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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21. 2023

북태평양의 황천 항해



일항사와 일기사가 오후 당직이 끝난 토요일 저녁 8시에 싸롱 사관들이 휴게실에 모여 마작을 시작했다. 네 명이 하는 게임이라 일기사는 기관장 옆에서 맥주를 마시며 구경했다. 배에서 하는 오락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것이 마작이다. 노름은 논외로 치고, 우리나라 명절에 가족끼리 윷놀이나 고스톱 치듯이 일본, 중국에서는 할아버지, 며느리, 손자 등 가족이 같이할 수 있는 게임으로 자리 잡혀 있다. 우리나라 마작은 그들과는 달리 36개가 적은 104개의 마작 패로 게임을 하는데 화투나 카드보다 경우의 수가 더 많아 훨씬 재미있다. 막말로 화투에서 개패라고 포기할 패도 마작에서는 예술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파도가 심해서 배가 많이 흔들려 마작 테이블에 젖은 천을 깔고, 2단으로 쌓던 패를 바닥에 2열로 놓고 배가 흔들리는 대로 테이블과 의자를 움켜잡으며 마작을 했다. 배 의자는 아랫부분이 고리로 고정되어 있어 파도가 쳐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배의 흔들림이 심해져서 앉아 있기도 힘들어지고, 세워 놓은 마작 패가 자꾸 자빠져 아쉽지만, 판을 고 모두 자기 침실로 올라갔다.

배를 처음 타면 대부분 멀미를 한다. 멀미에는 약도 없고, 밥 냄새를 맡으면 올라올 거 같고, 물을 마셔도 먹는 대로 다 토해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 육지에 닿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버린다. 당사자는 꾀병도 아니고 노란 위액까지 다 게울 정도로 엄청 괴로웠는데 말이다. 베테랑 선원들은 웬만한 파도에는 끄떡하지 않고 파도가 조금 쳐야 소화가 잘된다나. 그런데 이번 항차는 북태평양에 들어서자마자 바람과 파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팩시밀리 기상도가 나오는 밤 11시 20분까지 통신실에서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해서 소파에 누워 루이제 린저의 책을 펴 들었다. 소파에 누워 있어도 배의 롤링, 피칭에 따라 몸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통신실 밖에서 캡틴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국장. 기상도 몇 시에 나오지?”
'네! 들어오세요. 11시 20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햐~ 이번 저기압은 굉장한데. 먼저 간 '한진 인천' 호는 항로를 어디로 잡은 거야. 알래스카 쪽으로 마냥 올라가던데. 배가 2만 톤밖에 안 돼 보이던데 이 파도에 괜찮을까 모르겠어.”
캡틴의 말에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국적선사 항해사들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어요. 한진에 똑똑한 친구들이 얼마나 많아요? 하루 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데, 국장. 독일 특파원으로 갔다는 그 아가씨 연락은 돼요?”
나는 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 자기가 슈테피 그라피라도 되는 양 경호원 대신 카메라 맨 데리고 뮌헨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네요.”
“그래, 잘해 보소!”
"글쎄요. 어머님이 원로 시인이시라는데 판자촌 출신에 뱃놈이....’라는 대답에 캡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마도로스 국장이 뭐 어때서."
대답하기도 뭐해 시계를 보니 기상도가 나올 시간이었다. ‘팩스 나올 시간이네요.’라고 말하고 팩시밀리를 켰다. 기상도가 칙칙 소리를 내며 나오자, 북태평양이 온통 시커멓게 보였다. 저기압이 강해지니까 기압선이 촘촘히 그려지고 풍속을 나타내는 콩나물 작대기가 9에서 11까지의 노대바람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캡틴이 이십여 분 만에 나온 기상도를 받아 쥐고는 부리나케 브리지로 올라갔다. 캡틴이 기상도를 보고 바람 방향을 예상해서 항로를 겠지. 북반구에서는 저기압 중심을 향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가니까 뒤바람을 받을 수 있는 항로를 택하는 것이 경제적인 운항이고 선원들도 덜 피곤하다. 다음 기상도가 나오는 새벽 5시 20분알람 시계를 맞춰놓고 침대에 누웠다.

금방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보니 남희와 동숭동에서 둘만 남았던 때가 생각났다. 눈 내리던 그날, 588번 버스를 타려고 이대 부속 병원 옆을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젊은이 중 한 녀석이 나도 못 만져 본 남희 가슴을 장난삼아 건드린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데, 그녀는 바로 그놈에게 다가가 ‘야, 짜샤! 방금 네가 내 가슴 만졌지?’라고 고함을 치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하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이리 와 봐, 이 자식아. 나도 네  한 번 만져보자!’라고 달려드는 통에 행인들은 자지러지고, 그 녀석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쳤다.

파도가 검은 하늘과 맞닿아 가련하게 흔들리고 있는 ‘HAPPY NINA’ 호의 깊은 밤. 파도 따라 침대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니 눈을 감아도 잠이 안 오데 파도가 갑판 위를 넘어 하우스 마린까지 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판 위에 가득 실은 원목이 이 험한 파도에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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