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운엽 Dec 07. 2023

우리는 더 말할 수 없었다




“모처럼 싸롱 사관들이 다 모여서 식사하는구먼.”

중동을 향하여 빈 배에 바닷물만 채워서 가는 밸러스트 항해로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진입한 어느 토요일, 점심이 끝나가던 중 캡틴이 말문을 열었다.

“모두 수고했고 대리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타 손가락을 개만 절단했다카네. 그나마 항사가 신속하게 사고 수습을 해서 그만하길 다행이다카이.”

캡틴의 말에 항사가 밥을 먹으며 말했다.

“선장님, 리버풀에서 타를 강제 하선시키는 것이 더 나을 뻔했습니다. 도끼 춤추는 아들치고 만기를 채우는 경우는 못 봤다 아닙니까?”

“그려, 내가 생각이 짧았네. 징계위원회에서 국장과 갑판장이 하도 한 번만 봐주자 해서, 앞으론 원칙대로 합시다.”

머쓱해진 내가 안 돼 보였는지 기관장이 거들었다.

타가 신혼인가 본데 마누라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랬겠소. 이놈의 배를 빨리 막살하든지 해야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캡틴이 항사에게 말을 건넸다.

사! 딸아가 공부를 잘한다며?”

항사의 얼굴이 환해지며 말을 이었다.

“선장님 그걸 우찌 아십니까? 셋째 딸년이 절 닮았는지 똑똑한 편인데, 이번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네요. 하하하.”

“어이, 사. 초등학교 반 학생이 몇 명이나 되는데?”

“네~?”

항사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나머지 사관들은 모두 킥킥대고 웃었다.


“어이, 조 국장. 거 풉인가 남희 씬가 뭐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보소.”

캡틴의 말에 나도 화색이 돌며 입을 열었다.

“아, 그거 아세요? 제가 남희와 밤새운 이야기요.”

“뭔데, 뭔데?”

항사가 의자를 끌어당기며 재촉하고 메싸롱 사관 식탁 한쪽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동갑내기 항사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아, 그때 눈 오는 날 남희와 동숭동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 더 마시고 동대문까지 걸어 나왔거든요.”

“햐, 눈 오는 밤에 그림 좋고! 그래 손은 잡고? 어디로 갔소?”

“야야야, 사! 푼수 좀 고만 떨고 들어보소. 아무튼, 천상 배 묶기라니까.”

“그래서 남희를 바래다주려고 중곡동 가는 588번 좌석버스를 같이 탔어요.”

“나도 거기 총각 때 몇 번 가 봤는데, 거길 아가씨를 데리고 갔다는 말이여?”

항사의 말에 캡틴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잘랐다.

“저 능청하고는, 아 거기 말고 588번 버스를 탔다잖소!”

“겨울에 서울이 좀 추워요. 따뜻한 버스에서 소주도 한잔 걸쳤겠다, 좀 존 모양이에요. 남희 사는 동네에 다 왔는지 깨우더라고요. 버스에서 내려서 비몽사몽간에 집 앞에까지 바래다주려고 했더니 비틀거리는 제가 짠하게 보였는지 제 손을 잡더니

“에구, 자꾸 뜸 들이지 말고 그래서 어디로 갔소?”

잠자코 듣고 있던 기사도 다음이 궁금한 듯 재촉했다.

“일단 버스를 다시 타자고 하데요. 잠깐 존 거 같은데 어느새 동대문이에요. 다시 내려서 어떻게 하나 망설였죠.”

나는 십여 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쳐다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항사가 또 재촉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허, 참! 숨넘어가겠구먼. 동대문에 모텔하고 여관이 좀 많아. 그래서 어디로 갔냐니까? 빤쓰 색깔하고 빨리빨리 이야기 좀 해 보소."

“날씨도 춥고 통금 있을 땐데 버스 떨어지기 전에 집에 바래다주려고 다시 버스를 탔죠. 그러다가 조금 졸고

항사가 답답한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또 재촉한다.

“허, 참! 날 새겠네. 그래서 어디로 갔냐고~.”


캡틴이 갑자기 ‘푸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에이그, 가긴 어딜 가? 지금도 588번 버스 타고 졸다가 내렸다 하고 있겠지. 국장 술 먹다 앉은자리에서 조는 거 한두 번 봤소?”

모두 ‘아이고 배꼽이야!’ 하고 웃는데 항사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좌우를 돌아보며 ‘뭐꼬? 뭐꼬?’ 하고 있었다. 싸롱사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식사하던 항사도 항사의 큰 눈을 보더니 채 삼키지 못한 음식이 기도로 들어갔는지 캑캑댔다. 이어 캡틴이 주방에 있는 조리장에게 말했다.

어이, 주자. 앞으로 삼항사가 라면 먹을 때 국장하고 사가 웃기는 이야기 하가위 하나 갖다 놓으소. 잘못하다가는 생사람 잡겠네.”

항사는 기침을 하다가 아예 뒤로 넘어갔다.


"자, 모처럼 마작 한 판 할까?"

캡틴의 말에 모두 웃으며 휴게실로 향했다. 나는 기상 팩시밀리를 받으러 간다고 통신실로 올라갔다. 항사는 남희의 속옷 색깔이 그리 궁금했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다. 아, 갑자기 물밀듯이 솟아오르는 알 수 없는 울렁임. 한국은 밤 9시쯤 되었겠다. 집에 있을까? INMARSAT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아름다운 목소리. 

"나미니?"

"응? 어~~~."

잠시 서로 말이 없다가 가라앉은 남희의 목소리가 위성 전화로 들려왔다.


"짜샤! 많이 컸다."

.

.

.


"응, 나미"

.

.

.


"고생했어"

.

.

.


"나미야, 독일에서 만나면 키일 운하나 슈바빙에 가서 시나몬과 스위트 바질이 든 따뜻한 레드 와인 마시자."

.

.

.

"응, 그래. 따뜻한 글뤼바인..."

 

먼저 긴 터널을 뚫고 나온 이와 이제야 그 빛나던 지성과 열정의 혜린이 누나가 현실을 포기하고 자신을 망가뜨린 삶에 냉담해질 수 있는 늦둥이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아, 속절없이 비싼 위성 전화 요금만 올라간다.

작가의 이전글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