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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20. 2023

망망대해 태평양의 일엽편주



캐나다의 아름다운 항구 밴쿠버에서 일본으로 갈 원목을 갑판 위에까지 가득 실은 화물선 ‘HAPPY NINA’ 호는 밴쿠버 아일랜드의 좁은 수로에서 뱃고동을 길게 울리며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좌우로 보이는 미국과 캐나다 땅에는 쭉쭉 뻗은 침엽수가 울창하고 멀리 보이는 높은 산 위로는 만년설이 뒤덮여 있다. 군데군데 보이는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림 같은 집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저런 예쁜 전원주택을 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 원목도 일본 어디에선가 저런 예쁜 집을 짓는 데 사용할 수도 있겠지. 나는 연가 중에 독일에 자주 들어가는 배를 알아보다가 독일 선주 배인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다. 배가 좀 낡고 급료는 좀 적지만 남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좁은 수로에 여러 척의 화물선이 빈 배로 또는 화물을 가득 실은 채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 곳곳에 하얗고 예쁜 요트와 윈드서핑 하는 이들이 보였다. 저 멀리 한진해운의 컨테이너선 ‘한진 인천’ 호가 따라오는 것이 보이고, 한국 선원들이 타고 있는 일본 송출선인 SANKO LINE의 벌크 캐리어가 빈 배로 앞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 포트 엔젤레스 항에서 승선한 파일럿이 호수같이 잔잔한 협수로에서 도선을 마치고 하선하자 북태평양의 거친 바람과 하얀 파도가 우리를 반겼다. 출항하기 전에 받은 팩시밀리 기상도에는 북태평양 저기압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다. 애고, 타자마자 이번 항차는 고생깨나 하게 생겼다.


선박 무선 전화인 VHF 채널 16번에서 본선을 호출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피 니나’ 호. 여기는 한진 인천 호. 감도 있어요? 오버.”

당직 이항사가 대답하는 소리가 ‘치~’하는 잡음과 함께 들렸다.

“네! 여기 ‘해피 니나’ 호. 감도 좋습니다. 오버.”

통신실에서 본사와 용선주, 그리고 대리점에 보낼 전문을 보내고 있는 동안, 브리지에서는 해양대 동문인 이항사끼리 채널을 바꿔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한진 인천’ 호는 세계 메이저급 컨테이너 선사인 대만의 에버그린에서 인수한 중고선인데 톤수보다 폭이 좁고 선체가 길어서 배는 잘 나가지만, 조그만 파도에서도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을 많이 한단다. 그래도 컨테이너선답게 엔진 출력이 높아 일반 화물선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서 금방 앞서갔다.


전문을 모두 타전하고 멀어지는 밴쿠버 아일랜드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덱으로 나갔다. 앞으로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보름 동안 육지라고는 알류샨 열도가 멀리 보이는 것밖에 수평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말 그대로 그저 망망대해이다. 한 바다로 나오니 파도가 더욱 거칠어졌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쳐서 몸이 금방 날아갈 것만 같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캡틴이 방송하는 소리가 선내를 울렸다.

사! 파도가 자꾸 세지니 원목 묶은 라이싱 한 번 더 확인하고 조여요. 그리고 부서별로 파도에 움직이거나 깨질 물건들은 잘 챙기고, 주자는 주방 단속 잘하소. 그릇 깨졌다고 선원들 굶기지 말고.”

여유가 느껴지는 캡틴의 우스갯소리에 모두 미소를 었다.


한겨울에 북태평양을 항해할 때 파도가 치든 말든 대부분의 배는 항로가 짧은 대권 항해를 선호한다. 만 톤이 안 되는 작은 배들은 하와이에 가깝게 항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대형선들은 알류샨 열도에 붙어서 북위 50도 전후로 항해한다. 태풍이나 허리케인같이 강한 저기압에서는 당연히 피항하지만, 북태평양 저기압은 위력이 그것만 못하기에 기상도의 바람 방향을 예상하면서 항해한다. 앞바람을 받으면 배가 잘 안 나가고 심하게 흔들려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다. 반면에 뒤바람을 받으면 속도는 잘 나간다. 어떨 때는 목적지에 하루 일찍 도착하기도 한다. 그럼 일찍 도착하고 기름 절약하고 신나는 거지. 그런데 일엽편주라는 말이 있않은가. 아무리 큰 배라 해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성냥갑만큼 작게 보이고, 저 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제가 커봤자 한낱 티끌에 불과하지.


멀리 앨버트로스 몇 마리가 배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신천옹이라고도 불리는 이 갈매기들은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배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쉬지 않고 쫓아온다. 큰 놈은 족히 삼사 미터도 넘는다. 좀처럼 배에 가깝게 붙지 않고 높은 데를 날다가 배에서 잔반을 버리면 어떻게 알고 사방에서 여러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와 쪼아 먹는다. 그렇게 보름을 쫓아오는데 잠도 날면서 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새는 제힘으로는 날 수 없고 바람이 불어야만  수 있단다. 그러니 일단 날면 어떤 놈은 번식기 때까지 몇 년이고 착륙하지 않는다니 세상에서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오래 나는 새이다.


참치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헤엄치는 빠른 물고기이다. 치는 다른 어류와 달리 아가미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헤엄칠 때 큰 입으로 들어온 물을 아가미 쪽으로 통과시켜 산소를 공급받게 진화하였다. 헤엄을 멈추는 순간 질식해 죽기에 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헤엄쳐야 하고 잠도 헤엄치며 자야만 하는 슬픈 운명의 튜나.


전에 어디 다쳤는지 갈매기가 갑판에 앉은 적이 있었다. 당직 서던 해군 중사 출신 항사가 웬 떡이냐고 잘 날지도 못하는 이놈을 잡아다가 털을 벗겨서 된장을 발랐다. 다른 선원들에게 같이 먹자니까 모두 고개를 흔들고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 버린 모양이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니 만만한 나에게 좋은 안주가 있다고 식당으로 오라고 꼬셔서 뭔지도 모르고 고맙게 잘 먹었는데 좀 질기고 맛은 별로였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항해 중에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라도 치면 캡틴이 어느 놈이 배에 날아온 것을 잡아 처먹어서 이렇게 파도가 치냐고 핀잔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배에서는 제 발로 날아온 맛있는 날치도 좋은 데 가라고 다시 바다에 던져준다.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속이 메스꺼운 가운데 남희가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뮌헨에서 슈팅하러 가면서 슈바빙 거리를 솔로가 아닌 카메라맨을 동반하고 전혜린을 생각하며 당당히 걸어갔다고. 우리가 때로는 절망할지라도 모든 걸 걸고 열심히 살며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생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걸…. 그래, 남희야. 네가 말하는 것은 다 하나의 음악이고 한 편의 시였던 거 같아. 북태평양의 차가운 날씨와 거친 파도에 속이 메슥거리는 데다 계피가 든 따뜻한 글뤼바인을 몇 잔 마셨더니 목이 따갑고 눈이 감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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