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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19. 2023

기이한 인도 요기니



육지와 떨어져 배를 오래 타다 보남다른 행동을 하는 선원들이 가끔 있다. 육상에서도 은둔형 외톨이가 있다지 않은가? 항해 중에 다른 선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당직 끝나고 밥 먹으면 자기 침실에만 처박혀있다가, 선미에서 혼자 바다를 쳐다보면서 용왕님이 자기를 부른다고 뛰어내리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저렇게 아무도 모르게 밤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선원도 있다. 나처럼 상륙 중에 희한한 경험을 하고 내가 지금 제정신인지 아닌지 모를 때도 있다.


'NAMMI SPIRIT' 호가 소말리아 해적으로 악명을 떨치는 아덴만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입하니 전에 인도 최대 항구인 봄베이 항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영국 식민지 전 원래 이름인 뭄바이로 바뀌었는데 상륙 나갔다가 허름한 사리를 걸쳤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젊은 여인을 만났다. 후덥지근한 거리를 걷던 나에게 그 여인이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재미있는 게임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인도 여인들은 그들의 카스트 제도와 가부장 전통이 엄격하게 전해져 내려오기에 사리 끝의 남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남정네들과 좀체 눈도 안 마주치는데 먼저 말을 거니 이방인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물며 윤곽이 뚜렷하고 눈이 커다란 인도의 예쁜 여인이 말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숫자를 두 개만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건 또 뭐래? 아무튼 고개를 끄떡했다. 그중 더 좋아하는 숫자 하나만 생각해 보란다. ‘O.K.’라고 말하자, 그녀가 2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어~, 행운의 숫자라는 럭키 세븐과 내가 특이하게 쓴다는 말을 듣는 2를 생각했는데, 'You're right.’고 말하니 그녀가 생글거리면서 자기가 한 가지 게임을 더 해 볼 테니 맞히면 1불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래, 까짓거 뭐 1불쯤이야 'Go ahead, please.'.


당신이 좋아하는 꽃 두 종류를 생각해 보라 했다. 꽃 좋아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만, 특별히 이 꽃이라는 것은 없었기에 예쁜 장미꽃과 남희와 교정을 걸을 때 가을에 보았던 길가의 코스모스를 생각했다. 그러자 그중 하나를 지우라고 했다. 그녀는 ‘으음~’ 하고 내 눈을 쳐다보며 ‘Do you really like Cosmos?’라고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라는 생각에 ‘와우~’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 그냥도 줄 수 있는 건데 약속을 한 거니 선뜻 돈을 꺼내주었다.


그리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이름을 영어로 생각해 보란다. 이것도 맞추면 1불을 주란다. 자기가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여러 명 있다면서. 과연 그것도 맞출 수 있을까 해서 'N, A'에다가 끝 자를 'Y'로 해야 하나 'I'로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으니, 종이에 적어 라고 했다. 그녀가 볼 수 없게 손으로 가려서 적어, 접어주니 나미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의아하게 생각하고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웃음치며 자기는 요기니인데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능력이 생긴다며 ‘Gentleman, Give me one more dollar, please.’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손을 보라며 1달러짜리를 흔들면서 다른 손에 있던 이름 적힌 종이를 구겨 쥐고 잠시 후 손을 펴니 달러와 종이가 사라졌다. 내 눈을 의심하며 그녀를 쳐다보자 초롱초롱한 눈에 미소 띤 얼굴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Good luck!'하고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다가 잠시 후 뒤돌아보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보이질 않았다.


사파이어 빛같이 파르르 아름다운 아라비안 해를 도도히 가르고 있는 'NAMMI SPIRIT' 호의 후갑판에 서서 인도 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 그 요기니가 떠올랐다. 그녀가 내가 생각했던 숫자 2와 코스모스, 그리고 남희 이름을 알아맞힌 건 결코 우연일 수가 없어. 아무튼 뭔가가 있는 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전을 가르는 파도 소리와 함께 멀리 인도 쪽에서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은 어선들이 그물질하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어선 주위에서 일용할 양식을 먹으려고 다투듯이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배 옆으로 만새기 떼들이 오색영롱한 빛깔을 뽐내며 헤엄치고 있었다. 더운 바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 물고기는 여러 마리가 떼 지어 수면 가까이 헤엄치면서 좀체 낚시를 물지 않는다. 배가 정박 중에 베테랑 선원들은 이놈을 훌치기낚시로 잡는데 갑판 위에 올라오면 앞이마가 튀어나와 있고 족히 1미터가 되는 몸체가 시시각각 무지개 색깔로 변해 아름답다 못해 슬퍼 보였다.


그 물속에서 남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요기니의 했던 목소리도 겹쳐서 들려왔다.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요기니 말이 우리의 현재는 이미 오래전에 다 정해진 거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거라고도 했다. 나도 오랜 단조로운 해상생활에 조금 맛이 가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니,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슴에 비집고 들어온 남희의 비중이 너무 커져서 그런  아닐까? 만일 이게 사랑이라면 인연을 주는 건 우리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인가 보다.




물결처럼 흔들리는 시선 속에 조리장 영감님이 클로즈업되었다. ‘아니, 국장님. 한참 찾았잖아요. 오늘 메뉴로 레촌을 숯불에 굽고 있는데 와서 간 좀 보시고 한잔합시다.’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남미에서 즐겨 먹는 새끼 돼지 통바비큐 요리이다. 문득 떠오른 인도 요기니와 남희 생각에 갑자기 술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안에는 이미 몇몇 고참 선원들이 둘러서서 레촌 기름에 손과 입이 번드르르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싸롱에게 내 방에 가서 맥주 한 박스 갖고 오라고 시켰다. 냄새를 맡고 뒤따라 들어온 일항사도 싱긋하며 신이 나서 자기 방에서 맥주 한 박스 더 가져오라고 말했다. 선원들이 좋아서 지르는 함성이 아라비아해 한바다에 울려 퍼졌다.


참, 이 맛에 배를 타지. 내 돈 안 내고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이렇게 맛있는 새끼 통돼지 바비큐를 어디서 양껏 먹을 수 있겠나. 이런 자리에 이삼 등 항해사나 기관사 등 초급 사관들은 잘 끼질 않는다. 사관과 신사의 품위를 지킨다고. 그런데 일등항해사쯤 되면 새댁 시절을 훨씬 지난 줌마렐라처럼 낄 데 안 낄 데 가릴 거 없이 온갖 데 다 기웃거린다. 물론 사람 나름이겠지만, 선원들도 나이 어리면서 어깨에 힘을 주는 사관들보다는 분위기 좋게 같이 어울리는 인간적인 신사를 더 좋아할 것이다.


입에 살살 녹는 레촌에 맥주 몇 캔을 입에 털어 넣으니, 주방에서 보이는 배 뒤로 하얀 물거품이 길게 따라오며 남희가 손짓하는 것같이 보였다. 역시 너나 할 거 없이 외로운 바다에 오래 있으면 맛이 가는 게 당연한 모양이다. 만기 되면 얼른 하선해야지. 헛것이 보이거나 환청이 들려 저 바다와 용왕님이 부른다는 헛소리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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