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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Dec 24. 2023

아~ 한진 인천 호 이항사의 앳된 목소리

눈보라와 풍랑 속의 ‘HAPPY NINA’ 호


그동안 수 없이 많이 다녔던 북태평양의 우중충한 회색빛 바다에 거센 파도와 함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시월 초에 부산항에서 출항해 울릉도와 독도 옆을 지나 구소련의 노보로시스크 항으로 갈 때도 눈보라에 앞이 보이지 않아 레이더만 보고 항해한 적이 있었다. 파도만 치지 않는다면 낭만적인 항해일 텐데, 저 멀리 또 커다란 앨버트로스가 이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일용할 양식구하위해 하늘 높이 날아 우리 배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작업 준비가 다 되어 ‘All stand by! All station!’ 상황이 떨어졌다. 갑판으로 나가려고 현문을 열자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선내로 밀어닥쳤다. 선원들은 서로 쳐다보며 움찔하고 놀랐다. 아이고, 이 거친 바람과 풍랑 속에서  위험한 작업을 어떻게 하나일항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후 앞장서서 나가고 그 뒤를 일기사와 늙수그레한 갑판장이 따라나섰다. 라이프 재킷을 입고 안전모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묶은 로프와 무거운 와이어를 허리 안전벨트에 걸고 질질 끌며 눈보라를 헤쳐 가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사이베리아의 수용자 이반 데니소비치 같았다. 나머지 선원들은 세 선원을 묶은 긴 로프 끝을 각각 하우스 마린 난간 손잡이에 단단히 묶었다. 사나운 눈보라 속에 그냥 걷기도 힘들 텐데 요동치는 배의 미끄러운 원목 위에서 다른 보조 장비 없이 맨손으로 작업해야 한다니….


캡틴이 선내 마이크로 말했다.

“쵸사, 일기사! 원목이 얼어 미끄러우니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고 갑판장도 조심하시오.”

‘라져!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일항사가 칼바람 속에서 워키토키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일기사와 갑판장도 짧고 강단 있게 대답했다. 나머지 선원들은 여차하면 뛰어나갈 태세로 긴장해서 대기했다. 캡틴은 파도와 바람을 선수로 받게 배를 돌렸으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성난 눈보라와 미친 파도에 그게 그거였다. 미끄러운 원목 위를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걸어가는 세 선원모습을 모두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다. 시간이 흘러 갑판장이 어렵사리 좌현 두 군데에 먼저 와이어에 용접한 갈고리를 걸고, 이어 일항사가 우현에 걸어 엑스 자가 되었다. 그사이 갑판장이 크레인  고정 볼트 너트를 풀어주어 일기사가 크레인을 작동했다. 갑판장이 바람에 춤추는 무거운 크레인  힘겹게 잡아서 일항사와 함께 엑스 자로 만든 와이어 가운데에 걸고 일기사가 크레인을 들어 올리는 순간 선교에서 캡틴의 다급한 고함이 들렸다.

어~ 조심햇! 포트 쪽파도야!”

일기사가 두 선원이 다치지 않도록 크레인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작동시켰으나 순식간에 밀어닥친 산더미 같은 파도에 하얀 물거품만 보였다. 이어 ‘HAPPY NINA’ 호의 육중한 선체가 우현 쪽으로 심하게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현문에서 대기 중이던 선원들이 밖으로 우르르 뛰쳐나갔다.


스피커에서 캡틴의 고함이 들렸다.

“야! 쵸사, 일기사, 갑판장. 괜찮나? 얼른 대답해 봐!”

송신 키를 눌러야 말이 나오는 워키토키에서는 '치익' 하는 잡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우현으로 기울었던 본선이 복원력에 의해 다시 좌현으로 기울어 갑판을 덮었던 바닷물이 빠지고 원목의 윤곽이 드러났다. 두 선원이 고정한 엑스 자 와이어와 크레인  그대로 있고 원목도 유실되지 않았는데 작업하던 선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닷물을 흠뻑 뒤집어쓴 일기사가 크레인 운전대를 꽉 잡은 채 고함을 질렀다.

“선장님! 와이어는 크레인에 잘 걸렸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는 조종대를 꽉 잡고 있어서 괜찮고, 쵸사는 스타보드 원목 사이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 보이는데 갑판장이 안 보입니다. 브리지에서는 보입니까? 오버.”

이어 캡틴의 고함이 들렸다.

“에이, 씨펄! 어디 처박혔는지 여기선 안 보여. 야, 이항사! 갑판장 묶은 로프 얼른 확인해 봐! 미끄러우니까 서두르지 말고, 누구든 다치면 안 돼! 삼항사 니는 부원 한 명 데리고 얼른 5번 홀드 스타보드 쪽으로 가서 쵸사 찾아봐.”

“라졋!” 이항사와 삼항사가 워키토키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순간 갑이 고함을 쳤다.

“어, 저기 갑판장님 묶여 있는 로프가 포트 쪽으로 나가 있잖아. 뭐 해? 얼른 갑시다!”

