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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4. 2024

검게 젖어가는 ‘HAPPY LATIN’ 호

피노키오 증후군


“어~ 국장님. 아직 안 나가셨네? 한국 배에서 책하고 비디오테이프 바꾸러 왔어요. 안 바쁘시면 좀 도와주실래요.”

정박 당직 중인 동갑내기 삼항사가 현문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직이 우선이니까, 그 선원들 오라고 해요. 어느 회사요?”

“범양상선의 ‘오션 노블’ 호라고 하던데요.”

이렇게 외국에서 한국 배를 만나면 선원들이 서로 놀러 가기도 하고 책과 비디오테이프를 바꿔보기도 한다.

남희와 같이 다른 배 선원들을 데리고 부원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 가져온 책과 비디오테이프 수만큼 바꿔주었다.

그 배 선원 중 한 명이 자기 배 캡틴이 싸롱 사관들 마작하러 놀러 오시라고 고 말했다.

캡틴께 전해주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돌아온 독일 기자가 현문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얼른 현문으로 나갔다.

“나이스 투 미 츄, 아임 조.”

그 잘생긴 독일 청년도 얼른 표정을 고치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이스 투 미 츄 투, 아임 막스.”

악수를 하는 두 사람의 눈에 힘이 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키가 머리 하나만큼 크다.

‘너, 왜 이렇게 잘 생기고 키도 큰데?’라고 묻자, 독일 청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피노키오처럼 만만치 않은데, 뭘...”

“퍽 유, 자네야말로 피노키오 증후군이구먼.”

당직을 서던 삼항사가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이래요. 국장님?”

“아, 몰라요. 간다고 헤어졌는데 지금 다시 왔길래 정식으로 인사하는 중이오. 이 자식이 나보고 이탈리아판 맹구 같다나.”

삼항사가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씩 웃고 도로 나갔다.


함부르크 항의 밤은 더 깊어지고 밤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잠자코 가랑비가 오는 검푸른 바다 야경을 바라보던 남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막스! 너 왜 안 가고 다시 왔는데?”

그 청년은 잡은 내 손을 놓고 남희에게 애절하게 말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나, 지구를 따라 도는 달은 정해진 데로 가. 이미 우리의 삶도 다 길이 정해졌다고 생각해. 다만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지.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헛수고야. 나미는 나의 여자가 될 수밖에 없어.”

막스의 열정적인 말에 남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건 아니지. 독일인인 너의 사랑은 그럴지 몰라도 난 안 그래. 난 이미 나를 이리로 오게 만든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자기 삶을 망쳐버린 여자야. 그래서 그녀를 증오하고 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막스, 너 알지? 내가 전에 말한 ‘전’이라는 한국 여자.”

막스가 ‘야’라고 대답하자 남희는 나지막한 어조로 이어갔다.

“내가 하는 말을 막스는 잘 이해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면 네 삶은 더 행복해지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난 고등학생 때 이미 너희 나라 작가 루이제 린저, 피터 한트케 그리고 토마스 만 등을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려준 이 중 한 명인 ‘전혜린’이라는 사람에게도 열광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녀는 결국 편견과 따돌림에 더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인생을 포기했어. 그런 그녀가 안타까워서, 아니 미워서 나는 내 책상 앞에 ‘홀로 당당히 서자!’라고 써 붙였고, 독일 특파원 자리가 나와 른 지원했지. 몰라~ 네가 내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난 그래. 개도 안 물어가는 제도, 윤리...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고정관념, 편견과 싸우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야무지게 말하던 남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 좋아! 그런데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또한 하고 싶은 일이 많아. 그래서 아직은 어디에 매이고 싶지 않아. 옆에 있는 내 동기도 마찬가지야. 그를 학교 다닐 때부터 좋아했지만, 나는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몸이고, 나로서 일생을 마칠 사람이기에 시간이 아까워.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질 순 없잖아?”


막스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동색 코르덴 상의 안에 있는 것을 꺼내서 남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미! 너의 한국 애인과 오랜만에 만났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나는 갈게. 누가 뭐라든 나는 나미를 사랑해. 그리고 가다 생각해 보니 비행기 표를 예약하지 않으면 아침에 못 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방송국 카드로 예약했어. 거기 있는 전화번호로 확인하고 타고 와.”

다시 나를 쳐다보며 손을 내미는 막스.

나도 막스의 길고 하얀 손을 잡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이스 투 해브 멧 츄, 굿 럭 투 유.”

내 말에 막스가 대답하며 돌아섰다.

“좋은 시간 되기를.”

뮐러가 쓴 ‘독일인의 사랑’도 난해하지만, 운명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사랑한다고 말하는 막스도 역시 독일인다운 생각이다.

개뿔,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갖다 붙이긴...

현문 앞에서 서성이며 우리를 지켜보면서 당직을 서던 삼항사가 막스의 마지막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우산을 쓰고 함부르크 BLG 자동차 전용 부두 길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시내로 가려면 차를 타야 한다.

싸늘한 수은등에는 여전히 빗방울이 을씨년스럽게 스쳐 지나간다.

“우리 어디 가서 칼바도스나 시나몬과 바질이 든 따뜻한 와인 한잔할까?”

남희의 가라앉은 말에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HAPPY LATIN’ 호는 검게 젖어가고 있었다.

사람은 어둠을 두려워한다.

그게 카타르시스가 될 수도 있지만...


피노키오 증후군은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 나무 인형에 빗대어 나온 말이다.

상대방의 일상적인 친절이나 웃음을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나 조롱으로 여겨 몸이 경직되는 현상을 말한다.

Pinocchio는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로마 신문에 연재했던 모험 판타지 동화이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의 어린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로 지구촌 26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에서 많이 번역된 책 중 하나이다.

pino는 '잣나무', occhio는 '눈'으로 잣나무의 솔방울을 뜻한다.

콜로디는 작가 데뷔 30여 년 만에 피노키오가 빛을 봐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안정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의 저작권은 사후 70년까지 보호된다 하니 잘 쓴 책 하나로 얼굴도 모를 고손자까지 우리를 기억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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