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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11. 2023

수에즈 운하에서 타는 듯한 목마름


지중해를 유유히 건너온 'NAMMI SPIRIT' 호는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 있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포트사이드 항으로 진입해 포트 컨트롤에서 지정해 준 위치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본선을 기다리고 있던 급유선으로부터 벙커를 받았다. 흰옷과 하얀 터번을 둘러쓰고 수염을 기른 이집트 상인들의 작은 배들이 우리 배 옆에서 물건을 팔려고 고함을 쳐댔다. 양배추와 오렌지가 싱싱해 보여 값을 물었더니 엄청나게 쌌다. 항구에서 선식을 통해 부식을 실을 때는 좀 비쌀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현지인들에게 직접 사는 것은 아무래도 싸다. 선원들에게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먹게 하기 위해 두 쪽배에 실려 있는 것을 몽땅 샀다. 영수증 처리야 현지인에게 직접 산 거로 해서 캡틴 사인만 받아서 본사에 보고하면 된다. 

그런데 그놈의 오렌지가 말썽을 일으켰다. 처음 먹을 때는 잘 몰랐는데 며칠 지나니 껍질에서 작은 벌레가 톡톡 튀어나왔다. 선원들은 질겁을 하고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성질을 냈다.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일항사는 농약 안 친 이런 것이 진짜 좋은 거라고 벌레를 개의치 않고 빠삐용처럼  오물오물  다. 사실 배에서 선원들이 못 먹어서 탈이 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장기 항해하는 외항선에서는 싱싱한 채소나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다. 옛날 대항해시대 범선 선원들은 장기 항해하면서 음식과 비타민이 부족해서 이나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 시대에 군인과 선원을 위해 과일 통조림이 나오게 됐다.

이어 예정된 시간에 현지 파일럿이 승선하여 운하에 진입하였다. 그 사막 언저리에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과의 전쟁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전쟁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파괴된 건물 잔해와 부서진 탱크도 보였. 대기 온도는 사십여 도에 육박했고 은빛 사막에서 불어오는 회색 모래바람과 함께 선박 통행량이 많아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에 시야가 좁아지고 숨쉬기가 거북했다. 늘 하던 수에즈 운하 통과 방법대로 선단을 구성해 차근차근 운하를 통과하여 홍해로 들어갔다.

통신실 볼트 문밖으로 낯익은 풍경을 바라보며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무선국과 포트 컨트롤의 통신을 듣던 중 선박 조난 통신과 호출, 응답 주파수인 500kHz에서 긴급 신호가 울렸다. 해상에서 조난 다음으로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모르스 통신이다. VHF 무선전화에서는 PAN PAN이라 하고 MAYDAY MAYDAY(SOS) 다음의 긴급통신이다. 얼른 주파수를 바꿔 수신해 보니 홍해 입구에 미확인 기뢰 주의를 알리는 전문이었다. 젠장, 전쟁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기뢰라니. 아무튼 멋모르고 항해하다 그런 것에 부딪히면 어쩌나?

긴급 통신문을 갖고 브리지로 올라가니 당직 이항사와 조타수만 천정에서 나오는 에어컨 구멍 아래에 서서 숨을 헐떡이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열흘 전까지 리버풀에서는 추웠지만, 적도가 가까운 사막 지방을 지나니 급상승한 기온에 체감 온도가 더 높게 느껴졌다. 해도를 보니 기뢰가 부유하는 위치와 본선 항로가 약간 떨어져 있었다. 노련한 당직 이항사가 항로를 기뢰에서 더 먼 곳으로 변경했다. 바다에서 부유물이 한 곳에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잖아. 바람 따라 파도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거니까. 많은 배가 통행하는 수로에 그런 위험한 부유물이 있으면 얼른 제거해야지 뭣들 하는 건지. 코스를 바꾸니 선미 쪽으로 커다란 물거품이 포물선을 그리며 따라온다. 캡틴이 눈을 비비며 브리지로 들어왔다. 운하 통과할 때 파일럿과 함께 선교를 떠나지 않고 배를 지휘하느라 무척 피곤했으리라. 베테랑 선원들은 자다가도 배의 미세한 변화와 엔진 소리를 금방 감지한다. 캡틴으로부터 '뭔 일인데?'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미소 지으며 긴급 통신문을 보여주었다. 전문과 해도를 번갈아 보고 기뢰 위치와 본선 코스를 확인한 캡틴이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내려갔다.

좌현 쪽으로 아스라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항에 입항하려고 대기 중인 선박이 많이 보였다. 선박 무선 전화 VHF에서 '치익~'하는 잡음과 함께 가끔 한국 선원들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 배 있어요?"
이어 들리는 '채널 12번으로 나오세요.'라는 한국말.
VHF 채널 16은 조난 통신을 위해 보호되는 주파수로서 근거리의 선박과 선박, 육상국 간에 호출, 응답할 때만 사용하고 실제 통신은 다른 채널로 바꿔서 사용한다. 한국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남희 목소리고 싶어졌다. 지금쯤 독일에서 업무 파악한다고 그 예쁜 가슴을 살랑이며 씩씩거리고 다니겠. 이제 다음 항구에 들어가면 만기 하선이다. 교대하고 남희를 만날 수 있는 독일에 자주 들어가는 배를 골라 타야지.

우리가 살면서 날마다 숨 쉬는 공기처럼 소중한 게 가족과 이웃인데, 그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옛말에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루한 항해 중에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동료 선원들이 있어서 오늘도 'NAMMI SPIRIT' 호는 망망대해를 외롭지 않항해할 수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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