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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04. 2023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때 해가 지지 않았다던 영국의 리버풀 항에서, 콜롬비아의 까르따헤나 항에서 싣고 온 원유를 다 풀어준 유조선 'NAMMI SPIRIT' 호의 승조원들은 어스름한 새벽의 잿빛 항구를 벗어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All stand by~ All station!"

“브리지, 여기 폭슬! 감도 좋습니까?”

“브리지, 여기 풉! 감도 좋습니까?”

선교에서 항사가 출항 준비를 위해 올 스탠바이 방송 소리에 이어 잠시 후 선수와 선미에서 항사와 항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선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이어 항사 대신 직접 마이크를 잡은 억센 경상도 억양의 캡틴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잘 들려요. 사, 세컨사! 선원들 하역 마무리한다고 밤새 잠 못 자고 피곤할 테니 천천히 해요. 바쁜 거 없으니.”

“폭슬, 로~져~!”

오지랖이 넓어 느려 터지게 보이는 항사의 대답에 이어 해군 ROTC 중위로 전역하고 승선한 항사의 군기 든 목소리가 바로 이어졌다.

여기 풉, 라져!”


우리 캡틴 멋쟁이야. 저 불같은 양반이 오늘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이네. 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캡틴은 건장한 체구에 견장 네 개의 하얀 제복이 잘 어울린다. 대통령이 배에 도 선장 자리에는 안 앉는다는데 그런 위용에 걸맞은 선장이다. 콜롬비아에서 상륙 나갈 때는 솜브레로를 쓰고 콘도르가 새겨진 화려한 티를 걸치고 상륙하더니, 언제 선미 씨 이름을 다 기억하고 식사 마치고 나가면서 '오래전에는 풉에서 다 일 봤지'라고 한마디 하고는 그 말을 알아듣고 모두 웃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이야.


갑자기 선미에서 다급한 항사의 외침이 선내 스피커를 찢을 것 같이 들렸다.

“윈치 스톱! 스토~옵!!! 선장님 여기 풉! 타 손이 윈치 로프에 말려들어 갔습니다!”

“뭐라카노, 이놈의 자석들! 천천히 하라 캤더니, 윈치 살살 풀고, 삼항사 니는 빨리 풉으로 가봐! 국장은 빨리 대리점에 연락해서 구급차 오라 하시오. 야, 항사, 인마! 니가 당황하면 안 된데이! 기관장님도 풉으로 올라가 보소.”

배가 부두에서 움직이지 않게 묶어 둔 굵은 로프를, 출항하기 위해 풀어서 배로 감아올리던 중 황소 눈의 타수 손이 장갑과 함께 딸려 들어간 것이었다. 본선에서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부두에 대기 중이던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위급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지휘하는 거대한 화물선의 최고 책임자인 캡틴의 노련미가 돋보였다. 선주가 일없이 월급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지. 선박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항해 중이든 하역 중이든 스케줄에 맞춰 시도 때도 없24시간 움직인다.


본사, 용선주와 대리점에 출항 전문을 보내고 통신실 옆의 데크로 나갔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영국 땅. 선미 쪽을 쳐다보자 아까 난리를 쳤던 사고 현장에 검붉은 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애고, 손가락이 형태도 없이 다 짓이겨졌다던데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팔까지 말려들어 갔더라면…. 선내에서 도끼 춤추고 만기를 채운 선원이 없다더니 결국 그렇게 가는구나. 그리 보고 싶어 하던 사랑하는 가족에게.




배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물거품이 좌현 쪽으로 긴 타원형을 그리는 것을 보니 지중해를 향해 선수를 돌리는가 보다. 남희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친구 선미 씨를 소개해 줬다가 가지도 않은 시집을 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버리려아쉽고 남 주긴 아깝다는 그런 건가. 맥주 한잔하고 그녀의 씩씩하고 밝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밖에 없었는데. 남희 그 여시가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남희의 편지를 받아보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그런 깊은 고뇌가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머슴애들만 있던 과를 호령하던 여걸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아파했던 전혜린과 Nina의 삶을 그녀는 이미 십 대에 고민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러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을까. 역시 나는 아직 어려.


전에 키일 운하를 통과할 때 맞은편에서 오는 배를 먼저 보내기 위해 잠시 계류 중에, 갈대숲 우거진 곳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카페가 보여 배에서 내려 시나몬이 든 레드 와인을 한 시켰다. 그리고 ‘나는 Nina의 숨결을 따라 여기까지 왔고 혜린이 누나와 달리, 살며 사랑하고 즐기기 위해 북해의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글뤼바인을 마시노라.’라고 쓴 엽서를 남희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길 가던 알프스 소녀 하이디 닮은 예쁜 독일 아가씨가 뭔가를 묻기에 ‘No speak Deutsch. Can you speak English?'라고 되물으니, 그녀는 고개를 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예쁜 엉덩이를 흔들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나저나 편지에 쓴 대로 남희가 신방과를 안 가고 통신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특파원으로 나가게 됐고 방송하다가 장비가 고장 나면 자기가 고쳐서 쓰면 되니까. 그러면 방송국에서 얼마나 예뻐할까? 리버풀에서 보낸 내 편지 받아나 보고 출국할까? 독일에서 만나게 되면 시나몬과 스위트 바질이 든 따뜻한 레드 와인을 같이 마셔야지. 그리고 남희가 보낸 편지 하나도 안 버렸다고 보여줘야지. 구겨지고 아귀 에서 바래진 편지는 안 보이게 속에 넣고. 뽀뽀해 주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까르따헤나의 그 아귀한테 어떻게 고맙다고 전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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