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운엽 Dec 25. 2023

남희야, 드디어 독일 간대


북태평양의 황천항해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HAPPY NINA' 호에 대한 남희의 코멘트.


"아~, 네가 탄 배 선원들의 차라리 내 몸을 던져서 동료를 살리고 또 배를 구하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가슴이 멍하고 많이 울었다. 이러한 전우애를 비롯한 동료애는 남자들에게서 훨씬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정말 대단하고 내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나에게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내가 선뜻 저렇게 나설 수 있었을까? 난 아직 젊으니까 내가 할게요, 이럴 수 있을까? 저 산더미 같은 파도 속으로.... 결국 희생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를 던지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나의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은 결국 또 가짜였구나. 네 항해일지를 보면서 참으로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쵸사. 그 파도 밭에서 갑판에 나갈 때 기분이 어떻던고?”

“다른 생각할 정신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우리 배도 배지만 이거 잘못했다가는 집사람 과부 만들겠다는 생각에, 태어나서 그렇게 집중해 보긴 처음이었던 거 같아요.”

안 선장님이 묻는 말에 일항사가 술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 수고했소. 나도 여차하면 우리 선원들 모두 고기밥 되는 거 아닌가 싶어 십 년은 감수했네. 선장이야 배에 사고 나면 전 선원이 안전하게 퇴선할 때까지 본선을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기관장님, 그 살 떨리던 상황에서 어찌 그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소?”

캡틴이 묻자, 기관장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아이고, 캡틴. 나도 온통 어떻게 하면 기관부에서  역할을 할까만 생각했지. 그 파도에 원목 위에서 걸어 다니기도 힘든데 언제 와이어를 걸고 조인다우. 뫼비우스의 띠와 국장 애인 젓가락질이 스치더니 엑스 자가 팍 떠오르더군. 하하하.”


일본 요코하마항에 무사히 도착한 ‘HAPPY NINA’ 호는 밴쿠버에서 싣고 오다가, 파도를 맞아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원목을 하역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부두 근처 파친코 장에서 손 좀 풀고 다찌노미 집에서 캡틴과 고급 사관들이 오 사케를 한잔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국장은 좋겠소. 원목 다 풀어주고 다음 항차가 중국에서 콩가루를 싣고 독일 기점 유럽 다섯 항구에서 하역할 예정이라카니 애인을 만날 수 있겠네. 아예 거기서 만나 같이 배를 타고 다니는 건 어떤고?”

캡틴의 말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독일 선주 배를 잘 탔네요.”

일항사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 뭐여. 처녀, 총각이 오랜만에 만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주고 받고 하는 거 아뇨? 그리고 같이 자야 사랑을 확인할 기회가 생기든지 말든지 하지.”

모두 빨개진 내 얼굴을 쳐다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글쎄, 뭐 맛있는 걸 사줘야 하나?”

내 혼잣말에 일항사가 또 나섰다.

“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병 시켜놓고 칼질하면서  잡으면 되지 그래, 작업 한두 번 하요? 그 아가씨는 뭘 잘 먹는다요?”

“글쎄요, 학교 다닐 때는 뭐든지 먹었던 거 같아요. 한 번은 과 친구들 몇이 분식집에 가서 이것저것 시켰는데 그 애가 제 돌솥비빔밥에 있는 김 가루를  파리가 빠졌냐고 반쯤 퍼가더라고요. 말도 못 하고 그날 배가 고파서 혼났어요. 숟가락 놓고 돌아서면 배고플 땐데 학생들이 뭔 돈이 있었어요.”

“파전이나 어묵, 순대 그런 것도 잘 먹겠구먼. 우리 사람과 연애할 때는 시장 순대국밥집에도 자주 갔었는데.”

일항사가 북태평양 파도를 맞고 기절해서 쓰러졌다가 살아나니 새삼스레 가족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선주가 준 위로금으로 반지하고, 슈팅 나갈 때 입으라고 예쁜 정장 한 벌 사줄까? 남희 취향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언제 선물을 해봤어야 알지요.”

“야, 그 아가씨는 좋겠다. 이왕 사주려면 제일 좋은 거로 사 주소. 투자하면 어디 가나? 아가씨 때 기분 맞춰주고 시집올 때는 다 갖고 올 거 아닌가?”

기관장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캡틴이 앞에 있는 술잔을 비우고 안주를 집으며 말했다.

