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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09. 2023

그대 그리고 나


잔잔한 지중해의 푸른 물살을 헤치며 오늘도 "NAMMI SPIRIT' 호는 수에즈 운하를 향해 거침없이 앞으로 가고 있었다. 넓은 바다를 항해할 때는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일상의 연속이다. 역시 때 되면 밥 먹어야지.

“어이, 조 국장. 식사하러 갑시다.”

다시 새롭게 다가오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있는데 캡틴이 통신실 앞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네, 먼저 가십시오. 금방 내려갈게요.”

보던 부분을 마저 보고 갈 생각에 얼른 대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가 울렸다.

“어이, 국장! 식사 시간이 끝나 가는데 혼자 뭐해요? 얼른 와서 밥 먹지 않고.”


“맛있게 드십시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며 인사를 하자 항사가 반갑게 대꾸했다.

“다 먹었는데 뭘 맛있게 먹으라고, 꼭 전화하게 만들어야겠소?”

“네, 미안해요. 던 게 있어서....”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캡틴이 웃으며 반겼다.

“어이, 국장! 기다렸다카이. 얼른 식사하면서 중곡동인가 동대문인가 그 아가씨 하고 재미있던 이야기 좀 더 해보소. 그래, 아직도 졸다가 내리고 비몽사몽간에 그러고 있나?”

사관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캡틴과 내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밥을 먹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 거기 아세요? 강촌이라고.”

“햐, 서울은 좋네, 산~넘어 강촌도 있고.”

오지랖 넓은 항사의 말에 캡틴이 웃으면서 말했다.

“또 시작이다, 사! 아, 자네가 잘 가던 청량리 588에서 기차 타고 가는 데잖아.”

모두 킥킥대는데 항사의 눈이 더 커지며 반문했다.

“저 세 번밖에 안 갔는데요?”

이번에는 오전 당직을 마치고 항사와 같이 식사하던 기사가 넘어갔다. 아이고, 어쩌나, 먹고 있던 음식이 항사한테 튀었네.

“과 친구들이 일요일, 강촌에 놀러 가자고 해서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그 아가씨도 같이 가는 거지?”

기관장이 싱긋이 웃으며 물었다.

“아뇨. 같이 가면 피곤할 거 같아서 제가 빼자고 했죠.”

“아니 그러면 재미없잖소.”

기사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묻자, 항사도 거들었다.

“어이, 국장. 우리 나이쯤 되면 거 뭣이냐, 사람은 있는데 사랑이 없단 말이야. 그런데 총각들은 사랑은 있는데 방이 없잖소. 아, 그런 얘기 좀 해보소.”

캡틴이 폭소를 터트리며 항사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어, 사! 오늘 말 되네. 그거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와 러십니까, 선장님. 저도 총각 때 한 사랑했다니까요.”

항사의 말에 모두 웃고 있는데 이어지는 캡틴의 말이 더 걸작이었다.

“그래서 거기를 세 번이나 갔어?”

이번에는 항사가 먹던 것이 튈까 봐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댔다. 나도 웃음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 


"아, 들어보세요. 내 참 기가 차서, 친구들이 대충 다 온 거 같아서 표 끊고 열차를 타러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제 엉덩이를 걷어차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어떤 우라질 놈이’ 하고 뒤돌아보니 이 웬수가 숨이 목에까지 차 가지고 ‘야, 짜샤! 니가 나만 빼고 가자고 그랬지!’ 하는 거 아니겠어요. 동기들에게 전화를 해봤는지 어째 알고 부리나케 쫓아온 거예요.”

“그래서?”

기관장이 물었다.

“그 사나운 가시나를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있어야죠. 사실이 그러니 대꾸도 못 하고 김 팍 새서 열차 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아름다운 북한강 경치가 눈에 들어옵니까?”

“아니, 지금 연애하는 거요, 뭐요? 빤쓰 색깔도 모르면서.”

항사의 심드렁한 말에 모두 자지러졌다.

“구석에 처박혀 바깥만 보고 있는 게 짠했는지, 이 웬수가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놀다가 저한테 옵디다.”

기관장이 혀를 차며 거들었다.

“하이고, 무슨 그런 말괄량이 아가씨가 다 있어? 다 큰 처녀가 총각 엉덩이를 발로 차고 자기도 조금은 미안했겠지.”

“네? 그게 아니고 나미가 저한테 오더니 ‘야, 짜샤! 왜 기분 나쁘냐? 감정 있으면 말해~. 말하라고~!’ 하는 거예요. 나 참! 말로는 도저히 못 해보겠고, 그런데 갑자기 제 장난기가 발동하더라고요. 가만, 물 좀 마시고.”

컵에 물을 따르고 있자 캡틴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애고. 다음 항차 국장 연가 가면 심심해서 우찌 사노.”

“그래도 빨리 이 배에서 내려야 남희 씨가 있을 독일 가는 배를 골라 탈 거 아니요? 우리 배는 독일 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기관장이 웃으며 거들었다.


“‘야야, 나미야! 그만하고 앉아 봐. 내가 손금 봐줄게.’ 하니까 그 사나운 것이 ‘너 또 사기 치려고 그러지.’ 하면서도 호기심에 주섬주섬 앉더라고요.”

“손금도 보나, 국장이?”

기사가 묻자 나는 침을 튀겨가며 말을 계속했다.

“아, 일단 들어보세요. 턱 하니 예쁜 손을 제 코앞에 내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야, 이런 손금 처음 보네.’ 그랬죠. 사실 그때 처음으로 남의 손금을 보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죠.”

“푸하하~ 그랬더니?”

아무튼 군대나 배에서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눈빛초롱초롱하다니까.

“그리고 ‘야, 나미야! 너 무대나 카메라 빨 받고 살 팔잔데.’ 그랬죠.”

“아니, 그걸 어떻게?”

캡틴이 묻자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 조금 죄송하게(?) 생긴 아가씨는 공부나 재물 쪽 집어주면 되고 반반하게 생긴 애들은 그쪽으로 얘기하면 다 넘어가게 돼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거울하고 친하게 살았을 건데....

조용히 듣고 있던 기사가 또 물었다.

“아니, 국장. 정말 손금 공부하긴 한 거요?”

“아뇨, 수상학책 같은 거 읽어 볼 시간이 어디 있어요. 손이 차거나 붉은색이 안 보이면 당연히 건강에 문제가 있을 거고, 언제는 발금도 볼 줄 안다니까 아가씨들 죄다 양말 벗고 달려들더라니까요.”

모두 식탁을 치고 손뼉을 치며 웃는데 항사 말이 더 웃겼다.

“빤쓰는 어캐 벗기는데? 똥금 볼 줄 안다고 하면 되나?”

모두 자지러져 넘어가고 ‘NAMMI SPIRIT’ 호는 오늘도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항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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