하우스 마린 앞 난간을 붙잡고 갑판장을 찾고 있던 선원들이 좌현 쪽으로 동시에 우르르 몰려가서 바닷물에 잠긴 로프를 끌어당겼다. 묵직했다. 이항사가 캡틴에게 보고했다.

“선장님! 갑판장이 포트 쪽 바닷물 속에 빠져서 지금 로프를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오버!”

그래, 그래. 전부 달라붙어 얼른 건져! 얼어 죽기 전에. 하프 어헤드!”

캡틴이 속력을 반으로 줄이라고 큰소리로 명령했다.

“하프 어헤드, 써!”

조타수의 복창 소리에 이어 캡틴이 다시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 그리고 삼항사! 미끄러우니까 쵸사 찾아서 조심해서 데리고 와 응급조치하고, 실항사는 갑판부원과 들것 두 개 하고 담요 갖고 와! 싸롱과 메싸롱은 병원 침실에 침대 두 자리 준비해 놓고!”


선원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갑판장을 묶은 로프를 끌어당겼다. 나도 이 메어 울먹이며 로프 끄트머리에서 같이 잡아당겼다.

“영차~ 영차~ 여엉차!”

누구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모르지만, 선원들이 구령에 맞춰 로프를 힘차게 끌어 올렸다.




위기를 벗어난 선원들의 합창 소리와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선내 울려 퍼지고, 북태평양 깊은 바닷속에 사는 심해어도 놀래서 도망갈 정도로 선원들은 소주와 맥주를 마시며 울부짖었다.

‘HAPPY NINA’ 호를 구하고 겨우 살아남은 일항사와 갑판장도 식당 한쪽 구석 벽에 등을 기대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조리장이 정성스레 준비한 특식 앞에 앉아 있었다. 일기사는 콧물을 훌쩍이며 온더락 잔을 홀짝대고 있었고.


일항사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들이닥칠 때 바다에 떨어지지는 않고 원목에 끼어 여러 군데 타박상을 입었으나 게 다친 데는 없었다. 갑판장은 파도에 쓸려 바닷속으로 떨어져 기절했지만, 다행히 몸을 묶은 로프를 빨리 끌어 올려 구조될 수 있었다. 일기사는 그 엄청난 파도 속 긴박한 와중에서도 크레인 조종간을 놓치지 않고 꽉 잡아 침착하게 작동시켰고 또 그 바람에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았다.


경험 많은 노 기관장의 조언대로 원목 라이싱할 와이어를 크레인으로 고정해 작업 시간을 최소로 줄여서 귀중한 생명과 선체를 잃지 않았다. 만약 여러 명이 나가 일일이 라이싱을 조이고 있다가 파도를 맞았으면 사람도 잃고, 원목도 유실되어 부메랑처럼 ‘HAPPY NINA’ 호가 침몰할 수도 있었다. 이럴 때 나는 항상 중학생 때 배운 ‘Old man is wise man.’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에이, 영감님 건져 올리는데 디게 무겁더라. 거 살 좀 빼쇼.”

갑판장 대신 자기가 갑판으로 나가겠다던 윤 군의 말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갑판장은 바닷물에 절고 이리저리 부딪혀서 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은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떡이며 그런 일갑을 살갑게 쳐다보다가 한마디 했다.

“야, 이놈아. 이게 살이냐? 다 근육이다, 근육! 이번에 연가 가면 니 장가보내줄게.”

“아, 이쁜 따님을 절 줄 거요, 장인어른?”

갑판장의 말에 정색하고 윤 군이 물었다.

“야, 이놈아! 내 딸아는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괴등학생인데, 시집갔다 온 조카딸이라도 중매 서줄게, 걱정 마라!”

갑판장의 말에 또 한 번 선내가 폭소로 뒤덮였다.


잠시 후 캡틴이 앉은자리에서 말했다.

“여러분! 모두 수고 많았다카이. 크게 다친 선원도 없고 원목이 유실될 위기를 무사히 수습해 본 선장으로서는 너무나 고맙게 생각해요. 본사에서도 여러분의 노고를 치하하는 전문이 왔어요. 포상받을 사람을 부서별로 올리고, 이 기회에 진급 연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급하게 해 줄게요. 특히  군 회사에서 뭐라카든 내 직권으로 무조건 진급이다!”

“우와~ 축하! 축하! 축하!"

바다 사나이들의 함성과 웃음소리가 북태평양의 한바다에 울려 퍼졌다. 캡틴과 기관장은 선원들 편히 마시라고 자리를 뜨고, 오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남희가 낄 데가 없어서 미안하네.


이렇게 ‘HAPPY NINA’ 호의 밤은 깊어져 가는데 그 파도에, 밴쿠버 아일랜드에서 앞서간 ‘한진 인천’ 호는 조난 신호도 보내지 못한 채 북태평양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아~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진 인천’ 호 이항사의 앳된 목소리…. 북태평양에서 먼저 사라진 ‘한진 인천’ 호 선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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