“일본은 참치가 이리 비싸노? 혼 마구로도 아닌 것 같은데 한 점에 오백 엔좀 비싸지.

“정말 비싸네요. 자갈치 시장 가면 그 돈으로 펄펄 뛰는 꼼장어 한 접시는 먹을 건데, 이거 어디 겁나서 안주 집어 먹겠나? 여기서 가격파괴 참치 전문점 하나 차리면 대박 나겠는걸.”

기관장의 말에 이어 캡틴이 대꾸했다.

“그러니 얘네도 마구로 한 점 갖고 ‘오이시데쓰네~’ 하면서 눈 감고 신주 모시듯이 벌벌 떨며 아껴 먹잖소. 얘들 월급 오십만 엔이면 우리 돈으로 얼마요? 그렇다고 얘들 사는 게 물가가 워낙 비싸서 우리 이삼백만 원 받는 월급쟁이보다 별로 나을 게 없을 거요.”

“맞습니다. 전에 Tokyo Marine 케미컬 탈 때 대리점 직원 집에 초대받아 갔었는데 아파트가 일억 엔 넘는다던데 방이고 거실이고 코딱지만 하더라고요. 우리 돈으로 십억 아닙니까? 저 같으면 그 돈으로 변두리에 정원 있는 큰 집에 살고 남는 돈으로 캠핑카 하나 사서 휴일이면 가족 데리고 벳부나 홋카이도 같은 곳에 놀러 다니면서 온천하고 맛있는 것 사 먹겠다.”


내 말에 입을 다물고 하품을 참던 캡틴이 말했다.

“그려. 국장 말이 맞지. 그건 그렇고 얘네들 친절하고 성실한 국민성은 세계 최고 아닌가? 그런 건 본받을 만하지. 자~,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테니 한 잔씩 더 마시고 들어오소. 나는 피곤하니 먼저 들어가네.”

“아니, 같이 들어가세. 내가 반 낼게.”

기관장 말에 내가 웃으며 대꾸했다.

“아~, 오늘 술값은 제가 계산했습니다. 모처럼 파친코 해서  땄거든요.”

잠자코 술을 마시던 일기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 국장,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마작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웬 파친코요?”

“하하하. 물가 비싼 일본에서 술값 좀 벌려고 시간 투자 좀 했죠. 이 비싼 땅에 시설비, 전기료를 누가 낸답니까? 돈을 딴다는 생각보다 확률에 승부를 걸었지요. 삼십 분 동안 일본 애들이 앉아 있는 기계 몇 대를 유심히 지켜봤어요. 지지리도 안 터진 기계 두어 군데 점찍어놓았다가 한 군데 자리가 비어서 앉았더니 얼마 안 있어 쓰리 세븐이 터지데요. 볼일 봤으니 훌훌 털고 일어났죠. 그래돈으로 술값을 냈지요, 뭐.”


캡틴이 고맙다며 말했다.

“국장, 대단하네. 그런데 그 아가씨한테 독일 갈 거라고 연락은 했소?”

“그렇지 않아도 아까 전화를 몇 번 했었는데 연결이 안 되네요. 귀선하면서 부두 앞 공중전화에서 한 번 더 해보려고요.”

“그래? 국장 덕에 잘 마셨네. 다음에는 내가 한잔 사지. 자 모두 건배합시다. 독일에 있는 특파원 남희 씨를 위하여!”

모두 웃으며 함께 잔을 부딪쳤다.


“나미야, 짠! 드디어 독일에 간다.”

내 들뜬 목소리에 지구 반대편에서 밝고 청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정말? 그래, 언제 오니?”

“뭐, 일본에서 원목 풀어주고 중국 가서 짐 싣고 유럽 가는 데 두어 달은 걸리겠지.”

“야, 짜샤! 나 성질 급한 거 알지? 너 짱 박아 놓은 돈으로 비행기 타고 와라. 내가 공항에 마중 나갈게. 호호호.”

“뭐라고? 하하하.”

그리고 그녀답지 않게 수줍게 말을 이었다.

“어째, 네가 텔레파시를 보냈는지 오늘 일하면서 종일 안절부절못했거든, 알아? 그러니까 네가 독일에 온다는 소식 들으려고 그랬구나.

작가의 이전글 아~ 한진 인천 호 이항사의 앳된 목소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