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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5. 2024

함부르크의 홍등가 리퍼반

RADIOACTIVITY, SOS


부슬부슬 밤비 내리는 함부르크 항 BLG 자동차 전용부두에서 우산을 쓴 채 팔짱을 끼고 걷는 두 남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별말이 없다.

그렇게 오래 서로를 생각만 하다가 막상 만나니 할 말을 다 잊었나.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을까?

사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팔에 느껴지는 남희의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 생각에 잠겨있는지 남희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였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앞만 보고 걸었다.

그놈의 막스라는 독일 기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야~! 너 왜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걷니, 어디 불편하냐?”

남희의 청아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속삭이듯 말했다.

“응, 남자는 팔짱 끼면 그래.”

내 뜬금없는 대답에 남희는 ‘싱겁기는...’이라며 피식 웃었다.

마침 부두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미터 택시를 타고 세인트 파울리 다리를 건너 현란한 조명과 음악 소리가 나는 곳에 내렸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법 북적댔다.

바 앞에는 이상야릇한 옷을 입은 건지 입다가 말았는지 젊고 늘씬한 아가씨들이 윙크하기도 하고, 술과 마약에 취한 펑크스타일 남자의 불안한 시선과 마주치기도 했다.

자기들은 다시 오지 않을 이 밤이 행복하겠지.

‘아니 이거 길을 잘못 들어온 거 아냐?’라고 중얼거리자 남희가 웃으며 팔을 더 잡아당기고 말했다.

“리퍼반이야. 유명한 홍등가라는데 한번 구경해 보자. 나 혼자는 못 오잖아.”

남희는 직업의식도 있겠지만, 약간 겁이 나는지 내 팔을 양팔로 부여잡아 가슴에 꼭 안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나는 걷는 게 더 불편해졌다.

포르노 잡지, 비디오테이프, 각종 성 관련 기구를 파는 상점이 곳곳에 보였다.

라이브 쇼와 스트립쇼를 한다는 곳도 여러 군데 있다.

운 좋으면 실력 있는 신인 뮤지션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비틀스도 초창기에 여기 GroBe Freiheit 36 바에서 떴다고 한다.


선원들이야 어느 항구에서나 상륙하면 스트립 바라든지 늘 맥주 마시러 다니라 개의치 않지만, 결혼도 안 한 처녀와 총각이 같이 기에는 좀 그렇다.

많은 사람이 흥미롭게 보기만 할 뿐 돈을 팍팍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젊은 동양인 남녀가 이곳에 나타나자 오히려 그들이 더 신기한지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약간 긴장해서 한 십오 분 정도 걸었을까, 섹시한 복장과 야릇한 표정을 짓던 이들은 흘러가고 좀 조용한 듯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보였다.

그중 한 오래된 카페에 들어갔다.


물 떨어지는 우산은 입구의 우산 통에 꽂고 안내하는 자리로 갈 때 유럽 특유의 오래된 카페 냄새와 함께 발 디디는 나무 바닥 곳곳에서 삐꺽이는 소리가 났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나비넥타이를 매고 예쁜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늘씬한 아가씨가 주문받으러 왔다.

주근깨가 귀엽고 서글서글해 보이는 아가씨에게 계피와 스위트 바질이 든 따뜻한 레드 와인인 글뤼바인과 입구에 보이는 구운 소시지, 소금에 절인 돼지 뒷다리를 맥주에 넣어 푹 삶은 아이스바인을 시켰다.


“우리가 종종 먹는 햄버거와 함부르크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거니?”

내 물음에 와인을 한 모금하면서 자신 없는 듯 대답하는 남희.

“그게 2차 대전 중 미군이 함부르크주둔했을 때 독일 사람이 빵 사이에 햄을 끼워서 먹는 걸 보고 그것이 미국으로 퍼지면서 햄버거가 된 거 아니니?”

13세기 칭기즈칸의 유라시아 원정군이 말 달리며 먹던 고기와 채소 넣은 빵이 러시아를 거쳐 함부르크까지 들어왔단다.

유럽, 미주 항로를 다니던 선원이 전파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다가 19세기 미국에 독일 이민자가 정착하면서 함부르크 스테이크가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명칭은 함부르크식이라는 뜻에서 '함부르거(Hamburger)'라고 불렸는데 하도 자기가 원조라는 설이 많아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햄버거가 만들어지고 발전된 곳은 미국이라고  수 있다.

