아가씨 편지를 바닷물에 집어 싸겠소.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쯧쯧. 그나저나 여기선 편지 한 통 안 왔소?”

“한 통 오긴 왔어요.”

“그래? 누구한테?”

“전에 항해 중에 맥주 한잔 걸치고 사는 게 뭔지 심란해서 전화 한 통화했더니 편지가 왔어요.”

“아, 그래요? 몇 년을 괴롭힌 여자가 하루아침에 바뀌면 얼마나 바뀌겠소. 살아 봐요. 사람은 잘 안 변해요.”

항사는 선장 진급을 해도 벌써 해야 했을 사람인데 자녀들이 많다 보니 선장 자리를 기다리며 몇 달을 노는 것보다 빨리 승선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으로 만년 항사를 하는 오지랖 넓은 사람이었다.


“그 친구 독일 특파원으로 간대요.”
내가 말하자, 깜짝 놀라며 항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능력 있는 친구구먼. 아가씨가 방송국 엔지니어도 대단한데 특파원으로 나갈 정도면, 국장한테 튕길 만도 하겠네.”
약간 머쓱해서 내색 안 하고 있으니, 항사가 다시 말을 잇는다.
“거 긴 머리에 엑스 자 젓가락질하면서 안주 잘 챙겨준다던 참한 아가씨는 편지도 안 온대요?”
“별일도 없었지만, 고무신 거꾸로 신었답니다.”
“애고, 쯧쯧!”

잠시 있다가 내가 물었다.

캡틴이 그러시던데 옛날 배에서는 Poop에서 밧줄 잡고 일 봤나요?”

“단어 뜻에 엉덩이란 말도 있잖소. 옛날엔 파도칠 때 풉에서 일 보다가 고기밥이 된 선원들도 꽤 있었다던데, 파도칠 때는 밥도 적게 먹었대요. 갑자기 왜?"

“그 아가씨 이름이…”

“뭐, 풉? 푸하하~ 선미라고? 아이고, 배야! 만날 뒷간 생각할 뻔했겠구먼."


기름 푸는 상황이 신경 쓰이는지 항사가 일어나며 말했다.  

“국장. 별일 없으면 바람이나 쐬고 오소. 하역이 아니면 같이 나가서 맥주라도 한잔할 건데.”

옷을 갈아입고 현문을 나오자, 갑판에서 화물 당직을 서던 동갑내기 항사가 인사하며 말다.

“국장님. 상륙 나가세요? 귀선하실 때 맛있는 거 좀 사가지고 오세요. 맥주는 제가 쏠게요.”

“어, 수고 많소. 혼자 나가려니 미안하네. 들어올 때 슈퍼스토어에 들러서 사딘과 하몬 좀 사 올게요."




회색의 공업 도시 리버풀 항의 하얀 눈을 맞으며 부두를 혼자 걸어 나왔다. 한때 해가 지지 않았다던 대영제국. 그 화려했던 시절과 수많은 영욕도 덧없는 세월 앞에 쇠락해서 많은 공장 굴뚝 연기와 겨울눈이 어우러져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비틀스가 먹여 살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리버풀. 시내로 나오니 현란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같이 머리를 가운데만 남겨서 빨강, 파랑, 노랑, 보라색 등 형형색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들, 인디언 복장같이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검은 가죽으로 가슴과 엉덩이만 가리고 다니는 아가씨들 하며 귀, 코, 입도 모자라 눈썹과 머리에도 피어싱한 젊은이들. 아무튼 세상 사람 제멋대로 사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엄지 '' 하고 미소 지으며 지나쳤다.


허름하면서 조명이 은은한 펍이 보여 눈을 털고 들어가 기네스 스타우트와 피시 앤 칩스 작은 걸 주문했다. 유럽은 이렇게 오래된 술집이 맘에 든단 말이야. 어쩌다 운 좋으면 역사에나 나오는 사람 빛바랜 실물 흑백사진과 사인 볼 수 있지. 달짝지근하면서 쌉쌀한 흑맥주가 목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눈을 감고 음미했다. 크!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맛에 배를 타지. 내 돈 내고 이런 데 상상이나 했겠어? 기네스를 몇 병째 마시다 보니 성에 낀 유리창 밖으로 하얀 거리를 흘러 다니는 유니언잭의 디아블라와 남희의 웃는 모습이 흐릿하게 유영하는 것 같았다. 눈 뜨면 보이지 않지만, 눈 감으면 떠오르는


코인 뮤직 박스에서 누군가 넣은 로버타 플랙의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분위기와 기네스에 취해 노래를 듣다 보니 남희 편지가 생각났다. 젊은 친구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색 안 하고 자신과 싸워왔다니… 그녀의 말 못 한 많은 고통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 전해지는 것 같아 싸해졌다. 나와 그녀의 전혜린 씨에 대한 애증은 처절한 외로움과 왕따 속에서 그래도 왜 더 치열하게 싸워보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이고, 진 자는 말이 없지만 왜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느냐고 절규하는 것이다. 결국 특출함과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 사회가 죽인 많은 천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 마음 변하기 전에 배로 돌아가 편지를 써야지.

답장을 기다릴지 모르는 남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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