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운엽 Dec 23. 2023

침몰 위기의 ‘HAPPY NINA’ 호



“따르릉따르릉~”

억지로 눈을 감고 침대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비몽사몽간 시계 알람에 잠이 깼다. 5시 20분에 기상도가 나오니까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실수하면 안 되기에 벌떡 일어나 흔들리는 배 안에서 비틀거리며 통신실로 갔다. 파도가 약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요동을 쳤다.


브레시또 선원들에 Duty Free로 싸게 파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팩시밀리를 켰다. 주파수를 17메가 헬스 대에 맞춰놓고 볼트 문밖을 쳐다봤다. 한참 보고 있으니,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성난 파도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선수, 좌우 현으로 바닷물이 넘나들어 잠수함을 방불케 했다. 팩시밀리에서 ‘삐’ 소리가 나며 기상도가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신 상태가 양호한 것을 확인하고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 파도가 심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중심을 못 잡고 미끄러져 부딪쳐서 다칠 수도 있다. 자빠지지 않게 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아가며 대충 샤워를 마친 후 기상도를 받아서 선교로 올라갔다. 하우스 마린 맨 위에 위치하여 시야가 확 트여 있는 선교는 배의 무게 중심에서 멀기에 흔들리는 폭도 크다. 당직 일항사와 캡틴이 거친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가 선창을 넘어 선교 유리창까지 때렸다. ‘HAPPY NINA’ 호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 속을 항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로마다 있는 손잡이를 잡고 흔들흔들 기상도를 갖고 나타나니 캡틴과 일항사가 고개를 끄떡이고 굳은 표정으로 기상도를 펼쳐봤다. 저기압 세력은 더 커지고 본선은 그 중심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를 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망망대해에서 피항할 데도 전혀 없다. 본선이 저기압 진행 방향의 중심 쪽을 항해하면 뒤바람을 받아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고 옆바람을 받으면 거친 파도에 배가 요동을 쳐 라이싱한 와이어가 터져 갑판 위의 원목이 쏟아지면 큰일이다. 원목이 바다 위에 떨어져서 부메랑처럼 파도에 다시 본선을 때려 선체에 구멍이라도 나면 침수되어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선장과 항사가 기상도와 해도를 번갈아 보면서 항해할 코스를 의논했다. 캡틴의 지시대로 조타수가 키를 수동으로 바꾸고 항로를 변경했다. 일단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하고 캡틴과 나는 당직자들을 남겨두고 아침 식사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파도가 식당 창문 밖에까지 올라와 ‘HAPPY NINA’ 호의 갑판을 깨끗이 청소해 주었다.


배가 심하게 흔들려 국이 쏟아질까 봐 국그릇을 한 손으로 잡고 모래알 씹듯이 대충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선교에서 항사의 다급한 선내 방송 소리가 들렸다. 

“선장님! 5번 홀드 위의 와이어가 몇 개 터져 원목이 흔들거립니다.

선장은 방송을 듣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숟가락을 던져놓고 황급히 식당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진 모양이다. 바닷물이 갑판 위를 넘나들지 않을 때야 라이싱을 다시 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이 파도에 어쩌란 말인가. 한두 시간 만에 사그라질 파도도 아니고 몇 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원목이 파도에 휩쓸려 떠다니고 배가 침몰이라도 하게 되면 이 추운 바다에서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빙산에 깨진 타이태닉 호의 비극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일항사가 갑판부원들을 브리지로 호출하는 방송이 나왔다.

나도 선교로 올라가니 갑판부 선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고 기관장과 일기사도 올라와 있었다. 5번 홀드 위의 와이어가 몇 개 터져서 원목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본선과 전 선원의 생사가 걸려 있는 일이라 ‘HAPPY NINA’ 호의 총책임자인 캡틴이 긴장하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도에 라이싱이 터져서 이대로 운항할 수는 없소. 선수를 잠시 파도 방향으로 바꿀 테니 그사이 일항사, 갑판장 갑판부원은 라이프 재킷을 입고, 로프를 허리에 걸5번 홀드 위의 와이어를 새로 묶으시오. 워키토키 갖고 가고, 최대한 안전에 유의하시오. 나머지 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1층 현문 입구에서 비상 대기하시오.”

선원들이 움직이려 하는데 일갑원 윤 군이 나서며 캡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선장님. 갑판장님 대신 제가 갑판으로 나갈게요. 갑판장 행님은 가족이 많이 딸려 있고 나는 총각인께로 제가 나갈라요.”

일갑원의 말에 잠시 정적에 쌓였다가, 침묵을 깨고 캡틴이 입을 열었다.

사. 어찌했으면 좋겠소?”

잠시 머뭇거리던 일항사가 입을 열었다.

“선장님. 갑판장 나이도 있고 하니 일갑 의견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갑판장이 나섰다.

“안 돼요. 윤 군은 앞으로 살날이 구만 같은 놈이고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요. 그 마음은 고맙지만, 본선과 우리 선원의 목숨이 달린 이 일은 그래도  짬밥이 은 제가 해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기관장이 말문을 열었다.

“캡틴. 이러면 어떻겠소. 기관실에서 새 와이어 끝에 고리를 용접해서 달아줄 테니, 일항사와 갑판장5번 창 좌우현 네 군데에 엑스자로 걸어만 주면, 크레인으로 와이어 한가운데를 들어 올리는 거요. 임시방편으로 원목이 움직이지 않게 크레인과 같이 고정만 시켜놓고 나중에 파도가 잔잔해지면 그때 다시 라이싱 하면 어떻겠소? 크레인은 내가 조종할게요.”

기관장 말에 캡틴이 잠시 생각하다가 일항사와 갑판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작업 인원과 시간을 최소로 줄이려면 기관장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 윤 군의 고마운 마음은 잘 알겠네. 갑판장 몸에 묶은 로프나 잘 잡아주시오. 다른 의견은?”

구석에 있던 일기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기관장에게 말했다.

“기관장님. 동기인 일항사도 나가는데 제가 크레인에 올라가겠습니다. 영감님은 캡틴과 같이 브리지에 계십시오.”

모두 말없이 선기장과 일기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일기사, 알았네. 그러면 모두 신속하게 작업 준비하시오!”

캡틴의 명령에 갑판부 선원 모두 내려갔다.


캡틴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윤 군, 저놈, 이번에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면 내 직권으로 진급시키야겠네. 일기사 자네는 사와 함께 술 한 잔 진하게 살게.”

기관장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려~, 캡틴. 대단한 놈들이시. 일기사, 우리는 내려가서 용접 준비하세.

나도 가슴이 먹먹해져 고개를 숙이고 선교에서 내려와 조리장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고 고생하는 선원들을 위해 특식을 마련해 주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아버지 나이보다 더 지긋한 조리장은 파도에 지쳐 파리한 얼굴에 고개를 끄떡이며 ‘뭐 맛있는 걸 해야 잘했다고 할까’라고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음식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황천객이 될 수도 있는 우리 ‘HAPPY NINA’ 호 선원들. 이런 묘한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경험 많은 사람을 지칭할 때 산전수전 그리고 공중전 다 겪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 수전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북태평양의 황천 항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