그렇기에 햄버거의 국적은 카피해서 정착한 미국이라고 수도 있다.


한기가 느껴지던 북유럽의 초겨울 거리를 걷다가 카페에 들어와 따뜻한 와인을 마셨더니 둘 다 얼굴이 분홍으로 물들었다.

“나미야! 넌 그냥 볼 때도 예쁜데 술 한잔 하면 더 예뻐 보여. 때깔도 좋고.”

내 말에 피식 웃던 남희는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잠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 학교 들어올 때 기억나니?”

카페의 스피커에서는 귀에 익은 독일 그룹 크라프트베르크의 ‘라디오액티비티’가 모스부호와 함께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도쓰돈 도쓰 쓰돈돈 돈돈 쓰쓰쓰...

R A D I O...


“뭐를?”

내가 묻자 남희가 생글거리며 이어간다.

“우리 과 입학 동기 중에 전자통신학과를 알고 온 애는 너밖에 없었던 거 같아. 너는 라이선스 따서 배를 타고 돈 벌면서 세계 일주하고 싶다고 왔잖아. 나나 다른 애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들어왔지. 그런데 실제 졸업하고도 큰 외항선을 탄 동기는 너밖에 없잖아. 다들 방송국이나 전자 회사로 들어가고.”


친구들과 음악다방에서 시간 죽일 때 ‘RADIOACTIVITY’가 나오면 종이에 모스부호를 받아 적어 다른 과 친구들이 신기해했었다.

Radioactivity is in the air for you and me

방사능은 너와 내가 있는 공기 중에 있어

Radioactivity discovered by Madame Curie...

방사능은 퀴리 부인이 발견했지...


남희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술을 뗐다.

“너도 이제 가정을 가져야 하잖아. 어떻게 생각하는데?”

“흠, 나? 나미도 마찬가지잖아.”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남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 나는 이렇게 외국에 살아보니 한국에 다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난 내 일을 무지 사랑하거든. 내가 내 하는 것과 이것저것 배우는 것이 바빠서, 누굴 사랑하거나 미워할 틈도 없어. 기회가 되면 헝가리에 가서 음악 공부할 생각도 있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그녀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글뤼바인을 한 모금하고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돈이나 명예 그런 것은 관심 없고, 내 일과 처음 보는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멋진 풍경과 사람들 보는 게 너무 재미있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 같아. 우리 선배 중에 배 타면서 사진 찍고 세계 각국 기행문을 쓰는 칼럼니스트가 있다잖아. 나도 여기저기 더 다니면서 자료를 준비해서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한비야’라는 아가씨는 아예 몇 년씩 외국에 혼자 돌아다니며 글만 쓰던데.”


“너 닮은 아이 갖고 싶니?”

남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헛웃음이 나와 대답을 얼버무렸다.

“글쎄... 갑자기...”

“나, 어렸을 때 병원에서 선천적인 불임이라 아이 못 갖는다는 이야기 진작 했잖아?”

“그래, 독일 발령받고 보낸 편지에서...”

“나도 널 사랑하거든.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너에게 더 좋은 일일지 갈피를 못 잡겠어. 그냥 이렇게 세월만 보낼 수도 없고, 그치? 우리 이렇게 만나면 사랑하고... 떨어져 있을 땐 너는 너대로 사랑하고 그래라. 너 배 타고 다니는 항구마다 젊고 예쁜 여자 많잖아. 학교 다닐 땐 샌님같이 빌빌대더니 이젠 부뚜막 고양이가 돼가지고... 호호호~”

남희의 생각지 못했던 말에 나는 아까 하얗던 머릿속이 이제는 까매져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렸을 때 어머니 심부름으로 숯 사러 갔다가 종이봉투가 터져 땅바닥에 쏟아진 숯덩어리를 대책 없이 바라보던 때같이...


“자기야, 피곤하니까 어디 근사한 호텔로 가자!”

남희가 일어서면서 씩씩하게 말하는 순간, 스피커에는 ‘RADIOACTIVITY’의 모스부호 ‘돈돈돈 쓰쓰쓰 돈돈돈 (SOS)’이 비틀린 기계음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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