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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Apr 26. 2024

네 품에 안겨 죽고 싶어

남해의 독일 마을

글뤼바인 몇 잔에 몸과 마음이 따뜻해진 두 연인은 레스토랑을 나와서 팔짱을 끼고 말없이 걷고 있었다.

벌써 낙엽이 진 함부르크의 초겨울 밤은 북해의 차가운 바람과 좀 전에 내렸던 비로 한기를 느낄 정도로 쌀쌀했다.

“추워?”

내가 묻자, 고개를 끄떡이며 양팔로 내 오른팔을 더 끌어안고 진저리를 치는 남희.

“따뜻한 데 있다가 나오니 더 추운가 봐.”

알스터 호수에는 주위 건물의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멋진 야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케네디 다리 난간에는 수많은 갈매기가 앉아서 조는 듯했고 다리 아래에 백조로 보이는 것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

한참 걷다가 르네상스풍의 오래된 작고 아담한 호텔이 붉은 네온과 함께 고즈넉하게 보였다.

“저기 들어갈까?”

“응, 추워.”

가녀린 남희의 대답에, 안긴 팔을 가볍게 빼면서 다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걷는 게 다소 편해지며 문을 열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건물답게 내부도 고풍스러우면서 많은 동상과 조각품들이 눈에 뜨였고 예술작품 같은 그림과 장식품이 벽에 걸려있다.

“야~ 상당히 오래된 건물인데, 침대도 낡아서 삐꺽 대는 거 아냐?”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실내 훈기에 다소 원기를 회복한 남희가 발그레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꿈도 야무져.”

제복 입은 영감님과 역시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5층으로 올라갔다.

그리 밝지 않은 복도의 붉은 카펫을 밟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이 든 웨이터가 불을 켜주고 그에 고맙다고 잔돈 몇 장을 건넸다.


커튼을 젖히니 밤의 휘황찬란한 알스터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 테이블 위에 있는 조명등을 켜고 밝은 샹들리에 불은 꺼서 실내를 은은하게 했다.

인적 드문 호숫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희에 다가가 뒤에서 가볍게 안았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앞만 쳐다보던 남희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내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또 정신이 아뜩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긴 입맞춤 끝에 남희가 입술을 떼며 말을 꺼냈다.

“자기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지?”

응, 나도 그래.”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나, 너 만나기 전에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난 후회, 미련 따위 단어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내 앞에 닥친 일만 하려고 노력하잖아.”

“응...”

“그래서, 자기 하고도 치열하게 사랑을 하고 싶은데... 왠지 아직은 아니다. 난 아직 결혼 같은 거에 매이고 싶지 않거든.”

“그래, 알아. 나도 배를 타면서 결혼해 나미를 생과부로 만들고 싶지 않아. 나미가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도 이해하고. 그런데 난 오늘 밤 너를 갖고 싶거든.”

내 말에 남희가 그 예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꼭 내 몸 상태에 대해 말해야 알겠니? 아직은 아니라고 했잖니.”


말없이 남희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내 눈을 보고 그녀가 조용히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같이 학교 다닐 때 기억에도 라인 자국은 보이지 않고 아름답게 출렁이던 가슴.

블라우스 단추를 푸니 봉긋한 하얀 가슴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망설이며 가만히 남희의 얼굴과 드러난 가슴을 쳐다만 보고 있는 나에게 ‘가까이와, 니가 그렇게 갖고 싶어 했잖아.’라고 호흡이 좀 가쁜지 콧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미의 아름다운 가슴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며 수많은 여인을 봤지만, 나미같이 멋지고 예쁜 여자는 못 봤어.”

남희가 몸을 가볍게 떨면서 말했다.

“나는... 널 늘 자유스럽게 놓아두는 것이 제일 나을 거라는 생각을 많이 해. 사랑해!”


한참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서로 안고 있다가 남희가 말했다.

“미안한데... 꼭 할 말이 있어.”

“응, 말해.”

“나... 배고파.”

“뭐? 하하하~ 정말 못 말려. 나미는 언터처블 마인드야.”

남희가 이어서 말했다.

“너 아니? 난 배고프면 슬퍼져.”

나는 포옹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하하하~ 아이고, 이 배고파 선수.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불 켜진 가게가 보이더라. 뭐 사 올까?”

아무거나 사 오라는 말에 문을 열면서 한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나도 배고파. 오늘 밤새 나미 가슴 먹으면서 자고 싶어.”

그러자 그녀가 '짜샤~, 너 주거쓰!' 하며 주먹으로 날 때리려는 시늉을 하고 나는 급히 도망가면서 말했다.

“오늘 네 품에 안겨 죽고 싶다고~~~.”


196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에서 간호사와 광부가 독일로 가 그들이 기피하던 힘든 일을 했다.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고국에서 보내고자 이들이 귀국하여 정착한 곳이 남해의 독일마을이다.

마을에는 독일풍의 건물뿐만 아니라 독일 맥주, 음식을 즐길 수 있고, 탁 트인 바닷가를 볼 수 있기에 꽤 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시끌벅적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이 형성된 또 다른 목적은 점점 낙후되는 지방에 관광객을 유치하여 지역민의 소득을 올리려는 경제 논리가 있다.

그리움의 종착역에서 조용히 쉬고 싶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민속촌이나 동물원처럼 관광 상품의 하나쯤으로 여겨지는 서글픔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독일마을에 올 때는 그들의 평온한 삶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 어떨까.

그들의 정원에 담을 넘어 들어가 예쁜 집과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는 건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정말 경우 없는 짓이 아닐까.

독일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게 몸에 밴 이들에게는 큰 문화 충격일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유의 여신상이 반기는 미국마을도 있다.

이국적이고 예쁜 풍경을 사진에 담고 맛있는 것 먹고 마시기 위해 이곳을 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나라가 지금같이 잘 살 수 있게 자신의 피와 땀으로 번 달러를 가족에 보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한 디딤돌이 되었던 이들의 생애를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자라는 아이들에 더 뜻깊은 방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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